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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새해특집][br]“사람에 뿌리 내린 시와 종교엔 거짓 없다”

  • 새해특집
  • 입력 2012.12.31 18:02
  • 수정 2015.12.2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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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특집-삶을 노래하는 원로시인 신경림

77세 나이에도 사람 생각뿐
대상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창작 50여년 세월에도 여전


“짓밟히는 것의 상처와 아픔
다독이는 게 내 시의 숙명”

 

 

▲신경림 시인에게 삶에 대한 이해와 애정, 연민이 곧 시였다.

 

 

사람이 먼저다. 아니, 숨 탄 생명붙이 모두가 먼저였다. 60년 가깝게 삶을 노래한 시어에는 울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다. 생명이 나고 죽는 우주의 진리가 있었다. 시인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시가 그려냈던 우리네 삶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30여년전 터를 잡은 서울 성북구 정릉 자택에서 만난 신경림(77)은 여태 제자리였다. 생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사람에 뿌리 내린 채 치열하게 발버둥 치며 제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애정과 연민이 가득했다. 최근 펴낸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에서도 치열한 삶이 애처롭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열 시까지 갈게’//엄마는 야근/아빠는 회식//학원에 갔다 와서/라면 하나 먹고//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열한 시까지 갈게’//컴퓨터를 켰다가/동화책을 폈다가//또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열두 시까지 갈게’//텔레비전을 틀었다가/핸드폰을 열었다가//깜박 텔레비전 앞에/잠이 들었다//이윽고 귓전에서/엄마 목소리//‘얘는 날마다/텔레비전만 보나 봐’//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전문.)

맞벌이를 해야 사는 우리네 자화상이다. 목이 빠져라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안타깝다. 밤늦게 직장에 매여 있어야 목구멍에 풀칠하는 부모가 짠하다. 신경림 시인은 동시에서도 애정과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동시를 “시의 원형”이라고 했다. 언제나 쓰고 싶었지만 인연이 닿질 않았다. 손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읽으면서 ‘훌륭한 문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명 있는 존재는 끊임없이 살아가야만 했고 시인은 그네들 삶을 외면해선 안됐다. 오래된 그의 생각이었다.

 

1935년 충북 충주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21세였던 1956년 ‘문학예술’에 이한직 시인 추천으로 문단에 이름 석 자를 올렸다. ‘낮달’, ‘갈대’ 등이 수록됐다. 1973년 첫 시집 ‘농무’에서부터 시의 밑바탕에 약하고 힘없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면면히 흘러왔다. 농부들은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를 생업으로 하며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치며 살아봤자 고달프고 원통해 소주집에서 술 마실 일밖에 없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옛말이었다. 농업이 하늘 아래 땅 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근본이라는 건 구정물에 패대기치고 싶은 삶이었다. 1960년대 농촌은 그렇게 삶의 밑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농무’가 세상빛을 보기 전 시 창작을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거의 포기수준이었다. 등단한지 1년이나 됐을까. 1957년 시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동료나 선배 문인과 만남도 재미가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농사도 짓고 광산이나 공사장에 나가 막일도 했어요. 아편 거간꾼이나 방물장수들 따라 방랑도 제법 했습니다. 거기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시골에서 만났던 사람들 속에서 깨달았던 게 좀 있어요. 사람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개인의 삶은 철저히 본인의 것이고 본인 책임이지요. ‘더불어 혼자 산다’입니다.”

 

1956년 ‘갈대’ 등으로 등단
민초들 곁에서 서민 삶 배워

첫시집 ‘농무’로 이름 알려

 

 

▲서재에서 시집을 꺼내는 신경림 시인.

 


다시 시를 쓴다면 더불어 사는 정서와 아름다움, 의미를 노래하겠노라 다짐했다. 기회는 기막히게 그를 찾았다. 1965년 김관식 시인을 충주 시내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문단에 얼굴 내밀고 시 하나 발표하지 않고 시골을 헤매고 다닌 지 10년이 다되던 무렵이었다. 그는 그 때 일을 자전에세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기록했다.

“영수학원을 개설하겠다는 친구가 있어 그 준비를 도와주고 다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데, 골목으로 꺾어 드는 큰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이 어둠 속에서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김관식 시인임을 단박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 고장에 그가 나타난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놈아 나를 못 알아보겠니, 하는 핀잔에 비로소 나는 그의 손을 잡았고, 안부를 주고받기도 전 앞에 보이는 술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동안 엔간히 문학 얘기에 굶주려 있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시우(詩友) 앞에서 꽤나 떠들어댔다. 골목에 넘치는 사람들, 저들의 생각과 그들의 슬픔 그리고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는 지를 시가 담아야 한다고 했다. 김 시인은 술김에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자”며 그를 잡아끌었다. 김 시인은 자신의 집 방 한칸을 내어줬다. 김치와 쌀도 내줬다. 그렇게 그의 서울생활이 시작됐고 다시 시를 쓸 수 있었다.

 그의 잃어버린 시 창작 10년은 시집 ‘농무’에 담긴 1960년 농촌 애환의 자양분이었다. 그는 대상을 농민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시에 삶의 보편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을 담았다. 일찍이 1993년에 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에서 그가 추구하는 시를 밝히기도 했다.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이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라고 고백했다. 19년전이나 지금이나 시의 숙명은 그대로였다.

“시란 이 시대에서 가장 약하고 힘없는 사람과 함께, 그들의 정서와 함께 할 때 가장 좋은 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도 그들 중 한 사람이지요. 시는 힘 있고 권력을 가진 자 편에 서는 게 아닙니다. 힘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권력이나 시대정신, 이데올로기에 짓밟힌 사람들 정서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시가 호소력 있고 생명력을 가집니다. 불교나 다른 종교도 사람에게 뿌리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작은 체구, 작은 입에서 나온 말은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무거웠다. 그의 신념이 자리이타, 동체대비를 가르치는 불교와 맞닿아 보였다. 그의 시와 불교가 손가락 끝 맞댄 자리를 더듬었다. 시승(詩僧)이라 일컬어지는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과 그가 열흘 간 나눴던 대화에서 접점을 찾았다. 스님은 평소 시를 절집 말이라고 했다. ‘시(詩)’자를 나누면 ‘절(寺)’에서 나온 ‘말(言)’이었다. “선승의 말이 곧 시라고 했다”는 게다. 큰스님 오도송이나 게송, 열반송이 모두 한시형태니 그럴 만도 했다. 조계종 출판사 자회사 아름다운 인연이 2004년 펴낸 ‘신경림 시인과 오현 스님의 열흘 간의 만남’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대화가 있다. 스님은 그의 시를 읽으면 “시인보다 중이 됐어야 할 팔자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불교의 참선이니 수행이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느리게 사는 연습이라 할 수 있지요… 왜 이렇게 천천히 살아가라고 하는가요. 욕망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편안해집니다. 그러자면 외부적 환경을 바꾸기보다 마음을 편안하게 쉬어 줘야 하지요.”

그가 스님 말씀을 눙쳤다.

“그런 점에서 보면 스님은 천성적으로 중노릇이 잘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이네요. 말씨도 느릿느릿, 행동도 느릿느릿, 마음 쓰는 것도 그렇고…. 저는 부지런한 편은 아닙니다. 시인이란 좀 그런 데가 있는 사람인데도 스님에 비하면 저는 아무래도 중노릇은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스님 대답도 그의 말을 눙쳤다. 아예 또 다시 산에 깃들자고 제안했다.

“게으른 것과 느리게 사는 것은 구분해야겠지만 어쨌든 마음을 헐떡거리며 사는 것은 편안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긴 요즘은 스님들도 무척 바쁘게 살지만, 그래도 절에서는 느리게 살려고 하면 얼마든지 느리게 살 수 있습니다. 비교적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요.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저하고 같이 산에서 사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정중히 거절한 그는 스님과 시인이 추구하는 목표를 얘기했다.

“시도 좀 느릿느릿 걸어야 써지는 것이지 육상선수처럼 달리면서 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불교의 참선도 조용히 앉아서 하는 것이지 뛰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에 아주 동감합니다. 문학도 종교처럼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님이 “인생은 여행과 같다고 했는데 그 종착역인 죽음이 온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라며 한 마디 더 던졌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죽음은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부는 꽃이 될 것이고, 일부는 나무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물도 되고 바람도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죽음이 마냥 두려운 것만은 아니고 즐거운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스님은 무릎을 쳤다. 그의 시를 ‘불교시’라고 말해버렸다. “시 한편 한편이 팔만대장경의 한 구절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게 이유였다. 시 속에 아픔과 죽음이 녹아있고 삶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시에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으니,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있다는 얘기였다.

스님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라는 그의 시집에 실린 ‘묵뫼’를 좋아하는 시 첫 번째로 꼽았다. 묵뫼는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거칠어진 무덤이다. 스님은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깊은 세계가 담겼다고 평했다. 불교의 화합과 관용, 자비의 사상이 모두 녹아있다고 했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목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도 불러 모으고/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묵뫼’ 전문.)

이쯤 되니 그의 시와 불교가 손가락 끝이 아니라 방법이 달리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불교와 접점이 닿으니 스님과의 인연들이 궁금했다. 20대 후반에 살던 시골집 언덕 뒤쪽엔 작은 절이 있었다. 스님 두 분이 기거했던 곳이었다. 한 분은 환갑이 넘은 노인이었고, 한 분은 그보다 서너 살 위로 보였단다. 스님들이 절에 딸린 밭에 매달렸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하루 종일 웃통 벗은 채 헐거운 농모를 쓰고 뻘뻘 땀 흘리며 밭고랑에 달라붙은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고. 노스님이 똥통 메고 뛰뚱거리며 가자 그가 물었다. “일꾼 시키시지 직접 인분까지 내십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퉁명스럽게 한 마디 했다. “사지가 멀쩡한데 일 안하고 뭘 해!” 그는 스님이 싫지 않았다. 얼마 뒤 밭으로 찾아가 똥통 밀쳐놓고 땀 닦으며 쉬고 있는 노스님에게 주례를 부탁했고, 그 절에서 결혼했다.

 

 

“나와 생각 다르다고 선악 구분 짓는 집착 버려야”

 

 

똥통 메고 밭갈던 노스님에
주례 부탁하고 그 절서 결혼


민청학련 사건 고초 겪은
목우 스님도 기억에 남아
오현 스님과 인생 논하기도

특히 그는 목우 스님을 기억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무 목(木)’자에 허수아비 ‘우(偶)’자를 쓴다고 정확한 법명까지 설명했다. 목우 스님은 민청학련 관련자였으며 민중불교운동연합 부의장을 지냈다. 미국에서 포교활동 중 2010년 괴한에게 피습 당한 채 발견돼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스님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이란 1974년 박정희 유신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발동해 반공법 위반 등으로 1204명을 체포하고 180명을 구속했던 일이다. 이 사건으로 군사법원에 기소된 관련자 가운데 몇몇은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목우 스님과 아주 가까웠어요. 나이는 나보다 아래였지만 서로 자주 왕래했습니다. 정릉에서 절을 했어요. 그 때 제가 가기도 했고 스님이 제 집에 찾아오시기도 하셨죠. 진혼제에도 갔었습니다. 목우 스님 얘기를 꼭 써 주세요.”

대화가 민청학련에 이르자 고인이 된 김근태 민주통합당 전 상임고문으로 이어졌다. 그와 김 전 고문은 40년 지기였다. 형과 아우하며 지내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1975년 처음 만나 2011년 김 전 고문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였다. 흉흉한 시대였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다 김상진 서울대 농대 학생이 죽었을 때, 김 전 고문이 그를 찾아왔다.

 

조시(弔詩)를 부탁했다. 조문은 황석영 소설가가 썼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김 전 고문은 끝까지 조시와 조문을 쓴 이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민청학련에서 만든 청년학교의 교장도 맡았었다. 서로 “근태야”, “형님”하던 사이였으나 아우는 ‘형님’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다. 그는 김 전 고문 상갓집에서 술을 들이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술을 끊었다. 김 전 고문을 말하는 내내 그는 연신 “참 안됐어”라는 말을 했다. “섭섭하다”고도 했다. 동생은 그의 눈에 ‘혁명가’였다. 그는 “민주화 운동하다 정계에 들어와 정치인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혁명가와 정치가는 뭔가 다른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재차 스님과 인연을 물었다.

 

 

▲2004년, 시승 오현 스님과 신경림 시인은 여행, 사랑, 환경, 욕망, 통일, 전쟁, 문학을 주제로 백담사에서 열흘 간 대화를 나눴다. 조계종출판사 제공

 


“전 독실한 불자는 아니에요. 친불교라고 할까요? 그래서 절을 좋아하고 절도 자주 가고 교류도 잦습니다. 오현 스님과는 상당히 가까워요. 한 땐 수경 스님과도 교유했습니다. 오체투지를 하실 땐 몇 번 내려가 직접 오체투지를 하기도 했습니다. 몇 번 하고 나니 마음이 맑아지더군요. 시도 몇 번 써 스님의 오체투지에 힘을 싣기도 했어요.”

그는 ‘몸을 낮추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낮추는 기도행위’라는 수경 스님의 오체투지 정의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기도행위라는 뜻”으로 읽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오체투지 앞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서’라는 시를 바쳤다.

 

김근태 민주당 전 상임고문과
형님, 아우로 40년동안 벗
고인 장례식서 술마신뒤 절주

수경 스님 오체투지 지지해
“불교는 그늘진 곳에 있어야”

“하늘을 우러러/산과 바위와 나무와 풀을 우러러/내가 흙이 되고 땅이 되고/땅 속의 하찮은 미물이 되어서//천지에서 가장 낮은 것이 되어서/낮은 걸음으로 걸으며 다시/무릎과 팔굽과 이마를 땅에 깊이 붙이며//우리가 염원하는 것은/오로지 이 땅에서 대립과 갈등이 없어지는 것/손과 손이 서로 굳게 얽히는 것/숨결과 숨결이 따듯하게 섞이는 것”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서’ 중.)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오체투지순례단이 남한강에 다다르자 ‘한겨레신문’ 주선으로 목계나루에서 수경 스님과 순례단을 마중했던 적도 있다. 목계나루는 그의 시 ‘목계장터’의 무대였다. 그는 순례단 앞에서 목계나루에 얽힌 추억을 풀어놓기도 하고 ‘목계장터’를 낭송하기도 했다. ‘목계장터’는 800여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도 나옹선사의 게송과 맥이 닿는다고 평가받곤 하는 시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배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목계장터’ 전문.)
목계나루에 있는 시비에 ‘목계장터’를 새긴 이철수 목판화가도 이날 이곳을 찾아 술 한잔 기울였다. 오체투지 순례가 화제로 떠오르자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사회로 옮겨갔다. 용산 철거민 참사,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노조,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 등 최근 불교계의 대사회적인 목소리가 그에겐 어떻게 비춰졌는지 궁금했다.

“사회문제에 동참하는 모습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목소리만 내서는 안 되지요. 불교가 사회에서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습니다. 빈민이라든가 사회에서 그늘지고 소외된 곳이 적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곳에 불교가 자리하고 그들을 위한 일을 해야 합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종교가 지나치게 대사회적인 발언에만 치중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시인이 계속 시를 쓰되 그 시정신이 풍기는 향기를 사회로 퍼뜨리듯 불교의 자기수행도 중요합니다. 수행의 향기를 사회에 퍼뜨리고 실천하는 게 관건이지요. 한쪽에만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균형이 중요해요. 주먹만 불끈 쥐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던 문재인 후보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투표율 70% 넘으면 문재인 후보가 ‘승리’할 것이란 주장이 나왔고 소위 진보층은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가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정신이 무너졌다. 한 마디로 ‘멘탈붕괴’ 상태에 빠졌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향한 비판과 음모론, 원색적인 비난도 들끓었다. 그도 문재인 후보 진영 멘토단에 이름을 올렸었다. 지지의 뜻이었다.

“진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반성이 철저해야 할 때지 남을 비판할 시기가 아닙니다. 결과를 놓고 상대를 비판하기 전에 자기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원색적인 비난은 굉장히 우려됩니다. 노인교통카드 특혜를 없애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는 걸로 아는데 정말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이게 진보나 민주주의라면 저부터도 동참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보나 민주주의, 보수 역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문학도 불교를 비롯한 종교도 그렇지요.”

종은 속을 비워야 그 소리를 멀리 보내고, 강물은 아래로 흘러야 바다에 이른다. 비우고 내려가는 것이 진리란 얘기일 터다. 타인을 손가락질 할 땐 나머지 세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일침으로 들렸다. 새해 덕담을 청하자 “집착을 버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마음이 급합니다.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생각은 완전히 악이고 같은 생각은 선이라는 편협한 관념을 버려야 하지요. 자기와 방법만 다를 뿐, 세상을 이해하고 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노력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새해엔 선과 악을 나누는 치우친 생각을 버리는 불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동이든 서든, 남이든 북이든 제멋대로 부는 바람에도 풀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간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풀뿌리 땅에 깊게 뻗고. 그의 시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네 삶이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신경림

 

1935년 충북 충주 4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동국대 영문과에 재학 중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 ‘낮달’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농무’, ‘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낙타’ 등이 있으며 ‘시인을 찾아서’, ‘민요기행’ 등 산문집과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를 펴냈다.
만해문학상을 비롯해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 4·19문화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민족예술총연합회장을 역임했다.
사람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과 인생을 이해하는 태도를 수많은 시어에 담아왔다. 대표시인 ‘농무’에서 민족 정서가 짙게 깔린 전통적 무대를 배경으로 농민의 한과 울분을 시로 표현했다. 인간의 삶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을 때론 잔잔한 감정으로 다루면서 위로해왔다.
법보신문 창간초부터 연재로 인연을 맺어오다 1998년 ‘신경림 칼럼’, 99년 ‘법보정론’으로 따뜻한 시선이 담긴 필봉을 선보였다.
현재 동국대 국문과 석좌교수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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