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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전통사회에서 귀족집단들은 가문의 번영과 지속을 위해 세 가지 영역에 집중하였다. 첫 번째는 자신이 속한 가문에서 대외적으로 관료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근대 티베트사회의 최대 정치기구라 할 수 있는 갈하(噶廈 bkav-shag)에 대다수의 대신(大臣)들이 귀족가문출신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매우 분명해진다. (아래 도표 참조) 갈하(噶廈, bkav-shag)는 일반적으로 175명의 ‘승관(孜仲)’과 175명의 ‘속관(孜仲)’으로 구성된다. 이는 티베트의 귀족계층 중 상층승려와 세속관원이 평행하는 구성이다. 갈하는 귀족세력들의 본영지이며 달라이 라마와 직접적으로 접촉 할 수 있는 세속적 권력기관이기도 하다. 갈하에는 ‘갈륜(噶倫)’이라 호칭되는 중요한 대신들이 있는데 총 4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3인이 귀족이고 1인이 라마승이다. 갈하는 시기적으로 1792년 청조가 추진한 티베트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티베트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주장대신(駐藏大臣)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의도한 만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갈하 내부의 핵심 구성원인 귀족들의 견제와 반항 때문이었다. 청조는 7대 달라이 라마 이후부터 갈하에 소속된 대신들의 신분을 4단계의 품계로 나누어 녹봉을 지급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2품에 해당하는 신분은 달라이 라마이고 3품은 갈륜의 대신(大臣)이다. 4품은 역창(비서담당)와 자강(회계담당)이다.
귀족도 엄격한 상하 등급
티베트에는 지방정부에 속하는 귀족, 빤찬라장(班禪拉章) 소속의 귀족, 싸지아법왕(薩迦法王 )소속의 귀족, 지방성을 지니는 소(小)귀족 등 다양하게 분화되지만 그들이 비록 같은 계층에 소속된 귀족이라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의존성과 종속성이 매우 뚜렷하다. 특히 지방정부 소속의 귀족 내부에는 대단히 엄격한 등급의 상하 구분이 있으며, 이러한 구별은 티베트 사회에서 교류 및 복식 연회 등에서도 확연히 표시될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와 자녀교육 및 윤리관념 등에서도 그 차이가 유별났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신분을 유지 혹은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한 귀족집안의 정치권력은 갈하(噶廈)라고 하는 관료들의 의사결정기구 안에서 몇 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관건이었으며 얼마나 오래 동안 유지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했다. 티베트 지방정부의 구조는 엄격하게 관료주의 체계이다. 앞서 서술한바 지방정부의 관료는 명확하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가 세속귀족으로 구성된 속관(俗官)이고 두 번째가 황교의 승려들로 구성된 승관(僧官)이다. 그런데 모든 속관은 일률적으로 귀족집단으로부터 배출되었다. 이러한 자격은 귀족들만 가질 수 있다. 즉 귀족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티베트 사회의 고위 관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귀족가문이 흥성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영향력 있는 대형 황교사원에 집안의 아들을 출가시키는 것이다. 이는 티베트가 불교사회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활용한 것이다. 티베트는 불교사원의 영향력과 대중성 있는 활불의 존재로 유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원 중심의 사회였다. 이는 일반 티베트신자들이 불교사원과 사원에 존재하는 활불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신봉하는 종교의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귀족가정은 가문의 구성원 중 남자 한명을 필수적으로 사원에 출가시킬 필요가 있었다. 출가한 자식이 사원에서 라마승 혹은 활불로까지 신분과 지위가 상승하면 가문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는 지원세력을 보유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티베트에서 개인적인 종교적 구도와는 다른 차원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혼인 통해 귀족 신분 세습·확장
마지막으로 귀족 가문끼리의 혼인풍속은 가문의 부와 신분을 세습하고 확장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이었다. 티베트 귀족세계에서는 화친(和親)적 성격이 농후한 혼인이 유행이었다. 귀족가문은 정치적, 경제적, 혹은 문화적 역량의 특성에 따라 다른 귀족가문과의 다양한 혼인관계를 형성했다. 이들끼리의 혼인은 장원과 농노의 재정의 증가를 의미하며 자산의 확대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문을 위해 혼인 당사자들의 개인적 감정과 의견은 배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티베트사회에서 ‘일처다부제’형식의 혼인은 매우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한명의 부인이 다수의 남자를 한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나이의 순서에 따라 형이 먼저 동거를 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의 남편으로 인정받아 동거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하지만 형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여자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했다. 일반적으로 농노나 유목인의 가정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발생했으나 귀족의 가문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왜냐하면 형제지간의 마찰과 불협화음은 가문의 붕괴와 재산의 유출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처(共妻)의 상황 중에 형이나 동생이 다른 배우자를 원한다면 가문은 우선 그를 설득하고 복종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다른 배우자를 고집한다면 가문의 회의를 통해 새로운 반려자를 찾아주고 재산을 떼 주어 ‘분가’(分家)시키기도 하였다. 가문에서 분가할 때 허락해주는 재산은 가문명의로 되어있는 토지이다. 만약 토지가 부족할 때에는 가문의 이름으로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귀족가문이 제일 꺼려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파랍(帕拉, pha-lha)가문은 이러한 제산유출과 인적융합의 분열을 방지하고자 일처다부와 형제공처(兄弟共妻)를 과감히 시도한 전형적인 귀족가정의 사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귀족사회에서 공부(共夫)혹은 공처(共妻)의 혼인 사례보다는 일부일처(一夫一妻)의 혼인형식이 선호되었고 제일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심혁주 교수 tibet007@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