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란저우(蘭州) 빙링스(炳靈寺)석굴
14. 란저우(蘭州) 빙링스(炳靈寺)석굴
  • 법보신문
  • 승인 2012.11.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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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장안 오가던 실크로드 길목에 소원을 새기다

서역 오가던 상인·스님들
장도의 평안 기원하며
석굴·불감·불상 등 조성


정확한 조성 기록은 없지만
169호굴서 ‘420년’ 명시한
명문 발견돼 연대 추정 가능

 

 

▲빙링스석굴 입구. 유가협댐이 조성된 후 석굴로 가는 길은 이제 뱃길로 변했다. 하지만 이 좁은 협곡을 지나 실크로드를 오가던 옛 상인과 스님들의 소원은 여전히 암벽에 서리서리 쌓여있다.

 


실크로드 답사 중 배를 탈 일이 있을 줄이야. 란저우(蘭州)에서 하룻밤을 묵은 일행은 아침 일찍 서둘러 유가협댐에 도착했다. 이 댐은 황허 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61년 건설됨 댐이다. 높이148m, 길이840m, 저수량이 57억㎥에 이른다. 댐 위에 선착장이 있다. 이곳에서 작은 쾌속선을 타고 1시간 가량 물길을 따라 가면 란저우에서 서쪽으로 60km, 용징현(永靖縣)에서 17km 가량 떨어진 곳에 빙링스(炳靈寺)석굴이 있다.


빙링스석굴은 황하 상류의 북안 협곡에 있는 샤오지스산(小積石山)에 조성됐다. 이곳은 서쪽으로 하서회랑에 접해있고 동쪽으로는 장안으로 연결된다. 실크로드의 길목이었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수많은 상인과 함께 승려들도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불교가 흥성했다. 특히 이 지역은 오호십육국 시기 16국의 하나였던 서진(西秦. 385~431)의 지배하에 있었다. 서진의 개조인 걸복국인(乞伏仁)을 비롯한 걸복씨 왕조는 비록 4명에 그치지만 모두 신심 깊은 불교신자여서 수행과 경전 번역을 적극 후원했다. ‘고승전’에도 “걸복치반(서진의 세 번째 왕)이 이 지역에서 할거할 당시 서쪽으로는 양주지역에 접해 있었다. 외국선사 담무비가 이곳에 와서 무리를 이끌고 선을 가르쳤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서진의 불교가 상당히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실크로드를 오가던 많은 상인과 스님들은 장도의 안녕을 기원하며 석질이 부드러운 사암의 협곡에 석굴을 파고 불보살을 조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빙링스석굴이 언제 개착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169호굴에서 ‘서진건흥원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됐는데 이때가 420년이니 적어도 이때부터 석굴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곳 벽화에서 서진태초13년(400년)에 이곳을 경유해 서역으로 향했던 법현(法願) 스님의 발원명(發願銘)이 발견됐다. 덕분에 석굴의 최초 개착 시기도 4세기 말로 앞당겨지는 분위기다.


역사가 긴 만큼 이름도 많다. 석굴이 처음 개착되기 시작한 북위시기 빙링스는 당술산(唐述山), 또는 임양당산(林楊堂山)으로 불렸다. 당나라 때에는 영암사(靈岩寺)라고도 불렸다. 빙링스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송사(宋史)’에서 처음 등장한다. 즉, 송대에 이미 빙링스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음이다. 그런데 이 ‘빙링’은 티베트어의 음역이다. ‘십만불’이라는 뜻으로 ‘천불동’, ‘만불동’과 같은 의미다.


바뀐 것은 이름만이 아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석굴이 조성된 지 1500여년이 훨씬 넘었으니 강이 산이 되고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었다한들 이상할 것이 없다. 근대까지만 해도 강가의 길을 따라 이 협곡을 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가협댐이 건설된 후 강의 수위가 높아져 오늘날에는 이처럼 배를 이용해야만 빙링스석굴에 접근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이 계곡을 따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굽이굽이 오갔을 길은 깊은 물에 잠겨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풍경도 바뀌고 길도 바뀌었지만 옛 사람의 발원은 아직도 남아있다.


빙링스석굴은 2~3층에 걸쳐 불감(佛龕)과 굴의 형태가 혼재해 있는데 그 수가 무려 196개에 이른다. 그 안에 694개의 조각상, 82개의 소조상이 산재해 있다. 서진 시기에 개착이 시작돼 북주와 수·당 시대에 가장 활발히 조성됐다. 이러한 역사를 보여주듯 여러 시대의 벽화와 조각·소조상이 고르게 발견되지만 당대의 불상이 특히 많이 남아 있다.

 

 

▲계곡을 따라 크고 작은 불감과 불보살상이 노천박물관처럼 줄을 잇는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걸음을 옮기니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암벽 면에 불감과 불보살상, 석굴이 노천박물관처럼 줄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1~2m 이내의 감실을 조성하고 그 안에 불보살상을 모신 형태가 다수 눈에 띤다. 이와 함께 암벽 면에 부조로 조각한 마애불형태의 불보살상도 즐비하다. 그 크기도 30cm 내외의 작은 것에서부터 사람 키만 한 것까지 다양하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비교적 규모가 큰 석굴들이 이어진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것들이다. 내부에 중심주는 없지만 석실 정면과 좌우에 다양한 형태의 불보살상을 조성하고 벽화와 부조로 장엄했다.


불감과 석굴들의 군집이 끝나는가 싶더니 높이 27m의 대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때마침 전면 보수중이어서 전면에 보호막이 쳐져있다. 대불의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보호막 위로 드러나는 대강의 형상만으로도 그 규모가 짐작된다.

 

 

▲빙링스석굴의 백미로 불리는 169호굴. 천연석굴의 바위면 위에 불보살상이 빼곡히 조성돼있다.

 


빙링스석굴의 백미인 169호굴로 가기 위해서는 수직에 가까운 나무 계단을 올라야 한다. 석굴이 암벽 60m 위의 낭떠러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숨이 차오르고 아래를 내려다보기가 두려워질 즈음 169호굴에 들어선다.

 

순간 자연석굴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불보살상이 우리를 굽어온다. 빙링스석굴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가장 많은 수의 불보살상과 가장 이른 시기의 분명한 연기를 가진 석굴이다. 깊이 19m, 너비 26.75m, 높이 15m나 되는 불규칙한 장방형 동굴은 온통 불보살상을 봉안한 불감과 부조, 벽화들로 빼곡히 뒤덮여 있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소중한 명문 위에는 보호를 위해 얇은 플라스틱 보호막을 설치해 놓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글씨는 조금 흐릿하지만 알아보기 힘들 정도는 아니다. 조성 연대 추정의 단서라는 학술적 가치를 모르더라도 이 석굴은 보는 이들의 감탄과 신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자연 석굴의 불규칙 암벽 면에 조성한 불보살상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기라도 한 듯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움푹 들어간 바위는 그대로 좌대가 되고 불쑥 튀어나온 바위는 천연의 감실이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각자 자신에게 꼭 맞는 위치에 모셔졌으니 이 석굴을 조성한 장인의 안목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169호굴에서 나무난간을 이용해 절벽(대불의 머리 위다)을 따라가면 172호굴로 이어진다. 서진시대부터 북주, 북위, 명에 걸쳐 꾸준히 조성되고 확장된 석굴이다. 북위시대에 조성된 삼존불 좌우로 서진시대에 조성된 좌불과 북주시대에 조성된 오방불, 그리고 명 시대에 그린 벽화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왼편에는 나무로 만든 닫집형태의 불감도 있다. 이 높은 곳까지 목재를 갖고 올라와 불감을 만들기가 얼마나 수고로웠을까. 이 높은 석굴에서 다시 내려갈 길이 막막한 만큼 이 석굴을 조성한 사람들의 신심과 용기가 장하게 느껴진다.

 

 

▲빙링스석굴의 대불은 보수중이다. 그 위로 보이는 두 개의 천연석굴이 169호굴과 172호굴이다.

 


빙링스석굴에 대한 조사는 댐 건설에 앞서 1951년 이뤄졌고 1970년에 이르러서야 일반에 개방됐다. 조사 과정에서 흙더미 속에 묻혀 있던 불감과 부조 마애불이 추가로 발견되기도 했다. 댐이 만들어지고 수위가 높아지면 빙링스석굴에는 새로운 길이 놓였다. 계곡 양쪽으로 콘크리트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길을 놓았다. 방문객은 계곡 왼쪽 길로 들어가 대불 앞까지 간 다음 다리를 건너 계곡 오른편 길을 따라 다시 입구로 나오게 된다. 다리를 건너 맞은편 계곡에 줄지어 있는 석굴을 바라보면 축대를 쌓는 과정에서 아래쪽 석굴의 일부가 축대보다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저 축대에 가려져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된 석굴도 있지 않을까. 석굴에 대한 훼손은 근대의 혼란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빙링스석굴 답사를 마치고 난주 시내로 돌아와 간쑤성박물관을 찾았다. 앞서 지나온 톈티산석굴과 빙링스석굴의 축소 모형이 비교적 정교하게 설치돼 있다. 보수 공사 중이어서 볼수 없었던 빙링스석굴 대불의 모습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현장을 직접 보는 것과는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건장한 법신과 당당한 상호가 인상적이다. 실크로드를 오가던 많은 이들이 기꺼이 자신의 안녕을 의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앞에서 이번 답사가 마지막까지 무사히 마무리 될 수 있도록 기원한다. 다음 목적지이자 이번 중국 불교 석굴 답사의 마지막 일정인 마이지산(麥積山)석굴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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