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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북한산 노적사

기자명 법보신문

세상 구한 무명 고승들 향훈 쌓여 흰봉우리 되었나

18세기 성능 스님 진국사로 창건
북한산성 축성한 스님들 머물던
승영사찰이나 正史엔 언급 없어


1977년부터 종후 스님이 도량 정비
선원 건립·정진 마지막 불사 원력
“수행 당부한 월산 스님 뜻 따를 것”

 

 

▲노적사 하늘 한쪽을 노적봉이 가득 차지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볏짚으로 산봉우리를 위장해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가난한 전설 대신 ‘부처님의 감로가 쌓인 봉우리’라는 해석에 무게를 실어 본다.

 


적사는 북한산 노적봉 밑에 있다. 노적봉은 북한산의 많은 봉우리 중에서도 특히 넉넉하다. 어찌 보면 여인의 젖가슴 같고 어찌 보면 노적가리 같다. 노적봉마다에 서려있는 흔한 전설이 북한산 노적봉에도 서려있다. 즉 임진왜란 때 볏짚으로 산봉우리를 감싸 군량미가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해서 적의 기세를 꺾어버렸다는 것이다.

 

워낙 가난한 전설이라서 선뜻 주워 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최근에 만들어진 얘기가 솔깃하다. 노적봉 정상 좌측에 붙어있던 바위가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더니 우리네 강산에 8·15광복이 찾아왔다고 한다. 다시 우측의 바위가 떨어지는 날에는 조국 통일이 이뤄진단다. 누가 지어낸 얘기인지 몰라도 금방 우측의 바위가 떨어질 것 같다.


눈길을 걸어 더듬더듬 노적사를 찾아갔다. 산길은 미끄러웠다. 바람도 나뒹굴었다. 대서문을 지나고 중성문을 넘어들었다. 수많은 사찰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북한산에는 수많은 절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마침내 노적사로 가는 노적교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 제법 오르자 노적사가 나타났다. 경내에 들어 눈을 드니 노적봉이 하늘 한 쪽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성큼 경내로 내려올 듯했다. 그렇다, 노적사는 노적봉을 경내로 끌어들였다.


노적사는 조선 숙종시대(1712)에 성능 스님이 창건했다. 성능 스님은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방도승통 겸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승려들을 지휘했다. 스님은 용암사, 서암사, 봉성암, 원효암과 더불어 지금의 노적사 자리에 진국사를 창건했다. 스님이 세운 절 속에는 산성도 축성하고 성곽 수비에도 동원됐던 승려들이 머물렀을 것이다. 이른바 승영사찰임이 분명하다. 성능 스님은 ‘북한지(北漢誌)’를 남겼다. 그 속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에 관련된 당시의 정보가 담겨있다. 스님은 자신이 세운 진국사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노적봉 아래 있으며, 85칸 규모이다. 성능이 창건했다.’


성능은 숙종·영조 시대에 크게 활약했던 불교 지도자였지만 정사(正史)는 스님의 활약상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름 한번 오르지 않았다. 북한산 성내 승군 대장으로 30여 년 동안 북한산성을 쌓고 지켰지만 승려였기에 그의 행적은 지금도 역사의 변방을 맴돌 뿐이다. 진국사에 대한 설명 중 ‘85칸’이란 규모가 궁금하다. 다른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요사채를 길게 지어 승병들을 주둔시켰는지 모른다. 창고에는 병장기가 즐비했고, 여러 연장들이 쌓여있었을 것이다. 승병들은 성곽을 쌓고, 그 성곽을 지키며 고단한 몸을 뉘었을 것이다. 경향 각지에서 모인 승병들은 노적봉을 보며 고향을 떠올렸을 것이다. 배가 고프면 노적봉이 노적가리로 보였을 것이다. 고향 떠나온 어린 승병은 노적봉을 보며 어머니 품속을 그리워하고 눈물지었을 것이다. 보릿고개에 소쩍새라도 울면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산성이 앞길을 막았을 것이다. 


성능 스님은 비록 몸은 북한산에 두었지만 자신이 정진했던 남쪽 화엄사를 그리워했다. 다른 승병들처럼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스님은 ‘북한지’를 편찬하며 이렇게 썼다.


‘천승(賤僧)이 외람되이 여러 상공(相公:재상)들의 심부름을 받아 산문의 본분을 내던지고 힘을 다하여 이 일에 바삐 노력해온 지가 벌써 30년이나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무거운 짐을 풀게 되어 옛 산중으로 돌아가려 한다.’
성능 스님은 본향인 지리산 화엄사로 돌아가 곧 입적했다. 스님은 화엄사에서 오로지 부처님만 섬기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분을 팽개치고 나선 것은 불교를 지키려했기 때문이었다. 스님의 고단했던 ‘북한산 속의 30년’은 사실 불교 탄압을 막기 위한 또 다른 성 쌓기였을 것이다. 승영사찰 진국사는 이내 잊혀졌다. 승영사찰이기에 성곽과 운명을 같이했는지도 모른다.  진국사가 언제 어떻게 스러졌는지 누구도 전해주지 않았다. 노적봉만이 지켜봤을 것이다.

 

 

▲ 바위를 이용해 조성한 삼성각 내부.

 


1960년 무위 스님이 여러 보살들과 합심하여 ‘북한지’ 속의 진국사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터에 대웅전을 건립했다. 사찰명을 노적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절 주변은 아직도 날선 바람들의 세상이었다. 주지 스님이 열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던 1977년 종후 스님이 부임했다. 스님은 떠나지 않았고 차근차근 불사를 했다. 그것은 노적사로 노적봉을 내려오게 만든 대역사(大役事)였다. 종후 스님이 노적사에 든 인연을 풀어본다.


국사에서 정진하고 있는 종후 스님에게 멀고 먼 북한산에서 편지가 왔다. 노적사 주지스님이 보낸 것이었다. 자신은 이제 산을 내려가고 싶으니 노적사의 주지가 되어달라며 간곡히 청했다. 종후 스님은 이를 간단히 물리쳤다. 스님은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의 상좌였고, 공부에 목말라 있었다. 하지만 또 다시 편지가 왔다.


‘상구보리만 하고 하화중생은 안하시겠다는 말인가.’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다 1977년 예비군 훈련(주소지가 서울 조계사로 되어있었던 탓)을 받으러 상경했다. 노고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예비군복 차림으로 노적사에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산사에 실비가 내렸다. 경내로 나가 하늘을 봤다. 그 때였다. 멀리 흰 산봉우리가 보였다. 운무가 봉우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푸른 숲을 적시고 피어난 운무가 자신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종후 스님은 그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불국사에 내려가서도 노적사 위의 노적봉이 어른거렸다.

 

 

▲종후 스님은 지금의 노적사를 만든 주역이다.

 


노적사에 가고 싶었다. 노적봉이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그러나 선뜻 월산 스님에게 말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은사 스님에게 노적사 얘기를 꺼냈다. 대뜸 불호령이 떨어졌다.


“주지하면 공부를 못해. 가지 마.”


그때부터 은사 스님과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자식을 이기는 아버지가 없다고 했던가. 계속되는 상좌의 ‘태업’에 월산 스님이 두 손을 들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큰 절을 올리는 상좌에게 큰 스님이 당부했다.


“가거라. 가서 잘해라. 하지만 부디 주지한다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말라.”


그렇게 떠나왔다. 여름 북한산은 싱그러웠다. 하지만 막상 노적사에 들어오니 실상이 제대로 보였다. 대웅전 주변은 밭이었고, 거대한 녹음 아래 웅크리고 있는 대웅전은 초라하기만 했다. 스님은 우선 노적사 입구에 창건 공덕비를 세웠다. 그것은 처음 이곳을 되찾은 이들의 마음을 이어받자는 다짐이었다. 


차근차근 불사를 했다. 대웅전을 다시 짓고 나한전, 용궁전, 요사채, 종무실, 종각 등 불사를 이어갔다. 사찰 땅을 되찾는 소송은 더디고 힘이 들었다. 또 신도들을 선동하여 스님의 진심을 훼손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래도 마음을 뺏기지 않았다. 오직 부처님만 바라보았다. 2005년 노적사의 사찰 재산 일체를 조계종단에 헌납하고 명실공히 공찰로 재출범했다. 노적사는 마침내 2009년 네팔 팔탄타쉬지하초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7과를 이운해서 봉안했다. 적멸보궁이 생겨났다. 북한산 산골짜기에, 일찍이 승병들의 눈물이 고여 있던 곳에 가피가 피어났음이었다. 그해 10월 부처님진신사리탑 경찬법회와 적멸보궁 현판식을 봉행했다. 종후 스님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바람결은 맑았고, 북한산의 나무들이 붉은 잎을 흔들었다. 

 

 

▲ 네팔서 이운해 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

 


절은 크고 정갈해졌지만 종후 스님 자신은 갈수록 초라했다고 한다. 월산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사 스님은 공부하라고 그렇게 일렀지만 이를 지키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자신이 작아졌다.


‘돌아보니 미련하게 불사만 했구나. 어찌 은사 스님을 뵐 수 있을 것인가.’요즘은 부쩍 은사 스님의 마지막 당부가 등을 내리친다.


가봉, 문수봉, 보현봉, 나한봉, 월출봉 등 북한산 봉우리마다 불교에서 따온 이름들을 붙였다. 노적(露積)봉도 감로(甘露:부처님이 내린 부처의 은혜로운 설법)가 쌓여 있음일 뜻할 것이다. 또 북한산성 계곡에서 위를 보면 원효봉과 의상봉이 우뚝 서 있다. 한국 불교사에서도 쌍벽을 이루는 두 선사의 불(佛)빛이 우뚝하니 북한산은 불토이다. 사람들은 둥글고 원만하게 생긴 원효봉은 원융무애한 삶을 살았던 원효를 닮았고, 정갈하게 치솟은 의상봉은 학승으로 빈 틈 없이 살았던 의상을 닮았다고 한다. 지금도 원효와 의상 스님은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참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솟아올라와 있지만 편하고 아늑한 저 노적봉은 누구를 닮았을까. 아마 세상을 구하고도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고승들의 기도와 후덕한 행적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그 앞에 서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아닐까.


종후 스님의 세수 어언 71세. 스님은 마지막 불사로 선원을 짓고 싶어 한다. 자리도 이미 봐두었다. 그 옛날 북한산에서 공부했던 원효와 의상 대사도 모셔오고 싶다. 선원을 세우고 그 속에 들어 생을 마치는 게 원이다. 늦었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 그리고 노적봉 아래 선원이 생긴다면 천하제일의 인재양성소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이미 많은 것을 이뤘지만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는 종후 스님. 노적사에는 그런 스님을 보러 하루에도 몇 번씩 노적봉이 내려온다.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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