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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단종비 정순왕후

세조 탄압에 남편 죽고 친정 몰락…불교 귀의해 슬픔 극복

조선 최초 간택으로 왕비돼
15세때 연하인 단종과 혼인


숙부 왕권 야망에 노심초사
결혼 1년반 만에 왕위 이양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여인의 울음소리가 언덕을 휘감고 내려와 마을을 덮었다. 그 슬픔은 깊고도 묵직했다. 일을 하던 마을 사람들도 함께 통곡했다.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은 여인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했던 민초들의 애틋한 마음이었다. 여인이 매일 올라 눈물짓는 언덕배기는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렸다. 떠나간 남편이 머문 곳이 동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그녀의 기구한 삶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서럽고 아픈 사연으로 점철돼 있다. 남편 단종은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왕위를 숙부에게 넘겼으나 결국 죽임을 당했다. 왕후였던 그녀도 폐비되어 노산군 부인으로 전락했고 남편의 죽음 후에는 서인의 신분으로 궁궐에서 쫓겨났다. 한 나라의 국모였던 그녀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채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때 나이가 불과 18세였다.


과부가 된 정순왕후는 빈털터리 신분으로 궁궐을 나와 동대문 밖 공터에 움막을 짓고 정업원이라 이름 붙인 뒤 스님이 되어 여생을 살았다. 그녀는 한 평생 동망봉에 올라 남편이 있던 영월을 향해 눈물지었다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가 남편 단종과 처음 만난 것은 1454년 1월 왕비 간택을 통해서다.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는 수양대군의 친구로, 직위가 높거나 이렇다 할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왕비의 집안으로 적격이었다.


당시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삼년상을 우선 치르고자 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의 재촉에 못 이겨 간택을 결정했다고 한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이후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궁궐 내에서 왕인 단종보다 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왕위를 염두에 두고 있던 수양대군으로서는 하루빨리 단종을 결혼시켜 상왕의 구색이라도 맞추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정순왕후는 조선 최초 간택으로 왕비가 됐다. 간택은 일종의 경쟁이므로, 정순왕후의 행실이나 성품, 미모가 누구보다 뛰어났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정순왕후는 첫 간택 후 20일 만에 단종과 결혼했다. 후대의 예를 봐도 대단히 빠른 속도다.


당시 그녀의 나이 15세, 단종은 14세였다. 어린 부부는 얼굴도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맺어졌지만 마치 운명처럼 잘 맞았다. 때론 친구처럼 또 남매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왕권을 향한 외부적 압박이 둘 사이를 더욱 공고하게 맺는 요인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부부는 궁궐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약이 많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숙부인 수양대군의 야망에 늘 노심초사했다.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며 어린 부부를 감시하고 간섭하려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정도로 압박을 가하고 두려움을 줬다.


단종은 점점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어갔다. 왕으로서 당당함도 이미 잃은 지 오래다. 온갖 스트레스로 몸은 나날이 야위어만 갔다. 그런 남편을 보는 정순왕후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정순왕후는 수양대군에 대해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언젠가는 모두가 숙부의 손에 죽고말리라. 왕위를 찬탈하려는 숙부의 탐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기 어려웠다.


정순왕후는 단종을 설득했다.


“어짜피 숙부의 목적이 왕이 되는 것이라면 굳이 왕위를 붙잡고 이렇게 고통 받지 않아도 됩니다. 숙부에게 양위하고 조용히 살아갑시다.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주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진 않겠지요.”


단종은 고민했다. 아버지 문종으로부터 이어받은 왕의 자리가 자신의 나약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왕의 적통성을 강조하는 중신들의 얼굴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권력욕이 강한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 왕실에 피바람이 불지나 않을까 우려됐다. 혹여나 왕권강화에만 뜻을 두고 신하들의 고견을 듣지 않은 채 멋대로 국정을 운영한다면 그로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단종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암암리에 단종을 옭죄어 온 수양대군의 양위요구도 더 이상 거부하기 힘들만큼 노골적으로 변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단종은 정순왕후에게 못내 미안했다. 기껏 간택하여 왕후로 삼았는데 1년6개월만에 아직 어린나이로 대비가 되어 뒷방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괜찮습니다. 권력에서 물러나 평안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도 큰 복입니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양위를 결정했다. 1455년 7월, 왕이 된지 불과 3년만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됐으며 정순왕후는 살얼음 같았던 왕비자리를 놓고 의덕왕대비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이로써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숙부도 어리고 나약한 부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었다.


단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2년 뒤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돼 노산군으로 강등됐다. 단종복위운동은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신하들이 명나라 사신을 초대한 연회자리에서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계획하다 실패한 사건이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연루자 70여명이 모조리 처형당했으며, 상왕 단종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여 직위를 박탈한 채 영월로 귀양보냈다.

 

단종복위사건 연루돼 고난
남편·아버지 죽고 폐서인


궁궐서 쫓겨나 움막서 출가
남편 떠난 동쪽 향해 통곡


이때 단종비 정순왕후도 노산군 부인으로 강등돼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 송현수가 사형당하고 친정의 남자들이 모조리 죽었다. 남은 가족들은 관노비가 되어 몰락하다시피 했다.


정순왕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권력투쟁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고 싶었던 바람이 오히려 피바람을 몰고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족을 잃고 피맺힌 가슴으로 귀양 가는 남편을 배웅해야 했다.


결혼한 지 4년도 채 되지 않았건만, 어린부부에게는 냉혹한 이별의 시련이 닥쳤다. 다시 살아서 만날 수 있을지조차 기약할 수 없었다. 아무런 힘이 없었던 두 사람은 그저 신세를 한탄하며 서럽게 눈물지을 수밖에 없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이별의 인사를 나눴던 다리는 지금까지도 ‘영도교(永渡橋)’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아픈 사연을 전하고 있다. ‘님이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뜻에 맞게 정순왕후는 영도교를 건너가는 남편을 떠나보낸 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영월로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후회와 한탄으로 스스로 목을 맸다고도 하고 세조가 내려 보낸 사약을 마셨다고도, 형을 받아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세조실록’에는 왕명을 받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단종을 찾아갔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엎드려 울던 중, 단종을 모시던 하인이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고 기록돼 있다. 한 나라의 왕으로 유례없을 비참하고도 가슴 미어지는 죽음인 셈이다.


단종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순왕후는 몇날며칠을 통곡했다. 그리고 한 평생을 동망봉에 올라 눈물지으며 단종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은 뒤에도 60여년을 더 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피바람을 헤치고 홀로 살아남은 그녀에게 여생은 몹시도 고되고 서러운 세월이었다. 그러나 슬픔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오히려 슬픔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 혹독한 현실이 그녀를 찾아들었다. 한 순간도 걱정해 보지 않는 생계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정순왕후는 왕실을 도움을 일체 거부한 채 세 명의 시녀와 함께 정업원이라 이름 지은 움막에서 풀뿌리를 먹으며 연명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일컬어 정업원 주지 노산군 부인이라 불렀다는 점은 그녀가 출가해 불제자의 길을 걸었음을 반증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먼저 떠난 남편과 가족들의 명복을 빌고 세상을 향한 원망과 설움을 추스르며 부처님에 의지해 삶을 이어갔을 터다.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정업원터가 지금까지 남아 전해온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의 정업원구기가 바로 그곳이다. 청룡사는 이곳에 단종비의 사당을 모시고 매년 다례재를 봉행하며 그녀의 넋을 기리고 있다.


단종이 죽은 후 궁궐은 새로운 왕을 받아들였지만 민초들은 과거의 왕을 잊지 않았다. 그들에게 단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뺏기고 죽임을 당한 더없이 불쌍하고 측은한 왕이었다.

옛사람들의 구술을 기록한 ‘한경지략’에 따르면 당시 동대문 밖에 살던 여인들이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각종 채소를 가지고 정업원 앞에 줄을 섰다고 한다. 궁에서 이를 금지해도 도움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아낙들은 오히려 금남의 장소인 ‘여인시장’을 만들어, 채소를 파는 척 모여들어 정순왕후에게 가져다 줬다고 전해진다. 숭신초등학교 앞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여인시장터’ 표식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순왕후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궁궐의 도움을 일체 거절한 채 고고한 품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민초들에게 그녀는 여전히 국모였다. 그녀를 향한 백성들의 존경심과 측은지심은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만신창이가 된 그녀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의지처가 됐을 것이다.


정순왕후도 민초들의 도움에 기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염색을 하며 생업에 뛰어들었다. 정업원구기 인근 바위에 새겨진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이 이를 방증한다. 동천이라는 샘에서 자라는 ‘지초’라는 풀로 염색을 하면 보라색으로 물드는데, 정순왕후와 시녀는 이를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욕망하는 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궁궐을 떠났던 열여덟살의 정순왕후. 그녀는 이후 60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82세로 세연을 접었다. 어쩌면 그녀는 긴 세월 과거의 상처에 얽매인 채 한 많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의 소용돌이를 지나 불법에 귀의함으로써 궁궐에서는 단 한순간도 느껴보지 못했을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비로소 찾았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부처님께 의지해 본인의 고통을 돌아보다, 어느 순간에는 생과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중생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으며 진정한 의미의 국모로 거듭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보면 후대 사람들이 숱한 왕실여성 가운데 유독 그녀를 기억하고 기리는 것도 기구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민초들과 교감하며 당당하게 삶을 일궈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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