9. 안시 위린굴(安西 楡林窟)
9. 안시 위린굴(安西 楡林窟)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2.09.19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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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의 미소는 동서를 이어 흐른다

 

▲안시 위린굴은 모가오굴의 자매굴로 불릴 만큼 역사적 가치나 예술적 측면에서 모가오굴에 버금 간다. 작은 계곡인 위린허의 절벽에 조성된 석굴들은 은밀히 몸을 감추고 있어 계곡을 내려다보기 전까지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벌써 3시간째다. 모가오굴(莫高窟)의 도시 둔황현(敦煌縣)을 출발해 안시현(安西縣)으로 가는 길. 남쪽으로는 풀 한포기 없는 치롄산맥(祁連山脈)이, 북쪽으로는 지평선을 그으며 펼쳐져있는 고비사막이 단조롭게 이어진다. 한 시간 전이나, 두 시간 전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지루한 반복이다. 풍경 변화가 없다보니 차가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어느 정도 거리를 이동해 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인가도 없고 지나가는 차나 사람도 없다. 다만 처음 우루무치에 도착했을 때에는 오전 9시가 다 되도록 해가 뜨지 않았는데 이제는 일출과 일몰 시간이 얼추 시계 바늘과 맞아 떨어진다. 그만큼 동쪽으로 많이 이동했음이다.


둔황현에서 동쪽으로 150km 가량 떨어져있는 안시현의 옛 지명은 과주(果州)다. 과일이 많이 생산돼 붙여진 이름이다. 투루판이 포도로 이름 높다면 안시현에서는 사과, 수박, 하미과, 호박, 포도, 살구, 자두, 복숭아 등 다채로운 과일이 생산됐다. 오죽하면 이름이 과주였겠나. 비록 지금은 작은 농촌의 모습이지만 중국의 목구멍 둔황, 그리고 만리장성의 서쪽 첫 관문 자위관(嘉關)의 중간에 위치한 안시는 그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이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치던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


석굴의 위상 역시 모가오굴에 버금간다. 이곳에 조성돼 있는 위린굴(楡林窟)은 모가오굴과 마찬가지로 하서회랑에 자리하고 있는 둔황석굴의 하나로 분류된다. 특히 위린굴 벽화의 내용, 회화형식, 그리고 예술적 품격은 모가오굴과 일맥상통하고 있어 모가오굴의 자매굴로 불린다. 규모면에서는 모가오굴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 예술성과 역사적 가치는 뒤지지 않음이다.


위린굴은 안시현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75km 가량 떨어진 위린허(楡林河) 기슭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위린굴이라는 공식 명칭 못지않게 만불협(萬佛峽)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작은 골짜기에 무수히 많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는 의미다.


3시간여의 지루한 주행 끝에 위린굴 입구에 도착하니 칼로 베어낸 듯 땅이 움푹 꺼진 수직의 절벽 아래, 작은 계곡 양쪽으로 석굴들이 줄을 잇는다. ‘안시 위린굴’이라는 안내석은 계곡 아래로 길게 이어져있는 계단 초입에 서 있다. 앞서 지나온 베제클리크석굴과 마찬가지로 위린굴도 절벽 허리에 은밀하게 몸을 감추고 있다. 계단에 발을 들이기전까지는 입구에서 석굴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베제클리크와 비슷하다.


하지만 베제클리크와는 달리, 이곳의 석굴들은 모가오굴과 마찬가지로 약탈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보호됐다.

 

위린굴에는 현재 42개의 석굴이 남아있다. 계곡 동쪽 절벽에 31개, 서쪽 절벽에 11개가 각각 자리한다. 동쪽 계곡은 잘 정비돼 있어 옛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지만 맞은 편 서쪽 계곡은 몇몇 계단을 제외하곤 여전히 자연적으로 이뤄진 비탈길들이 석굴과 석굴 입구를 연결하고 있다. 위린굴의 옛 모습이 아마 이와 같았을 것이다.


위린굴은 둔황의 여러 석굴 중에서도 비교적 연구가 더딘 곳이다. 특히 국내에서는 변변한 소개 책자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탓이기도 하다. 각각의 석굴이 언제 조성됐는지도 정확하진 않다. 석굴의 형식과 회화의 특징 등으로 미루어 당대(唐代)에 4개, 오대(五代)에 8개, 송대(宋代)에 13개, 서하(西夏)시대에 4개, 원대(元代)에 4개, 그리고 청대(淸代)에 9개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벽화의 총 면적은 4200㎡, 채색이 돼 있는 조각이나 소조상도 259점이 남아있다. 그러나 석굴 조성 당시에 만들어진 원래의 조각은 드물다. 현존하는 대부분은 후대에 중수하거나 새로 조성한 것들이다.


석굴 안내인은 우리가 1주일 만에 처음 찾아온 방문객이라며 반긴다. 유독 날씨가 추운 탓인지 방문객은 우리 일행뿐이다.


위린굴의 벽화 내용과 예술적 특징, 건축법, 조각·소조상의 제작 기법, 그리고 벽화 제작 방식 등이 모가오굴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들도 많다고 한다.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한 수 있을까. 작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석굴로 들어선다.


16호굴은 위린굴과 모가오굴의 관련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6호굴은 오대(907~979)에 이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했던 조씨 가문의 조의금에 의해 조성됐다. 조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는 장씨 가문이 실세였다. 장씨 가문, 특히 장의조는 당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하서회랑을 점령했던 토번의 세력을 몰아내며 ‘황제의 신하’임을 자청했던 인물. 그는 앞서 보았던 모가오굴에 대규모 가문굴을 조성하며 벽화에 자신과 가족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출행도’라는 또 하나의 벽화 형식을 탄생시킨 인물이다. 그 뒤를 이어 통치권을 장악한 조씨 가문 역시 모가오굴에 가문굴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곳 위린굴에도 자신의 가문을 위해 석굴을 조성했다.


16호굴 입구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의 벽면, 모가오굴에서 보았던 조씨 가문의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920년 통치권을 손에 넣은 조의금과 그의 부인인 위구르공주의 모습이다. 모가오굴에서 보았던 위구르공주의 모습보다 더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의금은 정권을 잡은 후 동쪽에 인접해 있던 위구르왕가의 딸과 정략결혼 해 영토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때 시집온 위구르공주가 바로 이 그림 속 주인공이다. 그 대접이 어찌 지극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여러 부인들을 제쳐두고 위구르공주를 이처럼 정성스럽게 그린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물론 이런 추측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그저 상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벽화를 살펴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인 것만은 분명하다.


19호 굴에서도 조씨 일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조의금은 동쪽 못지않게 서쪽의 안정도 중요시 여겼다. 그는 서쪽 호탄국과의 우호를 위해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호탄왕과 친인척의 연을 맺었다. 덕분에 후일 조의금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조원충은 조씨 정권 최고의 전성기를 열 수 있었다. 조원충이 조성한 19호굴에는 자신과 부인 적씨, 그리고 그 사이 호탄왕에 등극한 조원충의 조카 모습까지 등장한다. 조원충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호탄국과의 관계를 중시 여겼다. 하지만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며 호탄왕을 달랬던 것과는 달리 그는 호탄왕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외숙이라며 숙질간의 예를 내세우는, 보다 대담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조원충의 집권 시기 그의 힘이 그만큼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19호굴에 그려져 있는 문수보살도에서는 문수보살이 타고 있는 사자의 고삐를 호탄왕이 붙잡고 있는 모습이다. 명색이 왕인데 마부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자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잔뜩 힘을 주고 있는 호탄왕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감상일까?


그림들의 역사적 사실 관계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위린굴이 모가오굴과 대등한, 혹은 모가오굴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석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지연 금강대 HK교수는 “16호굴과 19호굴에서 확인되는 조씨 가문 관련 벽화들은 모가오굴과 위린굴이 자매굴 혹은 함께 개착되고 관리되었던 석굴군임을 보여주고 있다”며 “19호 굴에는 석굴 조성에 동참했던 공양자들의 이름도 남아있어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조원충의 집권 시기 절정에 달했던 조씨 가문의 권력은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역사학자 중에는 불교에 심취한 조원충과 부인 적씨가 끊임없이 불사를 일으키고 석굴을 조성하는 등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자 조씨 가문에 대한 불만이 확대됐다고 그 이유를 분석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조씨 가문이 불교를 정권의 정신적 지주이자 하서회랑 문화의 중심으로 삼아 인근 이민족과의 융합을 꾀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이민족을 정복하고 굴복시키는 것은 칼이었지만 그들을 끌어안고 융합을 이뤄내는 것은 종교의 힘, 앞선 문화의 힘이었던 것이다.


위린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여러 시기에 걸쳐 조성되고 보수되면서 각각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 중기인 8세기부터 하서회랑 지역이 토번왕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며 석굴에서도 토번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위린굴에서는 모가오굴에서 보이지 않았던 티베트 양식의 벽화들이 다수 등장한다.


토번국이 하서회랑지역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던 776년 조성이 시작된 15호 굴에서는 티베트 불교 양식의 북방천왕, 당나라 장군 복식의 남방천왕이 나란히 등장해 눈길을 끈다. 전형적인 당나라 풍의 비천상과 호랑이 가죽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티베트풍 역사(力士)의 모습도 공존하고 있다.


당나라 중엽에 건립된 25호굴에서도 티베트영향이 선명하다. 남방천왕과 북방천왕의 복식이 티베트풍이며 호피를 두른 티베트 장군 모습의 신장이 등장한다. 25호굴의 전실 입구는 문화혁명 시기 벽화 위에 시멘트를 발라 심하게 훼손됐지만 주실에는 색이 선명하고 정교하게 그려진 수준 높은 벽화가 잘 보전돼 있다. 관세음보살의 상호에는 섬세하게 음영이 표현돼 있고 버드나무가지를 들고 있는 손의 모양이나 우아한 주름을 만들며 흘러내리는 옷자락 등은 이 벽화를 그린 화공의 솜씨가 상당한 수준이었임을 말해준다. 벽화 속에 등장하는 당나라 여인들의 자태도 풍만하고 화려하다.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깊게 파여진 당나라 복식과 한 가득 틀어 올려 머리를 장식한 가채, 이마에 그려 넣은 꽃잎 모양의 연지, 그리고 집 마당에 떨어져 있는 금은보화 등이 이 석굴을 조성한 주인공의 부유했던 생활을 엿보게 해준다. 이처럼 기법이 섬세하고 보전 상태가 완벽한 벽화는 모가오굴에서도 익히 찾아볼 수 없었다.


위린굴은 당나라 이후 청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고 보수된 까닭에 그 원형이 변형돼 있는 석굴들도 많다.


청대에 조성된 11호굴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수신, 우신, 풍신을 위해 조성된 석굴이지만 3호굴에 봉안돼 있던 18나한을 이곳으로 옮겨 놓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5대10국(907~979) 시기에 조성된 12호굴에는 본존불을 봉안해야할 자리에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명의(名醫) 손사막 상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느 시점인가 본존불이 사라지고 청대에 이르러 도교가 유행하자 이 같이 왜곡된 것이다. 역시 같은 5대10국 시기에 조성된 13호굴도 송나라 시기에 벽화를 보수하고 청나라 시기에 주불을 다시 조성하며 단조롭고 무디며 조잡한 형태로 퇴락했다. 이것 또한 실크로드에 대한 중원의 장악력이 약화됐음을 고스란히 반영한 또 다른 역사의 기록이다.


위린굴에서 눈길을 끈 또 하나의 석굴은 송나라 시기 이 지역을 장악했던 서하(1038~1227)의 소수민족 당항족에 의해 조성된 2호굴이다. 당항족은 지금은 사라진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다. 벽화 속에 남아있는 그들의 모습은 기골이 장대하고 한자의 부수를 이용해 만든 자신들의 문자를 갖고 있었으며 불교를 신봉했다.


무엇보다도 이 석굴에는 둔황 지역 전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수월관음도가 남아있다. 수월관음도는 8세기 후반 당나라 황실 궁정화가였던 저우황(周昉)에 의해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송·원대에 특히 유행했다. 석굴에 남아있는 수월관음도 역시 저우황의 그림을 모델로 조성된 것이다.


수월관음도가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둔황까지, 동쪽으로는 신라에까지 전해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수월관음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려 불교예술의 최고봉, 수월관음의 미소를 이곳에서 만나니 실크로드의 시작은 장안이 아니라 한반도임이 새삼 느껴진다.


길은 이어지고 역사는 흐른다. 그 길 위에 서있는 우리의 걸음도 동쪽을 향해 계속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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