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우웨이(武威) 톈티산(天梯山)석굴
13. 우웨이(武威) 톈티산(天梯山)석굴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2.11.1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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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에 밀려 호수에 갇혀버린 양주 불교예술의 최고봉

북량 왕 저거몽손이 개착
윈강·용문 석굴의 모델 돼


‘대약진’운동 때 저수지 조성
28m 좌불의 허리까지 침수
34년 후 댐 만들어 물뺐지만
사라진 채색은 찾을 길 없어

 

 

▲‘중국 석굴의 코’로 불리는 톈티산석굴. 높이 28m에 달하는 이 석가모니좌불은 톈티산석굴 앞에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허리까지 물에 잠기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지금은 저수지의 물을 막기 위한 댐이 설치돼 그 안에 갇혀버린 형상이다.

 

 

한 무제가 설치한 하서사군(河西四郡)의 하나였던 양주(凉州)는 지금의 우웨이(武威)다. 하지만 우웨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양주라는 옛 지명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역사 속에서도 양주라는 단어가 더 자주 등장한다. 오호십육국시기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했던 전량, 후량, 남량, 북량이 차례로 이곳 양주를 중심도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북량(397~439)을 세운 저거몽손(沮渠蒙遜. 368~433)은 우웨이를 장악한 후 하서회랑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북량은 건국 후 줄곧 불교를 숭상했다. 많은 석굴이 조성되었고 서역의 고승들이 모여들어 양주는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앞서 지나온 마티산(馬蹄山)석굴군도 북량시기 개착이 시작됐고 일행의 다음 목적지인 텐티산(天梯山)석굴 역시 같은 시기 조성된 석굴이다. 북량, 특히 저거몽손의 석굴과 불상 조성에 관해서는 여러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당나라 때 도선(道善. 596~667) 스님이 쓴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주의 석굴 조각상은 옛날 저거몽손이 진 안제 융안 원년에 양주지역에서 황제로 등극한 뒤 20여 년이 지난 이후 조성했다. 농서지역(간쑤성 동부지역) 오량(전량, 후량, 남량, 서량, 북량) 중에서 가장 강성하였고 불교를 숭배하였다. 북량국에는 사원과 탑이 아주 많았으며 궁궐에서는 불상을 예배하느라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금을 이용하면 훼손되기 때문에 산에 예배 대상을 세우기로 했다. 양주 남쪽 백리 거리에 암벽면이 동서로 쭉 연결된 것이 끝이 없었다. 이에 이곳에 석굴을 파고 존상을 안치하였다. 돌을 깍은 것도 있고 흙을 구워 조성한 것도 있는데 그 형상이 다채롭고 걸작이었다. 예배공양하면 마음과 눈에 놀라움과 경외감을 느낀다.”


남북조시대 양나라(502~557) 스님 혜교(慧皎. 497~554)의 저술 ‘고승전’, 당나라 고종(628∼683) 때 도세(道世) 스님이 쓴 ‘법원주림’ 등에서도 “저거몽손이 어머니를 위해 장육석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이 같이 여러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주석굴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이곳 톈티산석굴을 지목하고 있다. 무위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50km니 옛 기록과도 일치한다. 산세가 울퉁불퉁하고 산봉우리가 첩첩이 겹쳐져 있는 모습이 마치 사다리 같이 보여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의 톈티산(天梯山)으로 불린다.


톈티산석굴은 커다란 호수에 맞닿아 있다. 그냥 호숫가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석굴 일부가 아예 물에 잠겨있다. 이 호수는 사실 인공 저수지다. 즉 처음부터 물에 잠기도록 조성된 것이 아니라 인공 저수지가 생기며 석굴이 물에 잠기게 된 것이다. 조금은 황당한 풍경. 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입구에 있는 전시관에 들러 톈티산석굴의 역사를 우선 살펴본다.


북량시기 조성이 시작된 텐티산석굴은 북위, 수, 당, 서하시기에 걸쳐 확장됐고 명, 청대에 이르러서는 라마교사원으로 사용됐다. 그 사이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일부 훼손되긴 했지만 가장 큰 위기는 근대에 이르러 닥쳤다. 1958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주도하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목표로 추진된 ‘대약진’ 시기, 이곳 톈티산에는 대규모 저수지가 건설됐다. 톈티산석굴 침수는 예상된 결과였지만 공사는 강행됐다. 저수지공사에 앞서 간쑤문물관리회에서는 석굴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결국 몇몇 중요한 석굴은 헐어서 아예 딴 곳으로 옮겨졌고 벽화와 소조상 일부는 박물관으로 이동 보관이 결정됐다. 그러나 벽화와 소조상을 석굴에서 떼어내는 과정 중에, 그리고 박물관으로 옮기는 도중 상당수가 훼손되거나 파괴됐다. 심지어는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했다. 명백한 인재이자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문화재 파괴·절취 행위가 아닐 수 없다.

 

 

▲1994년 간행된 책에 수록된 좌불의 모습은 처참하다.

 


하지만 ‘대약진’은 멈추지 않았고 저수지 완공과 함께 석굴 일부는 물에 잠겼다. 특히 13호굴의 높이 28m에 이르는 석가모니좌불은 거의 허리까지 물에 잠겼다. 그 상태로 무려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2년 좌불 앞에 반원형의 댐을 건설해 좌불과 저수지를 분리시킨 후 댐 안에 고여있던 물을 모두 퍼냈다. 다시 드러난 좌불의 모습은 처참했다. 흙을 빚어 조성한 좌불의 다리는 수십 년간 물에 휩쓸리고 깎여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뭉그러져 있었다. 특히 물을 빼내고 남은 진흙퇴적물이 좌불의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좌우에 조성돼 있던 문수·보현보살상, 광목·다문천왕상, 그리고 가섭·아난존자상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좌불보다 작게 조성되었던 좌우협시상들은 목까지 물에 잠겨 머리만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특히 보살상에 남아있던 화려한 채색은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후 대대적인 복원이 이뤄져 석가모니부처님의 다리와 발, 좌우협시의 몸체를 되살릴 수 있었지만 색, 사라진 빛깔만은 영영 되찾을 길이 없었다. 1994년 간쑤인민미술출판사가 간행한 ‘간쑤석굴예술’에는 댐을 조성, 물을 빼낸 직후 톈티산석굴의 사진이 실려 있다. 지금의 말쑥한 모습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당시의 처참한 광경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톈티산석굴에는 크고 작은 석굴이 17개 남아있다. 13호굴로 분류되는 이 좌불은 톈티산석굴에서 가장 큰 소조상이다. 동시에 그 제작 연대 또한 당나라 전성기인 700년대 즈음으로 추정되고 있어 예술적, 학술적 가치 또한 높다. 석벽을 깎아 대강의 형상을 조성하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섬세한 표현을 한 후 화려한 채색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이유로 지금 보이는 좌불의 대부분은 최근에 보수된 결과다. 다만 대불을 감싸고 있는 감실벽 일부와 문수·보현보살의 머리 부분에 옛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좌불의 다리와 좌우협시의 몸체는 모두 최근에 보수했다.

 


톈티산석굴을 조성한 저거몽손은 북량불교, 하사회랑 불교에 있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불교를 수용하고 전하는데 적극적이었다. 특히 담무참 스님과 그의 인연이 흥미롭다. 기록에 따르면 인도의 바라문 출신으로 출가한 담무참은 계빈(賓), 쿠처(龜玆), 둔황(敦煌)을 거쳐 421년 양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저거몽손의 극진한 공양을 받으며 ‘대반열반경’ 등 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출삼장기집’에는 ‘병인년에 저거몽손의 아들 흥국은 우바새 등 500여 명과 함께 도성 양주에서 천축법사 담마천을 초청하여 불경을 번역하고 보살계를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의 아들이 직접 법석을 폈으니 왕실 전체가 지극히 공경했음이다.


담무참의 명성이 드높아지자 당시 북위의 황제였던 세조 탁발도(世祖 拓跋燾. 408~452)가 ‘담무참을 보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며 북량을 압박한다. 그러나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보내지 않는다. 이후에도 계속된 북위의 회유와 압박, 저거몽손의 버티기로 양국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그러던 중 담무참이 서역에 가서 ‘열반경’의 뒷부분을 구하겠다고 저거몽손에게 청한다. 떠난다는 뜻이었다. 배신감에 휩싸인 저거몽손은 서역을 향해 출발한 담무참에게 자객을 보내 살해하고야 만다. 433년이다. 같은 해 저거몽손도 세상을 떠나고 6년 후 북량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지나친 집착과 잘못된 믿음이 화를 부른 것만은 분명하다. 북위의 탁발도나 북량의 저거몽손 모두 순수한 신심으로 담무참을 공양했다고는 하지 못할 듯 하다. 그보다는 명성 있는 승려를 자국에 불러 모음으로써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의 주도권을 쥐려했음이다.

 

 

▲석굴로 가는 길이 굳게 닫혀 있다. 예산이 없어 난간과 다리를 보수하지 못해 개방할 수 없다고 한다.

 


톈티산석굴 조성에도 그런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톈티산석굴의 역사를 살펴보니 오늘날의 모습은 차라리 아이러니다.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조성한 석굴이 같은 이유로 강행된 경제개발 정책으로 파괴되고 훼손됐다. 현존하는 17개의 석굴 가운데 개방하는 곳은 13호굴, 즉 외부에서도 보이는 석가모니좌불 뿐이란다. 이유인 즉 나머지 석굴로 가는 길의 난간과 다리가 망가졌는데 예산이 없어서 보수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석굴이 ‘중국 석굴의 코(석굴이 시작된 곳)’라며 자랑하던 관리인의 조금 전 설명이 무색해진다. 톈티산석굴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진타스석굴, 마티산석굴, 고창고성석굴 등이 줄지어 조성됐고 동쪽의 빙링스(炳靈寺)석굴, 윈강석굴, 용문석굴, 맥적산석굴 모두 톈티산석굴을 모델로 삼고 있다. 둔황석굴보다 조성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둔황석굴에는 없는 다채로운 벽화기 발견됐고, 북량시기의 사리탑, 북주시대의 보살상 등 희귀한 유물들도 이 석굴에서 나왔다. 하지만 오늘날 톈티산석굴의 모습은 물에 갇힌 좌불의 모습 그대로다. 왕의 권력이 이 석굴을 탄생시켰다면 오늘날의 초라한 모습은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왕의 산물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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