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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전참묘(南泉斬猫)

기자명 법보신문

깨달음은 답습되는 통념의 고리가 끊어진 곳에 있다

남전스님이 죽인 고양이는
수행승들의 의심과 집착들


조주 스님, 창의적 행동으로
기존의 통념 경쾌하게 부정


예측할 수 없는 창조적 삶이
무애 자재한 깨달음의 징표

 

남전(南泉) 화상은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전은 마침내 그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그날 밤 조주(趙州)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남전은 낮에 있던 일을 조주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남전은 말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문관(無門關) 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 그림=김승연 화백 

 

 

1.고양이 생사를 제자들에 맡기다

 

깨달았다는 스님이 고양이를 단칼에 잘라버린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합니다. 자비를 표방하는 스님이 거침없이 저지른 이런 잔혹한 행위를 보고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일반 신도들도 지키고 있는 불살생(不殺生)의 계율,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남전(南泉, 748~834) 스님은 아주 헌신 버리듯이 버린 것이니까 말입니다. 도대체 스님은 무슨 이유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일까요. 자신이 제자들로 품고 있던 수행승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당에 거주하던 수행승과 서당에 거주하던 수행승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다투면서 일이 벌어집니다. ‘무문관’에서는 자세한 내막이 나오지 않지만, 다행히도 ‘조당집(祖堂集) 덕산(德山)’장에는 그 전모를 짐작할 만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 사건을 재구성해보도록 하지요.


동당이든 서당이든 어느 한쪽 수행승들이 기르고 있던 고양이가 반대쪽 수행승의 실수로 다리가 부러졌나 봅니다. 문제는 동당과 서당에 속해 있던 수행승들은 평소에 반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한쪽은 우리 대신 우리가 아끼던 고양이에게 위해를 가한 것 아니냐고 분노했고, 다른 한쪽은 실수로 그런 것을 가지고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냐고 화를 내는 형국이었을 겁니다. 상호간의 오해와 불신 속에서 수행승들은 자신의 본분을 자기도 모르게 잃어버리게 됩니다. 깨달음과 자비에 대한 염원은 봄눈 녹듯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승려의 행색은 하고 있지만, 이제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은 저잣거리의 무지렁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스승으로서 남전 스님이 이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제자들이 나중에 엄청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순간 스님은 시퍼런 칼을 들고 다리가 부러진 불쌍한 고양이를 잡아들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사실 남전 스님이 잡은 것은 고양이이라기보다는 고양이를 통해 드러난 수행승들의 온갖 의심과 집착이었던 겁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지니(Genie) 라는 괴물이 마술램프에 들어가는 순간처럼, 지금 수행승들의 온갖 잡념들이 지금 고양이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지니가 마술램프에 들어간 순간, 마술램프의 구멍을 막고 램프를 잡으면 우리는 지니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잡으면서 남전 스님은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의 집착하는 마음들은 한 손 안에 꽉 움켜진 셈입니다. 불쌍한 고양이에게 칼을 겨누면서 스님은 고양이의 생사를 제자들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2. 신발을 머리에 얹고 나가다

 

아무런 말도 없었고, 고양이는 두 동강 납니다. 깨달음의 말,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말 한 마디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고양이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수행승들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마 머리에 떠오르는 말은 모조리 고양이와 그의 생사와 관련된 것이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수행승들에게 집착을 끊으라는 가르침으로 남전 스님은 고양이를 자른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에 대한 수행승들의 집착이 끊어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오히려 다리를 다친 데다 이번에는 목숨까지 잃게 된 고양이에 대한 집착과 회한이 더 크게 일어났을 겁니다. 자신들을 절벽으로 몰아붙이는 남전 스님이 야멸차고 잔인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양이에게 제자들의 집착이 쏠리자마자, 그것을 계기로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려던 남전 스님은 참담했을 겁니다. 수행승들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고, 불쌍한 고양이의 시신만 남겨졌을 테니까 말입니다.


남전 스님이 외출에서 돌아온 조주(趙州, 778~897)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다시 언급한 것도 이런 씁쓰레함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그러자 남전 스님은 고양이의 죽음이 더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고양이가 생사의 기로에 있었을 때 조주 스님이 있었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불쌍한 고양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전 스님은 조주 스님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린” 조주의 행동은 깨닫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우리 눈에는 조주 스님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발을 머리에 얹었다는 것은 조주가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자는 머리에 얹고 신발을 발에 신는 것을 영원불변한 진리이자 규칙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까 결코 신발을 머리에 얹거나 아니면 모자를 발에 신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습득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반면 신발을 머리에 얹음으로써 조주는 신발과 모자와 관련된 기존의 통념, 혹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경쾌하게 부정해버립니다. 이런 부정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맹목적으로 답습되는 통념과 양식에서 자유롭다는 것,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남전 스님이 조주가 깨달았다고 확신했던 이유는 그가 조주의 행동에서 그 자유로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3.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 사이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은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성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skraft)’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모자는 머리에 그리고 신발은 발에 신어야 한다는 기존의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라면, 기존의 규칙을 부정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판단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규정적 판단력이 규칙을 따르는 생각이라면,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을 창조하는 생각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규정적 판단력이 지배되는 사람은 기존 규칙을 따르는 충실한 노예, 혹은 기존 규칙에 집착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반성적 판단력을 수행하는 사람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하는 주인, 혹은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야 죽어가는 고양이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던 수행승들과 고양이 사건의 전말을 듣고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방 바깥으로 나간 조주 스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분명해집니다. 수행승들이 규정적 판단력에 지배되고 있었다면, 바로 조주 스님은 반성적 판단력을 상징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지 않으신가요.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라는 남전 스님의 사자후를 들었을 때, 과연 조주 스님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선불교에 대해 나름 아시는 분이라면 화두를 풀었던 역대 선사들의 대답을 흉내 내어 그럴 듯한 말을 지어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그럴 듯한 대답은 사실 여러분이 지금 규정적 판단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다시 말해 과거에 어디서 배운 것을 약간 변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남전 스님마저도 조주가 어떻게 말할지 예측할 수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것이 남전 스님이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입니다. 이미 조주는 자유롭게 규칙을 창조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어떤 말을 할지, 혹은 그가 어떤 행동을 했을지, 남전 스님도 예측할 수 없고 우리도 예측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남전 스님이 조주가 어떻게 할지 예측했고 그것이 적중했다면, 이것은 조주가 자신의 스승도 예측할 수 있었던 규칙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 아닐까요.

 

▲강신주

그래서 이제 우리는 신발을 머리에 얹었던 조주를 깨끗이 잊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불쌍한 고양이가 어디선가 두 동강 나며 피를 흘릴 테니까 말입니다. 불교에서 꿈꾸는 깨달음의 이상이 무애(無碍, anāvṛti)와 자재(自在, vaśitā)인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깨달음은 우리에게 주인공의 자유를, 마침내 새로운 삶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이기 때문이지요.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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