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예(張掖) 마티스(馬蹄寺)석굴군-上
11. 장예(張掖) 마티스(馬蹄寺)석굴군-上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2.10.1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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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산맥’ 허리에 내려앉은 작은 수미산인가

하서회랑의 군사·경제 요충지
마르코 폴로도 매료 당한 도시

 

5호16국 시기 수많은 이민족 흥쇄
다양한 문화 어우러진 문명교역로

 

 

 

▲ 마티스석굴군의 하나인 베이마티스. 산 꼭대기에 성벽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 절벽을 뚫어 석굴 사원을 조성했다. 계단이나 난간 대신 바위산 속을 뚫고 올라가는 석굴통로로 각각의 석굴을 연결, 5층 규모의 석굴 사원을 조성했다.  

 


하서회랑(河西回廊)의 허리춤에 위치한 작은 도시 장예(張掖)의 옛 지명은 감주(甘州)다. 곽거병(BC 140~BC 117)이 하서회랑의 흉노를 토벌하고 서역으로의 이동로를 확보한 후 한 무제는 하서회랑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이곳에 하서사군(河西四郡)의 군사 주둔지를 설치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감주였다. 이 감주의 감(甘)자와 앞서 지나온 주취안(酒泉)의 옛 지명인 숙주(肅州)의 숙(肅)자에서 이곳 하서회랑 지역의 정식 성(省) 명칭인 감숙(甘肅)이 유래했다. 장예는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 즉 물산과 자본이 모이는 흥성한 도시이자 하서회랑을 호위하던 군사요지였다. 장예라는 이름도 ‘단흉노지비 장중국지액(斷匈奴之臂 張中國之掖. 흉노의 팔을 잘라 중국의 겨드랑이를 넓힌다)’을 줄여서 만든 이름이니 무제의 흉노 정벌 의지가 서리서리 쌓여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장예는 풍성한 도시였다. 특히 남쪽에 펼쳐져 있는 치롄산맥(祁連山脈)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헤이허(黑河) 덕분에 토양도 비옥하고 농산물도 풍부했다. 실크로드 무역이 번성했던 당나라 때에는 ‘돈의 장예(金張掖)’라는 별명도 생겼다. 수나라 양제는 영토의 서부를 순례하며 이곳까지 와서 서역 30여 국가의 왕과 사신들을 접견했고 명나라 때까지도 만리장성을 지키는 백만 수비군의 주둔지로 명성을 이어갔다. 13세기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는 이곳 장예에 매료돼 1년여를 머물기도 했다. 그의 여행을 기록한 ‘동방견문록’에는 그를 사로잡았던 장예의 대불사(大佛寺)에 대한 묘사가 남아있다.


‘불교 사원과 승원도 많으며 거기에는 하나같이 무수한 상(像)이 안치돼 있다. 이들 상 중에는 실제로 10페이스나 되는 거대한 것도 있다. 소재도 나무, 진흙, 암석 등 다양한데 한 결 같이 도금돼 있다. 솜씨도 매우 훌륭하다. 거상은 옆으로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고, 주위에는 공손하게 이를 모시고 있는 숱한 소상이 에워싸고 있다.’


오늘날 장예 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대불사에는 길이 3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와불과 부처님의 열반을 지키며 도열해 있는 10대 제자들의 소상이 동방견문록 속 묘사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남아있다. 대불사는 1098년 창건됐는데 장예는 원(元)나라 세조인 쿠빌라이칸(1215~1294)의 고향이며 그의 어머니 역시 사후에 이곳에 안치되었다. 이런 이유로 대불사에는 티베트불교를 따랐던 원나라 왕실의 영향을 보여주듯 거대한 티베트식 불탑이 서 있다.
장예는 한족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영광의 도시지만 오늘날 이 지역 석굴에서는 다양한 민족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5호16국(304~439)시기 중 흉노계의 노수호족(盧水胡族)이었던 저거몽손(沮渠蒙遜)이 하서회랑 지역에 건국한 북량(北凉, 397~439)시기 개착된 마티스(馬蹄寺)석굴군 역시 하서회랑을 거쳐 갔던 다양한 민족의 자취가 남아있는 유적이다.


장예에서 남쪽으로 65km, 수난위구족(肅南裕固族)자치현 내에 있는 마티스석굴군은 치롄산맥 중 마티산(馬蹄山) 중턱을 따라 30km에 걸쳐 넓게 분포해있다. 천불동(千佛洞), 베이마티스(北馬蹄寺), 난마티스(南馬蹄寺), 진타스(金塔寺) 그리고 상·중·하 관음동의 7개 구간에 약70여 개의 석굴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일반에 공개되는 석굴은 천불동과 베이마티스, 그리고 진타스 정도다. 천불동에는 8개의 석굴이 그리고 북사에는 33개, 금탑사에는 2개의 석굴이 있다. 오늘 하루 동안 세 곳의 석굴을 모두 돌아볼 계획이다. 이른 아침부터 길을 서둘러 천불동에 도착했다.

 

 

▲ 마티스석굴군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천불동.

 


천불동의 석굴은 크게 남단, 중단, 북단의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단과 중단에는 불상을 봉안한 법당 형식의 석굴이, 북단 구역에는 산자락을 따라 부조(浮彫)로 조성된 석탑림(石塔林)이 길게 펼쳐져 있다. 북단의 부조 석탑은 그 수가 족히 수백 개는 됨직 하다. 더욱이 조성된 지 꽤 오래돼 보이는 것들 사이로 이제 막 새로 조성된 듯 말쑥한 석탑들이 뒤섞여 있어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탑들은 모두 티베트불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대부분 원·명 시대에 조성됐으나 일부 서하(1038~1227)시기에 조성된 석탑들도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된 것과 새로 조성된 것을 구분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석탑을 조성하는 신심이 예나 다를 바 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마티산 중턱에 70여개 석굴 산재
천불동·北마티스·진타스만 공개

 

해발5500m 능선 휘감은 석굴 앞엔
치롄산맥이 숨겨 놓은 비경 펼쳐져

 

 

▲ 각각의 석굴들은 이렇게 좁은 통로로 연결된다.

 


남단과 중단에 자리하고 있는 석굴들은 모두 가파른 바위산 허리춤에 자리하고 있다. 각각의 석굴은 절벽면을 따라 조성돼 있는 좁은 난간과 계단들로 이어지는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약사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석굴만은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질 않는다. ‘도대체 저 석굴엔 어떻게 올라갈까’ 이 궁금증은 잠시 후 베이마티스에서 풀렸다. 어쨌든 천불동의 석굴들은 입구에 기와를 얹은 목조전실들이 설치돼 있다. 이 목조 전신들은 1층, 혹은 2, 3층에 달하는 것들도 있다. 덕분에 석굴들은 바위산 중턱에 매달려 있는 알록달록한 제비집처럼 보인다.


4세기 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불 입상을 비롯해 천불동에 남아있는 석굴들은 대부분 북량 시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석굴 내부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보살상과 아라한상은 비교적 후대에 복원된 것들이다. 복식이나 문양들도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없다. 벽화도 이미 사라졌거나 어설프게 복원돼 있어 눈길을 끌지 못한다.

 

 

▲ 천불동 북단에는 부조석탑림이 펼쳐져 있다.

 


이곳 석굴에 천불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부조석탑림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석탑들은 내부에 감실이 조성돼 있는데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것부터 등불 하나 켤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감실까지 다양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석탑 감실은 텅 비어있지만 예전에는 이곳에 불상을 모셨거나 등불을 공양하지 않았을까. 산자락을 빙 둘러가며 탑을 조성하고, 부처님을 모시고, 등불을 켰으니 그 수가 비록 천개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천불동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일행이 천불동을 다 둘러 볼 때까지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그저 한가한 관광객으로 보였는지, 아니면 원래 방문객에게는 관심이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절에서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내심 서운했다. 하지만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려는 순간 가이드가 봉투 하나를 들고 차에 오른다. 답사팀이 점심도 거르고 베이마티스로 향한다는 말을 들은 천불동 스님이 요기라도 하라며 싸준 빵이란다. 별다른 양념이나 속도 없이 둥그렇게 반죽한 밀가루를 화덕에 구어 낸 못생기고 딱딱한 빵이다. 지금 막 화덕에서 꺼냈는지 거뭇거뭇 검댕이가 묻어있지만 아직 남아있는 따듯한 온기가 스님의 소박한 마음처럼 전해진다. 딱딱한 밀가루빵을 한 입 베어 무니 질박한 고소함이 입안 가득하다. 그 밀가루빵 한 조각에 다시 힘을 얻어 베이마티스로 향한다.


길은 점점 더 깊은 산골짜기로 이어지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펼쳐져 있는 초지는 마치 유럽영화의 한 장면 같다.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서 봤음직한 초록의 언덕, 그리고 그 위를 무리 지어다니는 양들. 그렇게 한껏 풍경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산길을 5km 가량 달려 베이마티스 입구에 도착했다.


베이마티스는 앞서 지나온 천불동과 마찬가지로 절벽에 조성된 석굴사원이다. 하지만 천불동이 바위산을 선택했다면 베이마티스는 바위절벽에 자리하고 있다. 산 꼭대기에 성벽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 절벽. 그 절벽을 파고 들어가 조성한 5층의 석굴 외부에는 지상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단이나 테라스가 전혀 없다. 천불동의 약사전을 올려다보며 느꼈던 막막함, 도대체 어떻게 저 석굴 위로 올라갔는지 궁금증이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의문은 아주 간단히 풀렸다. 절벽에 계단을 놓는 대신 절벽 안을 뚫고 올라간 것이다. 마치 개미들이 땅을 파고 내려가 방을 만들 듯. 바위 절벽 중간에 덩그러니 매달려있는 석굴들은 모두 바위 속에 뚫려 있는 좁은 굴로 연결돼 있었다.

 

 

▲ 베이마티스석굴에서 내려다 본 치롄산맥 전경. 

 


그 석굴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 그토록 궁금했던 그 의문의 입구에는 ‘삼십삼천석굴’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지상에서 천상, 도리천으로 오르는 입구라는 뜻인가. 아니면 이곳이 작은 수미산이란 의미일까. 어느 쪽이든 지상에서 천상으로 오르기가 어찌 쉬우랴.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그야 말로 개미굴같이 어둡고 좁은 굴을 따라 가파르게 만들어진 돌계단을 두 손, 두 발로 엉금엉금 기듯 타고 오른다. 그렇게 쉬지 않고 오르자 돌계단 끝이 곧바로 법당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바라보고 계신 석굴 밖 난간 너머로 치롄산맥의 중턱이 너른 마당처럼 펼쳐진다. 해발 5500미터를 넘나드는 치롄산맥의 머리는 흰 눈으로 덮여있지만 해발 2500m 즈음에 위치하고 있는 베이마티스 아래로는 너른 초원들이 굽이치는 물결처럼 산등성이를 맞대고 있다. 참으로 절경이다. 이 석굴을 개착한 이들의 노고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단함이었겠지만 이 절경을 품기 위해서였다면 기꺼이 땀 흘릴 만하지 않은가.


치롄산맥의 ‘치롄’은 흉노어로 ‘하늘’이라는 뜻이다. 난간에 기대에 잠시 숨을 고르며 치롄산맥을 올려다보니 그 뜻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삼십삼천석굴’이라는 입구의 현판도 그저 허언이나 과장이 아니다. 삼십삼천의 풍경이 이와 같지 않을까. 바쁜 일정에 지친 눈을 잠시 푸른 초원에 놓아준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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