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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삼각산 금선사

기자명 법보신문

스님과 나무 함께 절하며 안부 묻는 생명의 도량

농산 스님 목정굴 기도로
정조 득남 후 대대적 중창
억불시대 불교중흥 발판


법안 스님 94년 주지 부임
나무 한그루 베지 않고 불사
자연 어우러진 친환경 도량


사찰운영위가 모든 결정
신도들 절 살림에 훤하니
주인 의식도 저절로 성장

 

 

▲서울 삼각산 금선사에는 조선불교를 구한 기도정진이 스며 있다. 그리고 200년이 넘은 소나무 곁을 지나 108계단을 오르면 주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보인다. 계곡 위에 정갈한 사찰. 어디를 둘러봐도 허튼 구석이 없다.  

 


떨군 나무들이 줄지어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초겨울산은 어느 때보다 쓸쓸하다. 녹음을 헤치며 기운차게 뻗어있던 산길은 가랑잎 하나 치우지 못한 채 이리저리 풀어져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산사는 상대적으로 곱다. 하지만 배경이 삭막하니 화려한 단청이 오히려 추워 보인다.


서울 삼각산(북한산)에 올라 금선사를 찾았다. 금선사는 무학 대사가 창건했다. 조선 왕조의 도읍을 정하려고 삼각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던 중에 지금의 금선사 터에 서기가 서려있음을 보고 절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에 소실되었고, 이후 1955년 도공 스님이 중건했다. 1994년 법안 스님이 부임한 후에야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북5도청을 지나 비봉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막 땀이 맺힐 때 쯤 금선사를 가리키는 푯말이 나온다. 금선사는 김장 울력이 한창이었다. 경내 곳곳에 나이든 소나무들이 서 있었고, 그것들의 호흡이 초겨울의 쓸쓸함을 삼키고 있었다.


200년이 넘은 소나무 곁을 지나서 108계단을 오르면 주불을 모신 대적광전이다. 경내에 계곡물이 흐르고 그 위에 홍예문이라는 예쁜 다리가 걸쳐 있다. 계곡 위에 정갈한 사찰, 그것은 지었다기보다 꾸몄다고 해야 옳다. 어디를 둘러봐도 허튼 구석이 없다. 반야전 아래는 목정굴이 있다. 작은 폭포 곁 석굴에 수월관세음보살을 모셨다. 부처님 눈길을 따라가면 인왕산이다.

 

 

▲계곡 위에 예쁘게 놓인 다리 홍예문.

 


금선사 목정굴에는 조선 순조 임금 탄생설화가 스며있다. 나무의 정기가 모여 있다고 해서 예부터 목정굴(木精窟)이라 불렸다. 이곳은 한국불교를 구한 큰 스님의 간절한 기도가 배어있다.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도성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자연 절과 함께 산 속으로 숨어들었지만 관아와 유생들의 추적은 집요했다. 승려들은 성곽 쌓는 일에 동원되었고, 지방 진상품을 만들어 바쳐야 했다. 유생들은 절에 와서 술과 고기를 먹으며 승려들을 부렸다. 전국 곳곳에서 불두를 잘라 우물에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사찰을 불태웠다. 승려들은 노비 아닌 노비가 되어 염불과 참선할 시간이 없었다. 불법이 말라가고 있으니 중생구제는 요원했다. 불교는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대구 팔공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용파(龍波) 스님은 낙담했다. 어떻게든 나랏님 생각을 바꿔야했다. 임금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하지만 승려 신분으로는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스님은 도력으로 한강에서 청룡과 황룡이 엉키어 올라가는 서기방광을 연출했다. 대궐을 거닐던 정조가 이를 보고 놀랐다. 신하들이 상서로운 기운이 나오는 곳을 찾아가니 노인이 누더기 한 장을 덮고 누워있었다. 차림은 남루했지만 얼굴에 서기가 어려 있었다. 노인이 임금 뵙기를 청했다. 신하들이 궁궐로 데려가자 스님은 임금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소승은 용파라 합니다. 불교 탄압에 조선의 수행자들이 곤경에 처했습니다. 부디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정조는 용파 스님의 법력을 한 눈에 알아봤다. 임금의 마음이 움직였다. 정조는 대신 다른 부탁을 했다.


“잘 알겠소. 그렇다면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시오. 지금 후사가 없으니 불력으로 이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용파 스님은 궐을 빠져나왔다. 조선 불교의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했다. 천안통(天眼通)을 열었다. 대궐 뒤 삼각산 금선사에 주석중인 농산(聾山) 스님이 보였다. 한걸음에 찾아갔다.


“소승이 임금의 후사를 이어주기로 임금과 약조를 했습니다. 그리고 선정에 들어 살피니 이 일을 맡아 주실 분은 농산 스님뿐이었습니다. 조선 불교의 앞날이 우리 둘에게 달렸습니다.”


농산 스님은 빙그레 웃었다. 이미 용파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용파 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산 스님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300일 관음기도에 들었다.


어느 날 후궁 수빈 박씨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말했다.


“소승은 농산이라 하온데 금선사에서 정진 중입니다. 소승이 마마의 몸속에 들어가 나라의 대를 잇겠습니다.”
다음날 왕실에 보낸 사람을 알 수 없는 봉서가 올라왔다.


‘경술(庚戌) 6월18일 세자탄강(世子誕降)’


궁궐에서 금선사로 사람을 보냈다. 그러자 목정굴에서 정진하던 농산 스님은 막 열반에 들었고, 굴 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과연 6월 18일이 되자 수빈 박씨가 세자를 낳았다. 그가 바로 순조 임금이었다. 정조는 스님과의 약속을 지켰고,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했다. 이렇게 농산 스님이 조선 불교를 구했고, 그 기도 현장이 목정굴이었다. 일찍이 경허, 일타 큰스님들도 금선사가 한국 불교를 구했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법안 스님이 주지로 오기 전까지 목정굴은 버려져 있었다.

 

 

▲정조가 농산 스님 기도로 후사를 얻은 목정굴.

 


안 스님이 1994년 8월 주지로 부임했다. 범어사로 출가한 스님은 범어사 말사인 금선사에 7년 전에 들렸다. 그때 강한 인상을 받았다. 주변 경관이 빼어났고, 무엇보다 경내에 계곡이 흐르는 것이 기특했다. 경내에서 바라보니 서울 도심은 저 아래 있었다. 그리 깊지 않으면서도 무척 깊어보였다. 세간과 출세간이 어디인지를 더듬다 문득 금선사가 마음속에 들어왔다.


‘금선사가 나를 끄는구나.’


그런데 그 원이 이뤄졌다. 법안 스님은 주지 소임을 맡은 후 맨 먼저 목정굴을 복원했다. 그 안에 새로 부처님을 모셨다. 그러자 부처의 가피가 잇달아 피어났다. 목정굴 기도로 뜻을 이룬 사람들이 미소를 머금고 일주문을 넘어왔다. 특히 자식을 바라는 이들이 많았다. 자연 기도 명소가 되었다. 스님은 기도를 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다르다고 한다. ‘목정굴 기도’로 딸을 얻은 어떤 주부는 딸의 행동과 심성이 예사롭지 않다며 스님을 찾아오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아이가 ‘지우개’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시키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지구 위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예쁜데 무엇을 지우나.”

 

 

▲금선사 주지 법안 스님의 부처는 세상 속에 있다.

 


법안 스님은 원을 세우고 차례차례 불사를 했다. 거의 모든 전각들을 새로 조성했다. 그런데 불사를 하면서 빚을 져본 적이 없다. 놀라운 가피였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불사 소문을 듣고 찾아와 시주를 한 적도 있다. 금석학의 최고봉이었던 지관 스님은 금선사의 묵직했던 옛날의 권위와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를 되찾아야한다고 당부했다.


법안 스님은 불사를 하면서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았다. “박복하면 나무를 벤다”고 했으니 금선사 절집 식구들의 복을 뺏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경내에는 200년 넘은 소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나무들이 멋대로 서있다. 전각과 전각 사이에 서 있는 소나무는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스님의 눈에는 두 전각을 화해를 시키려는 몸짓처럼 보인다. 또 보리수를 살리기 위해 요사채를 휘게 지었다. 그랬더니 해마다 열매를 더 많이 맺었다. 보리수의 보은이었다. 그걸로 염주를 만들어 돌리니 보리수가 곧 수행자였다. 스님과 나무는 아침저녁으로 서로 고맙다고 절한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화엄사상의 가르침을 날마다 경내에서 실천하고 있다.


환경론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나무가 있는 경내 풍경을 좋아한다. 아마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일 것이다. 자연과의 상생, 그것이 곧 부처의 가르침이었다. 스님의 이러한 노력들이 모아져 금선사는 템플스테이 명소로 자리 잡았다. 특히 외국인들이 좋아한다. 자연과 어울린 ‘산소 같은 사찰’을 표방하며 일상의 노폐물을 씻겨주고 있다.
선사에는 보이지 않는 자산이 있다. 바로 사찰운영위원회이다. 스님과 신도들이 모여 사찰 운영 전반을 심의, 의결한다. 불사 계획도 무리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제동을 건다. 기도비, 불전함, 인등비, 인건비, 부식비 등 수입과 지출 내용을 모두 신도들에게 공개한다. 사부대중이 참여하여 18년 동안 살림을 공유했다. 절 살림을 신도들이 훤히 꿰고 있으니 더욱 아끼고, 또 그릇이 비면 채우려 한다. 그러다 보니 재정 사고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찰운영위는 누구나 주인의식을 퍼가는 믿음의 곳간인 셈이다.

 

 

▲템플스테이관에서 바라본 반야전. 반야전 자리는 금선사의 옛 대웅전이 있던 곳이다. 

 


사찰 곳곳에, 사찰 운영에 ‘알면 행하는’ 법안 스님의 의지가 스며있다. 현장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절이 높은 곳에 있으면 인간의 고통이 어찌 기어오르겠는가. 대중과의 소통, 그것이 곧 길 위에서 부처님이 찾았던 것이다. 스님은 80년대부터 격동의 현대사가 펼쳐졌던, 우리 사회의 아픈 현장에 있었다. 현장에 가면 부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려 했다. 그럴수록 약자들의 외침이 가슴에 사무쳤다. 수행자로서 부끄러웠다.


“중생을 이해하려면 중생의 소리를 듣고, 몸짓을 보고,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스님은 세상 공부는 하지 않고, 속세의 문제를 외면하고 자기 수행만 고집한다면 어찌 부처님을 바로 볼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따지고 보면 세상일은 불교가 보듬고 가야할 업이었다.


스님은 격조 있는 국가가 되려면 모자란 사람을 품어야한다고 믿는다. 이웃이 죽어가고 있다면 우선 현장에 달려가야지, 왜 죽어 가느냐고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둘러보면 우리 사회에 진부하고도 어리석은 물음들이 너무도 많다. 법안 스님은 지금도 현장에 있다.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허물어 세상의 소리가 사찰에 흘러드는 사찰. 청아한 솔바람처럼 맑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금선사, 그곳에는 고향 북녘에 가지 못한 장기수들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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