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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주취안 원수산(文殊山)석굴

문화대혁명 할퀴고 지나간 아픈 역사의 남루한 발자취

산 전체 360여 석굴·암자 산재
‘숙주팔경’에 손꼽혔던 불교성지


문화대혁명 겪으며 철저히 파괴
무너진 석굴 주검처럼 널려있어

 

90년대에 불상·벽화 일부 복원
유구한 역사 대신 초라한 흔적만

 

 

▲북조 시기에 조성된 원수산석굴은 산 전체에 360여 개의 석굴과 암자 등이 산재해 있는 거대한 불교 성지였다. 그러나 1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온 석굴군은 근대에 이르러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처참히 훼손됐다.

 

 

원수산(文殊山)은 간쑤성(甘肅省) 주취안(酒泉) 동남쪽 15km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북조(420~589) 시기 원수산 남북면에 걸쳐 360여 개의 암자와 석굴, 사찰 등이 조성됐다. 그 석굴과 사찰 모두를 아울러 원수산석굴이라 부른다. 산 앞쪽인 북면에 천불동, 만불동, 태자사가 있고 뒤쪽인 남면에 고불동, 천불동, 관음동 등이 있다. 그 사이 산기슭을 따라 수많은 석굴들이 흩어져 있다. 산 하나가 모두 석굴군인 셈이다. ‘원수산석굴’이라는 입구의 안내판 앞에 서니 어디서부터 살펴봐야할지 막막하다.


나무나 풀이 없어 민둥산에 가까운 원수산은 산 전체에 흩어져 있는 석굴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린 벌집 같아 보인다. 산 중턱 곳곳에 사찰로 보이는 건물들도 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도량인지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다만 우측에 비교적 큰 사찰이 보여 우선 그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른 아침이라 도량 입구는 아직 한산하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대웅보전 현판 앞에 서니 지긋이 나이 먹은 비구니 스님이 나와 일행을 맞는다. 답사를 시작한 이례 사찰에서 스님을 보기는 처음이다. 비로소 유적으로 남은 석굴이 아닌 예불과 신행이 이뤄지는 여법한 도량을 만난 셈이다. 반가운 마음에 합장으로 인사하고 법당에 들어선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599~649)의 아들이 이름 모를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는데 이곳 원수산에 있는 샘물을 먹고 병이 낫자 부처님의 은혜라 여겨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일행의 참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스님은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며 “법당 안의 벽화도 당나라 때 조성된 것”이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한 눈에 보아도 최근에 보수한 흔적이 역력하다. 다만 스님의 설명을 통해 이곳 원수산이 황제도 관심을 가질 만큼 중요한 불교 성지였음을 짐작한다.


입구에는 목조전실이 설치돼 있지만 법당은 산허리를 개착해 조성한 석굴이다. 법당 안에는 다시 감실을 파 불상을 봉안했다. 벽화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불상도 근대에 조성하거나 보수한 것들이지만 이와 같은 불상 봉안과 법당의 형태가 이곳 원수산석굴의 주된 형식인 것만은 참고할 만하다.


본격적인 석굴군 입구는 사찰에서 약 800m 가량 떨어져 있다. 원수산석굴은 유독 훼손이 심하다. 대부분 허물어지고 부서져 석굴이라는 이름자체가 무색할 지경이다. 석굴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곳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고 벽화가 남아있는 석굴은 두어 곳 남짓에 불과하다. 그나마 산 정상에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석굴이 있지만 당국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일단 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산비탈 계곡을 따라 산중턱으로 오르니 곳곳에 석굴의 흔적이 주검처럼 흩어져 있다. 입구가 허물어져 들어갈 수조차 없는가 하면 입구가 온전하다 해도 석굴 안이 텅 비어있다. 불상도, 좌대도, 벽화도 없다. 석굴 벽에서 떨어져 나온 진흙 파편들과 석굴 입구에 사용했던 흙벽돌 조각들만 수북히 쌓여있다. 그나마 일부 석굴에서 불상 봉안에 사용됐을 좌대와 광배의 흔적이 보인다. 석굴의 전실이었음직한 널찍한 공터도 있고 흐릿하게 문양이 남아있는 바닥벽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기도 하다. 바닥의 넓이를 가늠해보면 이곳에 제법 큰 규모의 석굴이나 법당이 있었을 듯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석굴들은 어디에 눈을 두고 무엇을 찾아야할지 조차 난감할 지경이다. 눈길 닿는 곳곳이 석굴이지만 온전한 것이 없다.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할지 모르겠다.


원수산석굴의 훼손이 이처럼 심한 이유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문이다. 혼란의 회오리바람은 벽화를 지우거나 훼손하는데 그치지 않고 석굴 자체를 부숴버리는 만행으로까지 이어졌다. 오랜 세월 자연적으로 허물어진 석굴도 많지만 인간에 의해 자행된 파괴는 수백 년의 세월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허물어진 석굴만이 흩어져 있는 계곡을 내려와 원수산석굴 관리인의 안내에 따라 “비교적 잘 보전돼 있다”는 천불동과 오백나한당을 돌아본다. 90년대 들어 보수와 재건을 거친 곳들이다. 두 곳 모두 ‘U’자형 석굴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옆에 있는 출구로 나올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석굴사원에서 보지 못했던 특이한 구조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고증이나 복원의 손길이 닿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석굴 벽에는 천불도가 빼곡히 그려져 있고 불보살상도 봉안돼 있지만 이곳 석굴군의 오랜 역사를 대변할 만한 것들은 못된다.

 

 

수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까지 이 벽화와 불상들이 무사히 전해진다면 후대인들은 20세기 이곳에 휘몰아친 광풍에 의해 불교가 어떻게 훼손당했고 불교문화가 얼마나 위축됐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초라하고 남루하지만 이것 역시 역사의 한 페이지이자 또 하나의 타임머신이다.


“제대로 된 복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불상과 벽화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죠. 남은 것이 없으니 복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석굴 자체가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상과 벽화를 새로 조성할 수 있었습니다.”


허탈해 하는 일행이 측은해 보였는지, 아니면 때마침 정전이라 그야말로 칠흑 같이 어두운 석굴을 손전등에 의지해 더듬거리며 살펴봐야 했던 것이 미안해서인지 문수산석굴 관리인이 설명을 덧붙인다. 원수산석굴은 한때 숙주팔경(肅州八景)의 하나로 불릴 만큼 절경이었다는데 그 이름도 이제는 옛 이야기로만 남았다.


숙주는 바로 이곳 주취안의 옛 지명이다. 주취안은 글자 그대로 ‘술이 솟는 셈’이라는 뜻인데 그 지명에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 무제(BC 141~BC 87) 시절 곽거병(BC 140~BC 117)이라는 장군이 하서회랑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를 토벌했다. 한 무제는 이곳을 군사 요충지로 삼아 하서사군을 설치했다. 지금의 우웨이(武威. 양주), 장예(張掖. 감주), 주취안(酒泉. 숙주), 둔황(敦煌. 사주)이 그곳이다. 이 지명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주취안은 특히 곽거병의 근거지였다. 어느 날 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에 지친 곽거병을 위로하기 위해 술을 한 병 하사했다. 황제의 선물을 받은 곽거병은 그 술을 우물에 모두 부은 후 그 우물물을 병사들과 나눠마셨다고 한다. 그 후로 숙주는 ‘술이 솟는 샘’이라는 주취안으로 불렸는데 지금도 시내에는 곽거병이 술을 부었다는 우물이 잘 보존돼 있다.


시간의 길이를 가늠한다면 원수산석굴보다 곽거병 우물의 역사가 훨씬 오래 전의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원수산석굴의 모습은 잘 보존돼 있는 곽거병의 우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물론 그 우물도 2000여년 전 모습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곽거병의 전설을 즐겨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것에 비해 원수산석굴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비록 역사의 부침이 오늘날 원수산석굴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그것 또한 석굴 역사의 한 조각이라고는 하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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