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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원산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일심정진 속 첫 소식 접하면 ‘불이’체득도 그리 머지않아

새벽 4시 극락암 빗장 열어
‘불연이 깊다’는 말에 출가


‘이뭣고’ 화두 5년 증득없자
관응 스님 문하서 3년 결사

 

 

▲원산 스님

 


백련정사 은행나무가 한 겨울, 산내 짙은 안개 속에서도 의연하게 서 있다. 곱게 키워낸 샛노란 낙엽, 몇 해 동안이나 땅으로 내려놓았을까.


백련정사 옛 이름은 백련암. 근세 조선시대에는 선풍이 뛰어난 선원으로 유명했던 영축 산내 암자다. 환성, 경허, 만해, 운봉, 향곡, 구산, 성철 등 큰 스님들이 정진한 곳이고, 만해 용운 스님이 ‘불교대전’을 집필한 암자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 때 월하 스님이 창건했던 백련암을 1990년 중반 중창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게 한 스님이 현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원산 스님이다. 경내 한 전각에 ‘명월선원(明月禪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원산 스님이 처음 백련암을 맡았을 때 ‘선원을 개원하겠다’는 제자 원산의 뜻을 헤아려 경봉 스님이 내려준 글씨라고 한다. 극락암 삼소굴에서 눈 푸른 납자들을 제접했던 선지식 경봉 스님도 백련암에서 수행 한 바 있는데 사실 원산 스님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원산 스님은 세상일이 궁금했다. ‘사람들은 어찌 살고 있을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비춰지지만 사실 ‘나는 어찌 살 것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서 나온 물음이었을 것이다.


집을 나선 그의 걸음은 어느 덧 통도사 자장암으로 향했다. 한 동네에 살았던 지인이 출가해 있었기에 절집 생활이 어떤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루 머물렀다. 고즈넉한 경내 정취는 마음에 들었지만 역동성이 없어 심심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린 처마 끝 풍경이 밤하늘에 잔잔하게 울려도 스님의 마음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새벽녘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단잠을 훼방하는 소음으로 들렸을 뿐이다.


별게 없어 보여, 짐을 챙겼다. 그러자 출가한 지인이 그에게 간곡한 한마디를 전했다. ‘지척거리에 극락암이 있습니다. 선지식이 계시니 한 번 친견하시지요!’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임종게를 남겼던 경봉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던 때다. 새벽 4시, 극락암으로 향했다. 별다른 기대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산중을 내려갈 참이니 좀 더 산을 오른다고 손해 볼 건 없다싶었다.


삼소굴(三笑窟) 빗장을 열었다. “어찌 왔는가?” 순간, 자신도 예기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절에서 공부하고 싶어 왔습니다.” “너는 전생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뜨거운 화로에 눈 한 송이 닿으면 그 즉시 녹는다 했던가. 경봉 스님의 ‘전생 인연’ 한 마디에 그 간의 상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출재가 관계가 스승제자로 바뀌었다.


1997년 6월 조계종 초대 교육원장을 내려놓은 원산 스님은 1998년 2월 ‘무문관’으로 향했다. 스스로 잠근 빗장을 다신 연 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1년 3월. 이후, 백련암을 백련정사로 이름을 바꾼 스님은 2008년 ‘만일염불회’를 결성해 불자들을 지도했다. 교육원장, 무문관, 만일염불회로 이어지는 ‘원산 여정’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

 

 

▲원산 스님이 3년간 머무르며 정진했던 ‘무문관’에 오르는 길.

 


‘무문관’으로 간 연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원산 스님은 특유의 호쾌한 웃음을 보였다.


“출가 후 저는 은사이신 경봉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뭣고’화두 들고 한 5년 동안 좌복 위에 앉았습니다. 제 근기가 부족해서이겠지요. 진전이 없었습니다.”


어떤 두려움이 밀려왔다. 선에선 얻은 바 없고 경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선교겸수’는 고사하고 ‘선교무식’이라는 지탄을 받을 것만 같았다. 관응 스님의 ‘선문염송’강의 소식이 때마침 전해졌다. 직지사로 행했다.

여름 한 달 동안의 강의를 다 들은 원산 스님은 10여명의 스님들과 함께 직지사에 머물렀다. 관응 스님을 모시고 경학에 매진해 보자는 도반들의 의지가 3년 결사로 이어졌던 것이다. 경학연찬을 회향한 원산 스님은 관응 스님의 강맥을 이어받았다. 그 때 받은 강호는 장해(藏海). 직지사 강주를 맡게 된 배경이다. 조계종 교육원장을 맡게 된 인연도 여기서 시작했을 터였다.


“교육원장에서 물러날 즈음 딱 맞게 백련암 토굴 불사가 끝났습니다.”


1995년부터 중창불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원산 스님은 이 과정에서 옛 스님들이 정진했던 곳으로 보이는 토굴을 발견했다. 스님은 토굴 주변의 대나무 숲을 정리한 후 요사채를 지어 ‘죽림굴(竹林窟)’이라 이름 했다. 죽림굴이 마련되자마자 스님은 스스로 빗장을 걸어 잠갔다. ‘죽림굴’이자 ‘무문관’인 셈이다. 이후 하루 한 끼 공양으로 명을 이어가며 은산철벽을 마주했다. 그 시간이 3년이다! ‘부처님 말씀’을 들었으니 ‘부처님 마음’을 헤아려 보자는 원력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은사이신 경봉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더라도 그 주인을 찾아보지 않고 가면 무례한 일이라고 한다. 하물며, 이 몸을 평생 끌고 다니면서 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은 동서고금을 통해 오랫동안 이어져왔습니다. 그에 대한 철학적 고찰도 많지요. 하지만 내 스스로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그 또한 별 소용 없습니다.”


경전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해소했다 하더라도 실참수행을 통해 체득해야 한다는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뜻이리라. ‘해소’와 ‘체득’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빗장을 다시 열었을 당시의 ‘원산’메시지는 무엇일까? 분명한건 무문관에서 나온 선객의 일언을 듣기 위해 대중이 운집했지만, 정작 원산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무언설법’을 펼쳤으니 대중 나름대로 갈무리 해 가라는 뜻이 내포되었던 것일까?


“무문관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역시, ‘더운 물인지, 찬 물인지’는 자기가 마셔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원산 스님의 ‘무문관 메시지’를 단 몇 시간 만에 파악해 보겠다는 게 ‘욕심’이요 ‘오만’이다. 스님의 메시지는 천천히, 시간이 지나고 지나면서 하나씩 하나씩 상대 근기에 따라 나올 것만 같다. 그렇다 해도 이것 하나는 확연하다. 원산 스님의 무언설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직접 수행에 임하라’는 것. ‘원산인 나에게 더운 물인지 찬 물인지를 묻지 말라’는 의미가 배어있는 것이다.

 

교육원장 놓고 곧장 무문관
하루 한 끼 공양 3년간 매진


선·교 이어 염불에도 전념
‘극락’은 내 원력 따라 실현

 

 

▲통도사 산내 암자인 백련정사.

 


현재 통도사박물관에 소장된 ‘백련정사 만일승회기(白蓮精舍 萬日勝會期)’는 백련정사 옛 누각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1600년 전 동진 때 혜원법사가 여산 동림사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해 123명이 깨달음을 얻었고, 신라의 발징 화상은 강원도 건봉사에서 만일염불회를 창설해 31인이 허공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 기록을 눈여겨 본 원산 스님은 만일염불회 결성 원력을 세우며 기존 ‘백련암’에서 ‘백련정사’로 이름을 바꿨다. 백련정사는 현재 통도사 염불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아직 승가참여는 거의 없어 총림격의에 맞는 염불원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재가불자들의 참여만큼은 놀라울 정도다.


‘만일(萬日)’이라면 햇수로 28년도 넘는 일수다. 2008년 만일염불 원력을 세운 스님이 회향될 때의 세납은 대략 93세 즈음이다. 왜 염불인가?


“영명연수 스님이 ‘선정사료간(禪淨四料簡)’을 통해 전하셨습니다. ‘참선수행도 하고 염불수행도 하면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에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 부처나 조사(祖師)가 될 것이다.’ 선 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사부대중도 참고할 만합니다. 또한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수행도 없으면 쇠 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억 만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라 했지요. 참선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재가불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언입니다.”


그렇다. 참선 수행인이라 해서 염불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염불수행인이 참선 수행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근기와 인연에 따라 방편을 선택할 뿐이다. 여기에 높고 낮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어떤 수행을 하던 일심으로 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점검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일심정진 하면 ‘소식’은 분명히 있습니다.” 소식 이전과 이후 세상은 어떻게 다가올까?


“그 또한 소식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지겠지요. 분명한건, ‘나’자신을 알면 ‘상대’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라 한 이유도 확연히 다가옵니다. ‘부처님은 중생 마음속에 있다’는 이 통현 장자의 말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만 알아도 큰 소식을 접한 사람이라 봅니다. 그런 사람이 현인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안 사람입니다. 자기가 밟고 있는 땅 한 평도 함부로 파헤치지 않습니다. 흐르는 물 한 줄기도 함부로 가두지 않습니다.”


‘극락’은 여기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원산 스님은 강조했다. 그 실현은 다름 아닌 자신이 가능케 한다는 것 역시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며 나옹 선사의 시 한수를 건넸다.


‘아미타불 어느 곳에 계시는가/ 마음에 잡아두고 간절히 잊지 말아라./ 생각하고 생각하여 생각이 다한 곳에 이르면/ 여섯 문에서 항상 자금광을 뿜으리.(阿邇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
“여섯 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육근육식을 이해한 후 참구하면 언제든 그 여섯 문은 열어젖힐 수 있습니다.”
백련정사와 동고동락 하고 있는 은행나무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리 예뻤던 가을의 ‘샛노란 잎’도 아름다움에 취해 내려놓지 않으면 ‘탐욕’이 될 터. 그래서 유응교 시인은 ‘누가/ 저토록/ 탐욕을 털어 버리고/ 의연히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노래했을 것이다. ‘누가/ 저토록/ 처절한 추락을/ 황홀하게 수놓을 수 있을까.’라는 찬탄과 함께.
‘처절한 추락’을 각오해야 ‘털어 버릴 수’있을 것이다. 무문관 빗장 역시 걸어 잠그지 않으면 여는 법도 모르리라.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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