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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고려시대 여성 불자들

염불 수행·사경 정진하며 극락왕생 염원

고려여성에 불교는 삶 일부
수행결사·법회도 적극 동참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여성불자를 빼놓고 한국불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불교신앙은 역사적으로 유독 남다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평안과 가족의 무탈을 발원하는 간절함은 굳건한 신심으로 이어졌으며 순수한 불심에 기반한 신행활동은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이런 여성들의 불심을 시대별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유독 고려시대에는 신심 깊은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많아 눈길을 끈다.


특히 그 중 왕실 여성으로 직접 만일결사를 주도했던 인예태후는 깊은 불심과 종파를 아우르는 신앙으로 후대 불교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고려시대 11대왕 문종의 비 인예태후는 대각국사 의천 스님의 어머니로, 의천 스님 외에도 두 아들이 모두 출가했다. 아마도 인예태후의 남달랐던 불심이 아들들의 출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예태후는 ‘고려사’ 후비전에 “불교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로 생전에 불교에 심취했다. 인예태후의 불심은 개인적인 발원을 넘어서는 신앙이었으며 종파를 아우르는 화합의 매개이기도 했다. 의천 스님은 화엄종 승려였지만 그녀의 오빠인 소현과 또다른 아들은 유가종이었기 때문에 인예태후는 모든 종파를 고루 존중했다. 또한 선에 심취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선종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인예태후의 신앙은 교선(敎禪) 통합사상인 성상융회(性相融會)의 경향을 짙게 가지고 고려불교를 폭넓게 아울렀다. 개인적으로도 종파를 넘어선 서방정토 신앙을 기반으로 평생을 아미타 염불수행에 매진하기도 했다.


인예태후는 특히 선종 9년 6월 견불사에서 천태 예참법에 기반한 염불만일결사를 주도했다. 천태예참법은 의천 스님이 중국 지의 스님의 영향을 받아 시행한 것으로 예불과 참회로서 업보를 청정하게 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법회다. 태후가 주도한 결사인 만큼 왕실 여성들이 두루 법회에 참석했다.


이처럼 왕의 어머니인 태후가 직접 수행결사를 주도할 정도로 고려시대 여성들의 수행열풍은 드높았다.


특히 고려여성들은 당시 주요사찰을 중심으로 일어난 많은 염불결사에 적극 동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숙종 6년과 인종 9년에는 “여성과 남성이 구분 없이 승려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염불과 독경을 하며 허황된 짓을 한다”는 이유로 이를 금하도록 했다. 충숙왕 8년 감찰사에서 발표한 금령을 통해서도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성안 부녀들이 상하노소를 가리지 않고 향도(香徒)를 맺어 향을 올리고 등을 켜며 절로 몰려가 승려들에게 간통를 당하는 일이 간혹 있으니 이를 금한다. 평민은 그 아들에게 죄를 주고 양반은 그 남편에게 죄를 줄 것이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찰 출입으로 간혹 승려와의 추문이 발생, 급기야는 나라에서 여성들의 사찰출입을 자제키 위한 금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주요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된 각종 염불결사에 여성들도 함께 동참해 적극적인 신행활동에 나섰음을 반증한다. 여성불자들도 남성과 동등하게 사찰을 드나들며 신행생활을 했으며 당당한 결사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셈이다.


인종대 지리산 수정사 결사도 한 예다. 수정사 결사는 인종 7년 수정사 낙성법회와 함께 시작된 염불결사로 3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결사였다. 이 중에는 여성불자들도 대거 동참해 불상과 탑, 대장경을 조성하고 각자의 근기에 따라 염불, 사경 등의 수행을 통해 극락왕생을 발원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 여성들은 남자와 동등하게 결사에 동참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찰을 찾아다니며 설법을 들었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가 역사서에 전한다.


우왕 2년 나옹 스님이 양주 회암사를 중창했을 때의 일이다. 나옹 스님이 회암사 중창을 회향하고 낙성법회를 봉행했다. 그런데 이날 소식을 들은 개경과 지방의 수많은 여성들이 회암사로 몰려들어 야단법석이 일었고, 회암사가 자리한 마을 사람들이 생업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나옹 스님은 법회를 금지당하고 회암사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당시 여성들의 불법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얼마나 드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 16년 연복사에서 문수회가 개설됐을 때도 여성들이 줄지어 법회에 참석했다. 설법을 듣고자 하는 여성들의 청이 간절해 결국 부녀자들이 법당에서 설법을 들을 수 있게 허락하고 떡 등의 음식을 고루 나눴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같은 사례들은 여성들이 인근 사찰을 찾아 신행생활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넓고 깊은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사찰까지 찾아다니는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새삼 놀랍다. 불법에 대한 고려여성들의 끝없는 관심과 적극적인 행보들이 결국 그녀들의 신앙생활과 불교적 위상을 한단계 높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식 수계받고 오계 실천도
여성 신행, 불교 발전 토대


고려 여성들은 불교신행에 있어 대단히 적극적이었던 만큼 개인적으로도 치열한 신행 생활을 했다. 당시 여성들의 남다른 신행모습은 현재에 전해지는 묘비명 몇 개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고려 여성들은 대체로 염불과 절, 사경 등을 통해 신행생활을 했다. 주로 염불 수행이 널리 보편화되어 있었지만 글을 아는 일부 지배층 여성들은 ‘화엄경’, ‘금강경’, ‘법화경’, ‘천수다라니경’ 등의 경전을 독송하고 사경하는 수행도 병행했다. 지배층에 한정돼 있긴 하지만 여성들이 글을 알아 직접 경전을 독송하고 사경하며 불법을 공부했다는 점은 고려시대여성불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 중 하나다.


여성들이 경전을 읽음으로서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가능해졌으며, 이는 기복이나 극락신앙에서 한층 심화된 신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 후기 여성들이 참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신행변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사찰 건립를 위한 불사에 동참하거나 탑, 불상, 불화를 조성하는데 이름을 올리고, 스님들을 위한 공양을 통해 공덕을 쌓고자 했던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여성들의 신행목적은 대체로 남편이나 부모, 자신의 극락왕생이었던 듯하다. 또 왕실 등 신분이 고귀한 여성의 경우, 자식을 기원하고 원만한 출산과 양육을 발원하는 형태도 적지 않았다.


염불과 사경수행에 매진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고려시대 공신 김태현의 처 왕씨가 있다. 묘비명에 따르면 그녀는 왕씨는 남편이 죽은 후 기일에는 항상 종일토록 아미타불을 염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남편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평생 칭명염불에 매진하면서도 경전을 독송하고 사경해 공양하기도 했다. 왕씨는 ‘법화경’ 200권과 ‘화엄경’ 3권을 비롯한 여러 경전들을 사경해 사찰에 공양하는 등 깊은 불심으로 세간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녀는 한평생 염불과 사경에 매진한 후에는 죽기 직전 출가해 스님의 신분으로 세연을 접었다고 한다. 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을 발원한데 그치지 않고 삶의 마지막에는 짧은 기간이나마 수행자로 살며 공덕을 쌓고자 했던 것이다.


허옹의 처 이씨도 남편의 죽음 이후 20년간 마음을 서방극락에 두고 치열한 염불수행을 이어갔다고 한다. 또 재물을 희사해 세 곳의 사찰을 창건하는 등 불심이 남달랐다. 묘비명에 따르면 이씨는 “항시 마음을 극락에 두고 입으로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며 부처님께 향을 사르고 승려들을 공양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고 한다.


그녀는 생전에 몽선사(夢禪寺)와 가은난야(加恩蘭若), 운룡사(雲龍寺) 등 3곳의 사찰을 창건했는데 몽선사는 남편이 살아있을때 함께 원을 세워 창건한 사찰이며, 가은난야와 운룡사는 이씨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가까운 곳에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그녀는 운룡사에 재물을 공양함에 특히 정성을 다했다고 하니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딸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런가 하면 성리학적으로 이상적인 여성상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자로 살았던 여성도 눈에 띤다. 이보여의 처 여씨다. 그녀는 성품이 유순하고 집안일을 잘했으며 큰일이 아니면 문밖을 나가지 않아 문중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중히 여겼다고 전한다. 성리학적으로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녀는 자라면서 불교에 심취해 자주 불경을 외웠다고 전한다. 어쩌면 그녀는 가난한 삶 속에서 낮에는 길쌈을 하고 밤에는 바느질을 하는 고된 삶에도 수행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했던 것이 아닐까.


보살계를 받고 정식으로 불교에 귀의한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고려사 세가’에 충선왕의 공주가 서역승에게 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대보적경’ 사경발원문에 목종의 모후가 스스로를 보살계 제자로 칭하고 있다. 충렬왕 숙창원비와 충숙왕대 정안군부인 임씨도 수계 받은 기록이 전한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계를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오계를 지키는 삶을 살기도 했다. 술과 고기를 일체 입에 대지 않는가 하면 재일에 고기를 금하거나 오후불식을 행했던 여성도 있었다. 특히 여성들은 태교를 위해 오신채와 육식을 스스로 금하기도 했다.


이 같은 모습은 주로 고승의 어머니에게서 나타나는데 원공국사 지종 스님과 혜소국사 정현 스님, 적연국사 연준 스님의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특히 정현 스님의 어머니는 임신 후 보현보살도 500점을 그려 봉안할 것을 발원하고 아들을 낳는다면 승려로 만들겠다고 서원했다. 그리고 스스로 오신채와 고기를 끊고 불교에 의지해 태교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부처님의 위신력에 기대어 가정의 안위를 발원하는 여성들의 간절한 기도는 깊디깊은 신심이 되어 가족공동체를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있다. 남성 위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상대적 약자였던 여성들에게 불교는 온갖 고통이 산재한 현세를 벗어난 이상향을 상징하는 든든한 의지처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자신보다 가족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발원했던 그들 모두가 보살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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