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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지수지(俱胝竪指)

기자명 법보신문

같이 손가락 세워도 흉내와 깨달음의 차이는 확연하다

스승 대신 손가락 든 동자
깨달은 사람 흉내 냈을 뿐


걸음 같다는 생각은 관념
사람 걸음은 제각각 달라


본래면목 자각하게 되면
모양 같아도 모방 아니다

 

구지(俱胝) 화상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단지 손가락 하나를 세울 뿐이었다. 뒤에 동자 한 명이 절에 남아 있게 되었다. 외부 손님이 “화상께서는 어떤 불법을 이야기하고 계시나요?”라고 묻자, 동자도 구지 화상을 본따서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방 밖으로 나가고 있는데, 구지 화상은 동자를 다시 불렀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순간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세웠다. 동자는 갑자기 깨달았다.


구지 화상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천룡(天龍)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어서 평생 동안 다함이 없이 사용했구나!” 말을 마치자 그는 입적했다.


 무문관(無門關) 3칙  구지수지(俱胝竪指)

 

 

▲그림=김승연 화백

 

 

1. 동자의 손가락이 잘리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구지수지(俱胝竪指)’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겁니다. 구지 스님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구지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동자에게 스님의 불법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스님을 모시고 있던 동자는 자신의 스승처럼 손가락 하나를 들었던 겁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구지 스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동자를 불러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게 됩니다. 왜 잘랐을까요? 아마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동자는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은 사람의 흉내를 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실현하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제 분명해집니다. 구지 스님의 눈에는 동자의 행동이 본래면목을 실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구심이 들지 않으신가요. 과연 무문 스님은 ‘무문관’의 세 번째 관문을 만들면서 이 정도의 깨달음만을 요구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동자의 손가락을 자른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아직 우리가 세 번째 관문의 핵심에 이르지도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자르니, 동자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동자는 고통과 당혹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님으로부터 몸을 돌려 바로 도망치려고 했던 겁니다. 바로 이 순간 구지 스님이 동자를 부릅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부여잡고 문을 나서려다가 동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자 구지 스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세웁니다. 바로 이 순간 동자는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이 무문 스님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세운 세 번째 관문의 핵심입니다. 동자는 구지 스님의 손가락을 보고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지 스님이 아니라, 동자의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마치 자신이 구지 스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리마저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만족하지 말라는 겁니다. 철저하게 동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동자를, 그리고 그 내면의 극적인 변화를 따라가야만 합니다. 처음에 동자는 앵무새와 같았습니다. 스승이나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를 자기의 이야기인 것처럼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 손가락이 잘렸을 때, 동자는 자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부정되는 경험을 합니다. 절망적인 경험일 겁니다. 그렇지만 뒤이어 바로 구지 스님은 동자를 불러 자신의 손가락을 세워 보입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스님의 손가락을 본 순간, 동자는 깨닫게 됩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그리고 어둠이 밝음으로 극적으로 전환되는 지점입니다. 이제야 동자는 구지 스님의 손가락을 세운 이유를, 그리고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렀던 이유를 알았던 겁니다.


2. 동일한 반복과 차이의 반복

 

진리라도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만이 세 번째 관문의 취지였다면, 우리는 구지 스님이 임종할 때 남긴 마지막 말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겁니다. “나는 천룡(天龍)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어서 평생 동안 다함이 없이 사용했구나!” 헉! 놀라운 일 아닙니까. 구지 스님도 자신의 스승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반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거의 모든 경우에 말입니다. 심지어는 더 살아계셨다면, 계속 손가락을 들어서 중생들을 깨달음에 이끌 기세이기까지 합니다. 동자의 손가락을 잘랐던 이유가 단순히 남을 흉내 내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구지 스님은 왜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일까요? 손가락이 잘린 뒤 스승의 손가락을 보고서 홀연히 깨달음에 이른 동자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자의 흉내 내기와 구지 스님의 흉내 내기를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동자의 손가락은 잘려지고 반면 구지 스님의 손가락은 무사한지가 분명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주저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에서 그는 반복(répétition)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동일자(l’identique)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différence)의 반복’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모든 사람은 걷습니다. 다리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사람, 그러니까 차이가 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걷을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의 걸음은 동일한 걸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차이가 나는 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신은 신발을 보면, 사람들마다 얼마나 걸음걸이가 천차만별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밑창의 헤진 흔적이 아마 그 증거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걸음 일반, 혹은 걸음이란 동일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걷고 있다는 겁니다. 이를 토대로 우리의 관념은 사람마다 차이나는 걸음의 고유성을 제거하고 걸음이란 동일성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지만 누군가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순간, 우리는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될 겁니다. ‘장자(莊子)’라는 책에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고사가 하나 등장합니다. 초(楚)나라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는 조(趙)나라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조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도 익히지 못하고 예전 초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마저 까먹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들뢰즈가 구분한 두 가지 반복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해집니다. 다른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것이 ‘동일자의 반복’이라면,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걷는 것이 바로 ‘차이의 반복’에 해당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흉내 내지 않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기만의 차이를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남을 흉내 내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3. 장미 다 같다는 생각은 착각

 

‘동일자의 반복’과 ‘차이의 반복’은 다릅니다. 동자가 구지 스님의 손가락을 흉내 낸 것이 ‘동일자의 반복’이었다면, 구지 스님이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흉내 낸 것은 ‘차이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흉내 낸 것은 흉내 아닌 흉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야 앞에서 이야기한 ‘본래면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였던 겁니다. 비록 장미로 분류된다고 할지라도, 모든 장미들은 다른 것과는 구분되는 자기만의 본래면목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이 본래면목을 실현하기 때문에 장미꽃들은 그렇게 다양한 모양과 향기로 들판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으로 장미라는 동일성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만이 장미들 각각의 다양성과 고유성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단지 마음의 조작일 뿐인 것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니, 이것은 전도된 생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 이제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살펴보세요. 비록 동일한 사람으로 분류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본래면목, 그러니까 차이를 실현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무문관’의 세 번째 관문에는 손가락이 세 개가 등장합니다. 천룡 스님의 손가락, 구지 스님의 손가락, 그리고 동자의 손가락입니다. 겉보기에는 모두 같은, 그러니까 동일한 손가락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천룡 스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었고, 구지 스님도 자신의 손가락을 들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동자만은 자신의 손가락이 아니라 구지 스님의 손가락을 들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동자의 손가락은 그의 손가락이 아니라, 구지 스님의 손가락이었던 셈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손가락이니까, 구지 스님은 동자의 손가락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동자의 손가락을 자르면서 구지 스님은 동자에게 속으로 외쳤을 지도 모릅니다. “야 임마! 그건 나의 손가락이야! 내가 가져와야겠다! 네 것이 아니니.”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공포와 당혹감에 젖어 있는 동자를 불러 세운 구지 스님은 손가락을 세웁니다. 아마 동자의 눈에는 구지 스님의 손가락이 거대한 암벽처럼 들어왔을 겁니다. 그리고는 암벽이 갑자기 깨져 사라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아! 스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드는구나!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내 손가락을 스스로 들지도 못했구나.” 그렇습니다. 마침내 동자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강신주

지금까지 망각되었던 자신의 차이, 그러니까 자신의 본래면목을 자각했던 겁니다. 자, 바로 지금 손가락을 하나 들어보세요. 천룡의 손가락이나 구지의 손가락도 아닌 바로 자신의 손가락을. 누구도 모방하지 않기에 태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손가락을.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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