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톈수(天水) 마이지산(麥積山)석굴 [끝]
15. 톈수(天水) 마이지산(麥積山)석굴 [끝]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3.01.03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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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단처럼 쌓인 신심, 그대로 불보살이 되다

142m 깎아지른 바위산에
불보살·불감 빼곡히 조성


소조·조각상 총7200여기
모가오굴 버금가는 규모


윈강·룽먼·둔황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로 손꼽혀

 

 

▲ 마이지산석굴. 높이 142m의 석회암 바위 표면에 동서로 모두 194개의 석굴과 불감이 있다. 총7200여 기의 석상이 봉안돼 있다. 벽화도 1600여 점이나 된다. 둔황 모가오굴 다음으로 많은 양이다.

 

 

“푸른 구름의 반, 가파른 벽면 사이에 돌을 깎아 불상을 만들었다. 만 개나 되는 감과 천 개나 되는 방이 있다. 비록 사람의 힘으로 이루었다 하나 신의 경지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설화집 ‘태평광기’의 한 대목이다. 중국 간쑤성 톈수이(天水)현에 자리하고 있는 마이지산(麥積山)을 일컬음이다.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백만급으로 산의 형상이 민간인들이 보리더미를 쌓아놓은 것과 같아서 이름이 맥적이 되었다”는 대목도 정확한 묘사다. 멀리서 본 마이지산엔 누런 바위 위에 가로, 세로 줄무늬가 선명하다. 영락없이 잘 익은 보리를 한 단씩 묶어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형상이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면 바위산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부처님이다. 바위산 서쪽 면과 동쪽 면에 각각 삼존불이 선명하게 조각돼 있고 그 주위로 석굴과 불감이 켜켜이 조성돼 있다. 쌓아 놓은 보릿단 보다 더 촘촘하다.

 

그러니 어디가 바위이고 어디가 도량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 자체로 커다란 불보살상이요, 거대한 도량이다.


마이지산석굴은 톈수이현 동남쪽 45km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142m의 석회암 바위 표면에 동서로 모두 194개의 석굴과 불감이 있다. 여기에 진흙으로 빚은 소조상 3513기, 천불상 3662기 등 총7200여 기의 석상이 봉안돼 있다. 본생도, 변상도와 같은 벽화도 무려 1600여점이나 된다. 둔황 모가오굴(莫高窟) 다음으로 많은 양이다. 다만 오랜 세월을 거친 탓에 남아있는 면적이 1200㎡ 뿐이라는 점은 아쉽다. 마이지산의 석굴과 벽화들의 조성 시기 역시 이르게는 북위(386~534) 때로 거슬러 올라가며 서위, 북주, 수, 당, 송, 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 올린 신심의 결실이 곧 마이지산석굴이다. 덕분에 윈강(雲岡)석굴, 룽먼(龍門)석굴, 둔황(敦煌)석굴에 마이지산석굴을 더해 중국 4대 석굴로 손꼽는다.


이곳 마이지산에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석굴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톈수이가 사방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교차점, 실크로드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찌감치 불교가 전해졌고 스님들이 모였다. ‘고승전’의 ‘현고전’ 편에 따르면 “현고는 서진(265~316)에 이르러 마이지산에 은거했다. 산에서 백여 명이 함께 수학했는데 의훈을 중요시하였으며 선도를 닦았다. 이때 장안에서 온 승려 담홍이 있어 진지역의 고승들이 마이지산에 은거함을 알고 찾아와 여러 승려들과 교유하고 우정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스님들이 석굴을 조성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함께 공부하고 수행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으니 석굴 조성에 직접 참여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다만 일찍부터 마이지산이 스님들의 주석처이자 수행처로 이름 높았음은 분명하다. 그러한 곳에 신심이 모이고 불사가 이뤄진 것도 당연한 결과다.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어찌 오를까 걱정하며 다가가보니 철제 계단과 콘크리트회랑이 바위산 절벽에 매달려 각 석굴을 촘촘히 이어주고 있다. 대부분의 석굴이 지면으로부터 60~70m,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석굴은 무려 84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까지 올라가볼 계획이다.

 

 

▲ 높이 15.7m에 달하는 13호굴의 삼존불. 마이지산석굴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마이지산석굴 답사는 일반적으로 동쪽 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동쪽 면에는 모두 54개의 석굴이 있다. 서쪽 면의 석굴에 비해 조성 시기는 뒤지지만 석굴의 규모는 대부분 크다. 가장 먼저 일행을 맞이한 37호 석굴에는 불상과 보살상 각 1기가 불감을 지키고 있다. 당초 다섯 기의 불보살상이 있었지만 지진과 자연훼손을 겪으며 현재는 두 기만 온전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이곳 마이지산석굴도 지진으로 인해 여러 차례 심각한 훼손을 입었다는 설명이다. 37호굴을 지나자 계단을 오르기 전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던 13호굴, 대형 삼존불의 발치로 이어진다. 높이 15.7m에 달하는 이 삼존불은 마이지산석굴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서있다. 수직의 바위면에 조성한 대형 불상임에도 섬세한 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조각과 소조의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선 바위 면에 나무 기둥을 박아 뼈대를 만들고 삼존불을 조각한다. 대략의 형상이 완성되면 미리 박아 놓은 나무기둥 뼈대에 의지해 진흙을 붙이며 세밀한 표현을 완성한다. 그 위에 다시 하얀 석회가루를 발라 매끈한 피부를 표현해 마무리했다. 특히 삼존불의 눈동자가 유독 검게 빛나는 것은 유리의 일종인 검은 돌을 사용한 까닭이다.


이 삼존불은 수나라 문제가 조성했다. 수나라는 비록 38년 밖에 지속되지 못한 단명한 왕조지만 진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 주인공인 문제는 자신이 이룬 대업을 기리기 위해 전국에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덕분에 당시 수나라에는 스님이 23만 명에 달했으며 문제가 조성한 사찰이 3792개, 불상이 10만6580기였다고 한다. 문제는 이곳 마이지산 정상에도 사리탑을 세우고 정염사(淨念寺)란 이름까지 내렸다. 강력한 군주의 뒷받침이 있었으니 이처럼 거대한 불상 조성이 가능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 편으론 입맛이 쓰다. 수직의 절벽에 몸을 매단 채 바위를 쪼고 진흙을 바르고 정성스럽게 회칠을 했을 장인들. 그들이 목숨 걸고 조성했을 이 거대한 불상 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은 없다. 신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터. 하지만 이 장엄한 불상 한 귀퉁이엔 고단하고 버거웠을 그들의 삶이 묵직한 납덩이처럼 매달려 있는 듯 하다.

 

 

▲ 9호굴의 불보살상. 젖살이 차오른 듯 통통한 볼과 앵두같이 작고 선명한 입술이 송나라 불보살상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3호굴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9호굴에는 젖살이 차오른 듯 통통한 볼과 앵두같이 작고 선명한 입술이 뚜렷한 불보살상들이 줄을 잇는다. 북주시기에 조성된 불감과 불상이지만 송 대에 보수가 이뤄지며 송나라 불보살상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그러나 앞서 당나라 시기 이 일대에 큰 지진과 전쟁이 잇따르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 석굴로 피신하는 일이 생겼다. 당시 사람들이 석굴에 머물며 불을 피운 까닭에 감실에는 검은 그을음이 잔뜩 남았다. 그을음 아래로 선명한 벽화들의 흔적이 보이지만 제색을 되찾으려면 아직도 오랜 세월이 더 필요할 듯하다.


3호굴로 이어지는 계단은 유독 가파르다. 석굴을 조성한 이 지역의 관리들이 벼슬이 계단처럼 가파르게 상승하기 바라며 일부러 계단을 가파르게 조성했다는 안내인의 설명이 재미있다. “이 계단을 쉬지 않고 단숨에 오르면 앞으로 하는 일이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덕담까지 덧붙이는 통에 가쁜 숨을 재촉해 계단을 오른다.


턱까지 차는 숨을 간신히 붙잡고 도착한 3호굴은 일명 ‘천불랑’이다. ‘천개의 불상이 있는 회랑’이라는 뜻이다. 회랑을 따라 보이는 불상은 2단 뿐이지만 이 회랑 아래로 4단이 더 있어 총 6단이다. 한 단에 평균 50여 개의 불상이 조성, 모두 297기로 비록 천개는 안 되지만 그만큼 불상이 많다는 비유다.

 

 

▲ 마이지산석굴에서 가장 높고 규모 또한 가장 큰 4호굴은 지표로부터의 높이 84m에 자리하고 있다. 8개의 기둥 사이로 7개의 감실이 조성됐다.

 


천불랑을 지나면 마이지산석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조성돼 있는 4호굴이다. 지표로부터의 높이 84m, 8개의 기둥 사이로 7개의 감실이 조성된 4호굴은 마이지산석굴에서 가장 높고 규모 또한 가장 크다. 이 높은 곳에 조성한 석굴의 크기도 눈길을 사로잡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전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론 이곳까지 올라오기도 불가능하겠지만 혹여 간신히 올라왔다 하더라도 이 벼랑 끝 절경 앞에서 다리의 힘이 풀리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석굴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 아름다움 또한 절경에 못지않다. 특히 외벽 천장에 조성된 비천상 벽화는 마이지산석굴 벽화의 정수다. 이 벽화는 비천의 얼굴을 부조로 조각한 후 몸과 옷을 그려 넣었다. 입체감을 극대화 시키기 위함이다. 허공을 날고 있는 비천들의 몸동작과 하늘거리는 옷자락도 아름답지만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얼굴,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눈길을 맞춰주는 그 입체적인 얼굴에서 쉽게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4호굴 입구에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다. 그 철조망 너머 바깥세상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는 보살상에서 쉽게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 석굴은 북주 때 조성됐지만 당나라 때 대지진으로 크게 훼손 된 후 송 대에 이르러 보수해 오늘이 이르고 있다. 석굴의 어려 곳에 훼손된 흔적이 남아있고 감실 안 불보살상은 보호를 위해 둘러쳐진 촘촘한 쇠창살문 뒤에 갇혀버린 형상이지만 그 아름다움만은 결코 가두지 못했다.


4호굴을 지나면 서면으로 이어진다. 동면에 아미타삼존불상이 눈길을 끈다면 서면에는 높이 9.13m의 삼존불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크기는 조금 작지만 동면의 삼존불상보다 100여년 앞서 조성됐다. 우측의 보살상은 심하게 훼손됐지만 주불의 보존 상태는 거의 완벽하다.


마이지산석굴의 소조상과 불감의 보존 상태가 이처럼 양호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특별하게 배합된 흙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소조상과 불감 조성에 사용된 흙에는 짚 외에도 면화, 마, 삼배, 달걀흰자, 찹쌀 등이 들어갔다. 점성을 높이고 흙이 마른 후에도 변형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특히 각종 약재를 넣어 벌레가 생기는 것을 예방했다. 서위 시대에 조성된 191호굴의 허물어진 흙벽 속에서는 이런 배합재의 흔적이 드러나 석굴을 조성한 사람들의 지혜와 정성이 엿보인다.


서쪽 면을 통해 마이지산석굴을 빠져나오니 수천 년의 시간을 한 걸음에 건너 온 듯 머릿속이 아득하다. 주변을 하얗게 덮고 있는 눈이 가뜩이나 희미해진 시간 개념을 더욱 흐릿하게 만든다. 실크로드 중국 석굴 답사의 마지막 조사 현장이 이곳 마이지산이라는 점이 돌아서는 걸음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불교 석굴 현지 조사를 진행한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텍스트비평팀은 옛 실크로드의 출발지였던 장안(長安), 오늘날의 시안(西安)까지 계속 동진한다. 그러나 이번 조사의 석굴 답사는 이곳 마이지산이 마지막이다. 불교 석굴은 산시성, 허난성 및 그 동쪽으로도 수없이 산재해 있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펴본 석굴도 규모 면에서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인 셈이다. 하지만 실크로드 중에서도 대동맥인 톈산남로를 따라 진행된 이번 조사에서 만난 석굴은 중국 불교 석굴 예술의 보고이며 정수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한 석굴들을 만났으니 멈추는 걸음에 아쉬움을 남길 필요는 없다. 불교 석굴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진 구법의 열정과 전법의 원력 또한 생생하고 원대하니 그대로 큰 감동이다. 그 숨결과 원력이 살아있는 이 현장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에도 끝없이 전해져 구법과 전법의 원동력이 되길 발원하며 실크로드 불교 석굴 기록을 마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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