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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진성여왕의 실정

기자명 법보신문

측근에 국정 맡기고 문란하게 살다 나라 망치다

선덕·진덕여왕에 이어
천년 신라 마지막 여왕

 

향가집 ‘삼대목’ 편찬
왕위계승 정당성 홍보

 

 

▲신라 마지막 여왕이었던 진성여왕은 숙부인 각간 위홍과 사랑을 했다. 각간 위홍이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에 원당을 세웠다. 아마도 지금의 해인사 원당암이 각간 위홍의 원당일 가능성이 높다.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나라는 망했으나 원당암만은 1200년 세월을 넘어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은 원당암 전경.

 

 

선덕여왕을 이어 또 한사람의 여왕이 등장했는데, 곧 진덕여왕이다. 여왕은 진평왕의 동복아우 국반(國飯)의 딸로 이름은 승만(勝曼)이었다 ‘승만경’으로부터 유래한 이름이다. 진흥왕 37년(576)에 안홍(安弘)법사에 의해 ‘승만경’이 신라에 전래되었고, 원효와 도륜 등이 이 경에 대한 주석서를 남기기도 했다.


아유사국의 왕비 승만부인은 친정 부모인 사위국왕 파세나디와 말리카부인으로부터 불법에의 귀의를 권유하는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불법에 귀의하고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성불하리라는 약속을 받는다. 이 경은 이렇게 시작된다. 경전의 내용은 승만부인이 스스로 깨달은 바를 부처님 전에서 토로하고, 부처님은 그것을 인가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으로 펼쳐지는 다른 경에 비해 이 경은 재가 여인의 입을 통해 진리가 설해지고 있는 점이 한 특징이기도 하다. 승만부인은 부처님 앞에서 먼저 열 가지의 서원을 말하고, 다시 세 가지의 크나큰 원을 발하면서 어김없이 지킬 것을 맹세한다. 아유사성으로 돌아온 승만부인이 남편 우칭왕과 함께 일곱 살 이상의 남녀에게 대승법으로 교화하여 온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대승으로 향하게 했다. 이렇게 경은 끝난다.
‘승만경’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재가(在家) 중심의 수행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마경’에서도 재가불교가 재창되고 있다. 한 거사의 입을 통해서 설해진 경이 ‘유마경’이라면, ‘승만경’은 한 재가 여인의 입을 통해서 설해진 것이다. 승만부인은 몸과 생명과 재산을 던져 바른 진리를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재산은 물론 몸과 목숨까지도 다 버려 진리를 지키겠다는 승만부인의 염원은 경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되풀이 강조되고 있다. 부처님과 승만부인의 마지막 대화가, 올바른 진리는 수호하고 나쁜 법에 빠진 사람들은 항복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진덕여왕은 당 태종에게 태평송을 보내는 등 어려운 시대를 잘 헤쳐갔다. 그리고 왕위는 김춘추에게로 넘어갔다.
세월이 흘러 신라에는 또 한 사람의 여왕이 등장한다. 곧 진성여왕으로 경문왕의 딸이다. 신라 제48대 경문왕(861~875)은 화랑 출신으로 왕위에 올라 15년간 재위했다. 경문왕은 860년 9월에 헌안왕의 장녀와 결혼하여 왕자 정(晸)과 황(晃), 그리고 공주 만(曼)을 낳았는데, 이들은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여 49대 헌강왕(875~886), 50대 정강왕(886~887), 51대 진성왕(887~897)이 되었다. 헌강왕은 12년간 재위했지만 정강왕은 1년 만에 죽었고, 이에 여왕이 등장했으니, 곧 진성왕이다.


이처럼 경문왕의 삼남매가 차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그 배경으로 경문왕의 친동생 위홍(魏弘)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경문왕 때부터 상재상(上宰相) 병부령(兵部令)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보좌했고, 헌강왕이 즉위하자 다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는 마음대로 국정을 처리했던 인물이다.


그래도 20대 초반의 여왕 즉위는, 그것도 경문왕의 두 아들과 딸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헌강왕과 정강왕, 그리고 진성왕으로 이어진 삼대(三代)의 즉위를 정당화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 진성여왕은 즉위 2년에 위홍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모아서 편찬하게 하였는데, 그 책을 ‘삼대목’이라 했던 것이다. 즉위 초에는 여러 복잡한 문제도 많았을 것임에도 굳이 위홍이 중심이 되어 ‘삼대목’을 편찬하고자 했던 것은 여왕 즉위의 정당성을 홍보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대목’의 편찬은 왕실의 안정과 신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한편 진성여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추진된 것으로 보는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대구화상은 향가에 밝은 고승이었는데, 그는 경문왕 때에도 국선(國仙) 예흔랑, 요원랑, 예헌랑, 계원랑, 숙종랑 등이 보내온 세 편의 가사에 곡을 붙여 현금포곡, 대도곡, 문군곡의 세 수를 지은 대거(大炬)화상과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노래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래서 향가를 통해 여론을 움직여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론은 이미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은 평소에 각간 위홍과 더불어 정을 통해 왔는데, 즉위 2년부터는 늘 궁궐에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에는 위홍대각간이 여왕의 남편이라고 했다. 위홍은 진성여왕의 숙부였다. 그리고 종실의 대신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었다.


조정으로 가는 길거리에는 비난의 글이 나붙었다. 다라니(陀羅尼)에 비난의 언어(隱語)를 교묘하게 숨겨놓은 것으로 이런 내용이었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 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숙부와 애틋하게 사랑
원당암 지어 명복 빌어

 

반란 일어나 삼국 분열
동생 양위…30대 요절


찰리나제는 여왕을 말한 것이고, 판니판니 소판니는 두 소판(蘇判)을 말한 것인데, 소판은 관작의 이름이고,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총신을 말한 것이며, 부이(鳧伊)는 부호(鳧好)를 말한 것이라고 한다.

왕은 사람을 시켜서 찾아보았지만, 잡지 못했다. 어떤 이가 왕에게 알렸다.


“이것은 반드시 문인으로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한 짓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는 대야주(大耶州)에서 벼슬을 하지 못하고 묻혀 사는 왕거인(王巨仁)이 아닌가 합니다.”


왕거인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주려고 했다. 분하고 원통한 왕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연단(燕丹)의 피맺힌 울음에 무지개가 해를 뚫고
추연(鄒衍)의 슬픔을 품자 여름에 서리 내렸다.
이제 내 불우함이 그들과 같은데
황천(皇天)은 어이하여 상서를 내리지 않는가.”


그날 저녁에 별안간 구름과 안개가 끼고 벼락이 치며 천둥이 일어나고 우박이 내리므로 왕은 두려워하여 거인을 출옥시켜 돌려보냈다.


진성여왕 2년(888)에 각간 위홍이 죽었다. 왕은 그를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追封)했다. 이 시호는 실제로 사용되었는데, 진성여왕 7년(893)에 조성된 심원사수철화상탑비와 진성여왕의 명을 받아 최치원이 찬한 성주사낭혜화상탑비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진성여왕 4년(890)부터 해인사를 혜성대왕원당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종래에 북궁해인수(北宮海印藪)를 혜성대왕원당이라고 고쳐 불렀던 것은 진성여왕이 혜성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에 원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해인사의 산내 암자 중에 원당암(願堂庵)이 있는데, 이는 진성여왕이 위홍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암자일 것이다. 위홍의 명복을 빌 새롭고도 독립된 건물이 필요했을 것인데, 원당암은 이 때 신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도 원당암에는 창건 당시의 신라 석조유물이 전해온다. 보광전의 축대, 그 앞의 다층청석탑(多層靑石塔)과 석등, 그리고 배례석(拜禮石) 등이 그것이다. 미술사 전공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 석조물은 모두 신라 왕실의 배려로 조성되고, 청석탑과 석등과 배례석, 그리고 보광전의 축대의 조형 양식 등은 원당으로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진성여왕이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유모(乳母)인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魏弘) 등 3~4명의 총신(寵臣)이 권력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휘둘렀다. 위홍이 죽은 후에는 몰래 젊은 미남자 두세 명을 끌어들여 음탕하고 난잡하게 굴고는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사랑을 받는 자들이 뜻을 펴게 되어 뇌물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벌은 공평하지 못해 기강이 허물어졌다.


정치가 문란해지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여러 고을에서는 공물을 바치지 않아 국가 재정은 어려워졌다. 여왕 3년 원종과 애노 등은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5년 양길은 부하 궁예를 보내어 신라 군현을 공격했다. 6년 후백제 견훤은 완산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무진주를 쳐서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다. 8년 궁예는 명주로 옮겨 스스로 장군이라고 했으며, 이듬해에는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다. 10년 서울 서남부에서는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무리가 나타나 적고적(赤袴賊)이라고 하면서 경주 모량리에까지 출몰해서 민가의 재물을 빼앗았다. 이렇게 신라 사회는 혼란했고, 다시 후삼국으로 분열했다.

 

▲김상현 교수

당시 신라는 “사람 죽이기를 삼 베듯 하여 던져진 백골이 숲처럼 쌓이던”, “군읍(郡邑)이 모두 적의 굴이 되고 산천이 모두 전장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이처럼 모든 환란이 한꺼번에 밀어닥쳐 병든 나라를 더 이상 다스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왕은 양위를 결심했던 것이다. 진성여왕은 만류하는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스스로 왕위를 조카에게 양위(讓位)했다. 재위 10년 만에. 그리고 사제(私第)인 북궁(北宮)으로 돌아갔다. 몸에 병이 많았던 그가 양위한지 6개월 만에 죽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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