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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암환주인(巖喚主人)

기자명 강신주

당신은 주인공으로 사는가 아니면 손님으로 사는가

대승이 꿈꾼 화엄의 세계는
각각의 개성이 만개하는 곳


자신 존귀함 모르는 우리는

동화 속 미운오리새끼일 뿐


마마보이의 주인 아닌 사랑
자신·타인 모두에 비극 초래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예!”라고 말했다.

 무문관(無門關) 12칙  암환주인(巖喚主人)

 

 

▲그림=김승연 화백

 


1. 깨달음은 주인으로 사는 것

 

‘화엄경(華嚴經)’이란 불교 경전이 있습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깨달음을 찾아가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던 경전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경전의 내용이 아니라, 경전의 제목입니다. 대승불교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화엄세계라고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華嚴)’은 산스크리트어 간다뷔하(Gan.d.avyu-ha)라는 단어를 의역한 말입니다. 여기서 간다뷔하라는 말은 온갖 가지가지의 꽃들을 의미하는 ‘간다(Gan. d. a)와 화려한 수식을 의미하는 ‘뷔하(vyu- h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간다’는 꽃을 의미하는 ‘화(華)’로, 그리고 ‘뷔하’가 장관을 의미하는 ‘엄(嚴)’으로 번역되면서, 화엄이라는 말이 탄생한 겁니다. 결국 화엄이란 말은 들판에 잡다하게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의 장관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대승불교가 꿈꾸었던 화엄세계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시는지요. 모든 존재들이 자기만의 가능성과 삶을 긍정하며 만개하는 세계, 바로 그것이 대승불교가 꿈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에서의 자비란 바로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향이 옅다고 나쁜 꽃이고, 색이 탁하다고 무가치한 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 각각은 모두 자기만의 자태와 향취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주인의 모습입니다. 반면 노예는 붉은 장미꽃이 가치가 있다고 해서 꽃잎을 장미 모양으로 그리고 색깔을 붉게 만들려는 개나리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장미꽃에 근접하게 자신을 모양을 꾸민다고 할지라도, 개나리로서는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입니까. 자신의 잠재성을 부정하고 성장한다는 것, 혹은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애절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부정해왔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행복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 아닐까? 깨달음의 희열이 별것이겠습니까?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열반일 테니까 말입니다.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서암 사언(瑞巖師彦) 스님이 왜 아침마다 자신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불렀는지 말입니다. 단순한 주인이 아니라 존칭어인 공(公)을 붙여서 부를 정도로 서암 스님은 깨달음이란 별것이 아니라 바로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남이 아무리 선의지를 가지고 조언을 해도, 그 말에 따라 사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악의를 가지고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는 사람에 대해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2. 사다리는 올랐으면 버려야

 

싯다르타(Gautama Siddha- rtha, BC563?-483?)가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제자들은 몹시도 슬퍼했고 합니다. 하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반응입니다. 스승이 없어지니 자신의 갈 길이 막막하다고 느꼈을 테니까요. 이런 제자들에게 싯다르타는 마지막 사자후를 남깁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개나리는 개나리로 만개하고,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로 만개하고, 장미는 장미로 만개할 뿐입니다. 그러니 히아신스가 장미를, 장미가 개나리를, 개나리가 히아신스를 모방할 일이 아니지요. 물론 아직 자기만의 꽃을 피우지 못한 제자들, 다시 말해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가 자신의 이상형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존귀하다는 선언은 싯다르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 나아가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직 자신이 존귀하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들은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하는 미운 오리 새끼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모르니, 멋진 오리가 되려고 욕망할 수밖에요. 이럴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은 너무나 절절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동양만이 아니라 서양에도 그대로 울려 퍼졌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바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입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기대거나 모방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서양에서 신이란 존재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모방과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모방의 대상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자신만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과연 신만이 모방의 대상일까요? “누구도 모방하지 말라”는 차라투스트라 본인이나 그의 가르침도 바로 모방의 대상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자신의 절대적인 존귀함을 깨달은 차라투스트라도 “나를 부정하라”고 피를 토하듯이 외쳤던 겁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제자들 각각도 자기만이 존귀함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유명한 말을 빌린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하는 법입니다.


3. 주인공이 될 때 사랑도 가능

 

그렇다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으로 산다고 해서 마치 독재자나 잔혹한 자본가, 혹은 권위적인 아버지처럼 누군가를 노예처럼 부린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단지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주인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지 않는 법입니다.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으로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예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고개를 갸우뚱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분명해지는 일이니까요. 타인이 밥을 차려주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또 타인이 운전을 해주어야 길을 떠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법입니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자기가 부리는 사람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그렇다면 이토록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타자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인가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기의 모습보다는 분명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더 사랑스러울 테니까요.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마마보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법적으로나 신체적으로는 성숙한 어른이지만 매사에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마마보이는 여성들에게 강한 호감을 줍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마마보이가 교제하는 여성의 속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얼굴 표정이나 말투만 접해도 금방 그녀의 속내를 쉽게 헤아릴 겁니다. 이미 그는 어머니라는 여자의 눈치를 보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속내를 자기만큼 잘 헤아리는 남성을 어느 여자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랑에 빠지겠지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여성은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두 사람만이 두 사람의 일을 결정해야 하는데, 자꾸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테니까 말입니다.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남자친구는 당혹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나를 좀 이해해줘.” 그렇지만 분명하지 않나요. 남자친구가 이해해달다는 것은 사실 자기 어머니의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계속 불만을 토로하는 여자가 마마보이는 서운하기까지 할 겁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여자 친구의 잘못인가요. 남의 집에 얹혀사는 사람은 친구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주인의 눈치를 보는 집에서 얼마나 친구가 불편해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머니로부터 독립된 성숙한 남성이 될 때까지 마마보이는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강신주

그 사랑은 자신에게나 사랑하는 타자에게나 모두 비극을 초래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에 대한 것이든 타자에 대한 것이든 사랑은 주인공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주인공이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침마다 일어나서 서암 스님이 자신에게 던진 말을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주인공!” “예!”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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