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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여 부소산 고란사

기자명 법보신문
  • 집중취재
  • 입력 2012.11.07 16:16
  • 수정 2012.11.12 17:39
  • 댓글 0

찬란했던 불국토 사라짐 아쉬워 고란사 종소리 백제를 부르네

정확한 창건연대 기록 없지만
고려 때 중창되며 전설 더해져


‘고란초 자라는 절’ 소박한 이름
일본 사서에도 거론되는 수행처


‘부여 사람들’ 정성스런 보살핌은
사라진 백제 보듬는 추억의 손길

 

 

▲부여 부소산 고란사가 가을 빛에 묻혔다. 절벽 아래 숨어 있는 작은 도량엔 백제의 마지막, 낙화암의 전설이 서려있다. 그 아픔을 삭히려는 듯 작은 도량은 눈 앞에 굽어 흐르는 백마강을 품에 안고 있다.

 


비 내리는 가을, 부소산에 올랐다. 산 전체가 단풍에 불타고 있었다. 가을비는 가만가만 내렸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 백제, 그리고 가장 슬픈 땅 부여에도 계절은 피었다 스러진다. 왜 백제를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시려올까. 1350여 년 전의 일인데도 이렇듯 생생할까. 저 붉은 나뭇잎은 백제에서 온 것일까. 백제인들의 한은 어디쯤에 묻혀있을까. 낙엽을 밟으며 고란사(주지 탄공 스님)로 향했다. 그것은 또 낙화암을 찾아가는 길이다.


백제는 낙화암에서 끝이 났다. 왕국의 멸망에는 여러 사연이 있겠지만 낙화암이 최후였다. 슬픔 중의 슬픔이며, 아픔 중의 아픔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이렇게 적었다.


“백제 고기(古記)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강물에 임해 있다. 전설에는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말자’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속담에 타사암(墮巳岩)이라고 한다고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녀만 떨어져 죽고 의자왕은 당나라에 가서 죽었으니, 당사(唐史)에 분명한 글이 있다.”


일연은 이렇게 담담하게 서술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백제의 마지막을 그려보며 상상을 보탰다. 그리고 궁녀들이 떨어져 죽은 바위를 찾아내 낙화암이라 명명했다.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떨어지는 궁녀들을 누가 지는 꽃에 비유했는가. 참으로 처연하다. 그 때 궁녀들은 떨어짐으로 다시 살아났다. 꽃이 진 후 다시 피듯이. 그리고 누군가 떨어진 궁녀들이 삼천 명이었다고 했다. 따져볼수록 황당한 얘기지만 이제 사실과는 상관없이 ‘삼천 궁녀’는 고유명사가 되어가고 있다.


낙화암은 눈물이다. 그 눈물은 절벽아래 숨어있는 고란사에 고여 있다. 오늘도 낙화암에서 떨어진 궁녀들을 기리고 있다. 고란사는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 일본 사서에 ‘518년 소녀 셋이서 비구니가 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와 백제 고란사에서 정진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삼국시대 창건했다면 아마 백제와 당나라의 치열한 백마강 전투에서 소실되었을 것이다.


고란사라는 이름은 절 뒤편 암벽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되었다. 고란사에서 자랐기에 고란초가 아니라, 고란초가 자라기에 고란사란다. 다소 실망스럽지만 원래 고란초가 주인이었으니 고란사라 해야 맞을 것이다. 지금은 그 많던 고란초가 사라져 몇 포기만 붙어있다. 원래 주인을 내쫓은 격이다. 그것마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불길한 생각을 지우고 쳐다봐도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또 고란사 뒷편에는 약수가 고여 있는 고란정이 있다. 그 물을 마시면 늙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옛날 사비성의 왕들이 마셨단다. 고란사에서 나오는 약수임을 확인하기 위해 약숫물에 고란초를 띄워오도록 했단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너나없이 그 물을 마신다.


고란사는 1028년(고려 현종 19) 다시 지었다. 낙화암에서 떨어진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함이라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낙화암은 백제 멸망의 상징이었으니, 새 시대 새 권력은 백제지역을 끌어안아야 했을 것이다. 낙화암의 한을 풀어내야 했으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낙화암의 슬픔을 고란사로 끌어들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강에 던진, 또 강에서 건져 올린 사연을 품을 곳은 고란사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란사에서 보이는 백마강에 안개가 자욱하다. 그래서 더 많은 사연이 서려있는 듯 하다.

 


낙화암과 고란사가 들어있는 대중음악 ‘꿈꾸는 백마강’은 절창이다. 노랫말이 가슴을 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듯/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니


고란사가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중창한 것이 확실치 않다지만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고란사에 ‘낙화암 궁녀’들이 드나들고 있음이 중요하다. 고란사 벽화에는 궁녀가 빠져 죽었던 ‘그날 그 순간’이 그려져 있다. 어쩌면 전설도, 설화도 만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백제 120여년은 실로 눈부셨다. 항해술이 발달하고 상술이 뛰어난 백제인들은 통상으로 부를 축적했다. 백마강변 구룡평야에 80만 명이 거주하는 국제도시 사비를 건설했다. 문화도시 사비에는 고구려, 신라인은 물론 중국인, 왜인, 아라비아인들이 북적거렸다. 맑고 깊은 강물은 유유히 서쪽으로 흘러갔다. 수없이 박혀있는, 크고 작은 사찰에서 만종이 울리면 그 소리가 백마강물에 빠졌다. 어찌 보면 불국토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마강은 백성들의 원성도 품고 흘렀다.


부여 백제는 성내에 제석사, 성 밖 백마강 건너에 왕흥사, 멀리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다. 거의 100년 동안에 엄청난 규모의 불사를 했다. 폐사지를 조사하면 그 규모가 놀라울 뿐이다. 백제가 아무리 강성해도 이렇듯 불사에 모든 재화를 쏟아붓고서는 온존할 수 없었다. 왕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위해 부처님께 빌었다. 그러나 중생(백성)이 부처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들이 화려한 가람을 지을수록 부처와는 멀어져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백제가 망할 조짐들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중에는 의미심장한 것들이 있다.


-수많은 여우가 의자왕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그중 흰 여우가 좌평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서울 우물물과 사자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까닭없이 무엇엔가 쫓기어 놀란 것처럼 달아나다가 무더기로 넘어져 죽은 자가 100여명이었다.
-용과 같이 검은 구름이 동·서에서 떠올라 공중에서 서로 싸우더라.


위에 열거한 것들은 실제 일어났다기보다는 당시 상황을 빗대었을 것이다. 여우들은 간신들을 뜻하고, 흰여우가 좌평의 책상위에 앉아 있음은 왕의 눈과 귀를 독차지한 요사스러운 인물이 있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우물과 강물이 핏빛으로 물들었음은 나라를 지탱해나갈 어진 신하와 지혜로운 장수들, 그리고 무고한 백성들이 처형당하고 있음을 나타냈을 것이다. 또 사람들이 무엇엔가 쫓겨 달아남은 민심이 어지럽다는 것이고, 검은 구름이 공중에서 다툼은 권력투쟁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는 높은 곳에 있었다. 백성들 사이로 내려오지 않았다. 불교의 공덕은 중생을 구제하는데 있거늘 불(佛)로써 민을 착취했다. 그러니 부처가 어찌 이들을 돌볼 것인가. 왕흥사의 최후를 보라. 왕흥사는 착공 35년 만에 준공한 백제국 제일의 대사찰이었다. 대백제국 재력으로도 35년이 걸렸으니 얼마나 호장하고 웅대할 것인가. 삼국사기는 “절은 강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화려했다.”고 기술했다. 왕은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했다. 하지만 왕들을 위한 왕흥사는 26년 만에 불타버렸다. 백제가 멸망한 그해 신라군이 절에 들어가 서있는 모든 것을 짓밟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였다. 백제의 부처는 신라의 부처가 되지 못했다.


백제의 거대한 가람은 그 터만 남아있다. 그런데 요즘 정림사를 비롯하여 거대 가람을 다시 짓겠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도대체 당시의 무엇을 계승하려는지 알 수 없다. 다시 지은들 옛 영화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어설픈 복원과 부풀린 자랑은 폐사지의 쓸쓸함만 못할 것이다.


고란사는 작지만 크다. 백제의 역사를, 백마강을 품고 있다. 그래서 고란사의 경내는 좁지만 넓다. 많은 이들이 고란사를 지켰다. 그것은 백제를 지키는 일이었다. 윤렴희 보살(86세)도 58년 동안 고란사를 지켰다. 28세에 남편과 함께 찾아온 고란사, 일생을 그 속에서 살았다. 새벽에 일어나 부소산에 올랐다. 당시 고란사는 초라했다. 비가 오면 경내에 흙더미가 수북했다. 그래도 고란사가 날마다 보고 싶었다. “몇 천만년 살아도 만나기 어려운 불법인데 날마다 대하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도량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부처님을 뵙고, 멀리 백마강을 바라보면 온통 세상이 평화로웠다. 기쁨 그 자체였다. 특히 늦가을 백마강은 잊을 수가 없다. 물 위에서 청둥오리가 숨바꼭질을 했다.


대중음악의 ‘꿈꾸는 백마강’은 서럽지만 윤 보살의 새벽 고란사는 아름답고 희망에 차있다. 윤보살의 수첩에는 ‘고란사에서’라는 시가 적혀 있다.


백마강을 바라보니/ 맑은 강물을 시샘하듯이/ 쌍쌍이 오리가/ 요리조리 자태를 뽐내며/ 수를 놓아요./ 종소리 울리면 날았다가 다시 앉는 모습이/ 너무 예뻐요


윤 보살은 또 석양이 드리운 백마강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옛날 사비성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윤 보살은 자신은 부여 사람이고 고란사는 부여 사찰이라고 말했다. 백제 여인이었다.

 

 

▲고란사로 부임한지 한 달 남짓 된 주지 탄공 스님과 윤렴희 보살은 아직 낯선 사이지만 고란사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칭찬만큼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주지 탄공 스님은 부임한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스님은 다른 것 모르겠지만 기도 하나는 잘 된다고 말했다.
새벽 고란사 종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모두를 깨우고, 모든 것을 씻기는 고란사의 새벽 종소리는 흐르는 강물도 멈추게 한다. 그런 다음 부소산 위에 올라 해를 맞이하고, 노을 덮인 백제탑을 바라보면 비로소 백제가 보일 것이다.


고란사는 절벽아래 다소곳이 앉아있다. 그 앞에 펼쳐진 백마강까지 경내이니, 오늘도 고란사는 강 위를 떠다니며 이야기를 건지고 있다. 슬픔을 삭히고, 아픔을 익히는 가을 고란사.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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