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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초주장(芭蕉拄杖)

기자명 강신주

있다는 오만과 없다는 절망 넘어서야 부처가 보인다

주장자 주겠다는 의미는
거짓 깨달음에 대한 풍자


성불하겠다는 그 생각이
수행자에겐 커다란 장애


없어진 것에 집착하면
과거에 매여 살게 될뿐


파초(芭蕉) 화상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무문관(無門關)44칙 파초주장(芭蕉拄杖)

 

 

▲그림=김승연 화백

 

 

1. 주장자는 깨달음을 상징

 

주장자(拄杖子)를 아시나요. 큰 스님들이 길을 걸을 때나 설법을 할 때 들고 계시는 큰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장자는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이나 불성(佛性), 혹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주장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깨달았다는 것을 뜻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무문관’의 44번째 이야기에서 파초(芭蕉) 스님이 대중들에게 던진 화두는 단순히 주장자라는 사물을 넘어서는 무거운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주장자가 있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없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깨달음의 의미가 크다고 하더라도, 주장자라는 단순한 사물 이야기로도 충분히 이 화두가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문관’에 등장하는 48개의 화두들을 우리는 읽을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요. 다 깨닫자는 이야기라면, 48개 화두 전부를 읽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파초 스님이 던진 화두는 정말 화두의 품격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이야기이니까요. 하긴 언어의 길이 끊어진 그곳, 바로 거기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먼저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는 말부터 생각해보지요. 사실 주장자가 있는 사람에게 주장자를 준다는 것부터 황당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파초 스님은 제자들에게 주장자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생각해보지요. 만약 제자들이 주장자를 받는다고 해보세요. 이것은 그들에게 주장자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 아닐까요. 그렇지만 주장자가 있는데, 또 받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결국 주장자를 주겠다는 파초 스님의 속내는 제자들에게 “지금 너희들에게는 주장자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데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스님은 속세 사람들을 만날 때 무엇인가 깨달은 것이 있는 척 거들먹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풍자한 것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니까 파초 스님은 조롱한 겁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짓된 깨달음을 비판했던 스님의 첫 번째 화두보다 더 어려운 것이 두 번째 화두일 겁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주장자가 없는데, 어떻게 뺏을 수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화두입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주장자는 없는 것일까요. 진짜 물질적으로 주장자는 없는지도 모릅니다. “주장자는 없다”는 생각 속에 이미 주장자는 엄연히 있는 것 아닐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파초 스님은 이렇게 제자들이 집착하고 있는 주장자를 빼앗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장자는 깨달음을 상징하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그러니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장자는 오매불망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갈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무엇인가에 강하게 집착한다면, 역설적으로 깨달음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제자들의 오만함을 통렬하게 조롱한 뒤에, 파초 스님은 주장자라는 관념 자체를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2. ‘깨달음’ 집착 놓아야 성불

 

주장자가 없다는 생각, 그리고 부처라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파초 스님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성불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주장자를 갖겠다는 생각만큼 스님들에게 끊기 어려운 생각도 없을 겁니다. 이런 생각이 없다면 스님들은 스님이 될 필요도, 그리고 파초 스님과 같은 큰 스님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파초 스님은 그마저 내려놓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파초 스님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서 우리는 현대 프랑스철학자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주저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e´atrice)’에서 그는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없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없다는 생각이 있다는 생각보다 무엇인가 하나가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여기 어떤 방이 있고,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있다고 해보세요. 제 앞 책상 위에 볼펜이 한 자루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제 주머니에 감춥니다. 그렇다면 책상 위에 볼펜은 이제 없겠지요. 여러분들은 이 광경을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께 책상을 가리켜며 물어보겠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제 볼펜은 책상 위에서 없어졌으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아무런 문제도 있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방에 있지 않았던 어떤 사람을 제가 방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까처럼 책상을 가리키며 물어봅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방금 들어온 그 사람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아마 그는 “책상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는 볼펜이 있었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볼펜이 없다”고 말할 때, 그는 “책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제야 베르그손의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볼펜이 없다”는 생각에는 ‘볼펜’이란 생각과 함께 ‘없다’라는 생각이 같이 있었던 겁니다. 베르그손이 “‘없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없다는 생각, 그러니까 무(無)라는 생각은 항상 우리의 마음에서만 가능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동시에 그것이 지금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만, 우리는 ‘그것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새로 방에 들어온 사람은 책상 위를 가리키는 제 손가락을 보고 말했던 겁니다. “책상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볼펜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없다는 생각이 더 큰 집착

 

“지갑이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직장에서 해고되었어.” 등등. 우리는 매번 없음에 직면하며 당혹감과 비통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지갑이 주머니에 있었다는 기억을, 그리고 살아계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집착의 기원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없어진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일수록 그것의 부재가 주는 고통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일 겁니다. 없다는 느낌은 그만큼 그것이 있었을 때 느꼈던 행복을 안타깝게도 더 부각시켜주는 법이니까. 그래서일까요.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은 건강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안타깝게 그리워합니다. 부모를 여읜 사람은 자신에게 호통을 쳤던 부모님이 밉기는커녕 다시 볼 수 없어 괴로울 겁니다. 애인과 이별한 사람은 알콩달콩 애인과 밀어를 나누던 때의 모습이 떠올라 홀로 눈물짓게 될 겁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렇게 이제 없어진 것에 대한 집착이 우리를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혀 살도록 만든다는 점 아닐까요.


이미 없어진 것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수 없고 당연히 우리에게 미래도 열릴 수 없는 법입니다. 잊어버린 지갑에 연연할 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의 말이 귀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이별한 애인을 가슴에 두고 있을 때, 새롭게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애인이 눈에 보일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니를 잊지 몰할 때, 탐스럽게 피어난 아름다운 들꽃의 향내가 코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안다고 해도 집착에서 벗어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노력할 겁니다. “잊어야지, 이미 지갑은 내 수중을 떠났으니까.” “잊어야지,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니까.” “잊어야지, 이미 직장은 없어졌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없어진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없어졌어. 그러니까 더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에 없어진 것을 각인시키는 기묘한 작용을 하는 법입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이제야 제자들에 대한 파초 스님의 하염없는 자비심이 보이십니까. 깨달은 자, 그러니까 부처를 꿈꾸는 마음이 강하게 되면, 이제 역으로 자신이 아직 깨달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이런 절망이 다시 부처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게 될 겁니다. 돈이나 권력과도 같은 세속적인 것이든, 아니면 부처나 불성과 같은 탈속적인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집착은 깨달은 자가 가지는 자유와는 무관한 것이니까요. 또한 이렇게 부처에 집착하는 스님에게 상처받고 비참한 중생들에 대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강신주

주장자가 있다는 오만도, 그리고 주장자가 없다는 절망도 모두 집착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파초 스님이 주장자로 날려버리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있다는 오만과 무엇인가가 없다는 절망이었던 셈입니다. 자! 이제 바로 대답해보세요. 당신에게는 주장자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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