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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담징과 호류지 금당벽화

기자명 법보신문

호류지 안내판에 ‘담징’ 이름 찾을 수 없는 이유

화재로 손상된 ‘금당벽화’
담징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발굴조사 결과 확신 힘들어


호류지 주변 벽화편 출토로
670년 전소 전 가람벽화는
담징의 작품 가능성 높아

 

 

▲ 호류지 금당 아미타정토도.

 

 

JR나라역에서 전철로 10여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일본 최초의 세계문화유산 호류지(法隆寺)가 있다. 호류지는 일본 아스카(飛鳥) 시대의 정치가·사상가이자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던 쇼토쿠(聖德, 573~621)태자가 아버지 요메이천황(用明天皇)(재위 585~587)의 쾌유를 기원하며 창건한 대사찰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중고교시절 교과서에 자주 등장했던 사찰이기도하고, 우리나라엔 별로 남아있지 않은 초기불교미술작품이 장르를 망라하고 오롯이 남아있는 사찰이어서 불교미술 연구자들에겐 반드시 거쳐 가야하는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특히 호류지의 금당은 고구려 스님 담징(曇徵)의 ‘금당벽화’ 12점이 벽면 사방에 장엄되어 있었던 법당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벽화는 제6호인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이다. 그러나 금당벽화 12점은 1949년 1월 26일 화재로 손상된 채 호류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작품들은 1968년 일본 최고의 거장 14명이 복제해 봉납한 그림들이다.


게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호류지의 어떤 안내판에서도 담징이란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채색법, 종이와 먹을 만드는 법, 하다못해 맷돌의 제작사용법까지 일본에 알려주고, 금당벽화를 친히 그렸다는 고구려 최고의 화가 담징의 흔적이 정작 호류지에는 전혀 없다.


▲와카쿠사가람 출토 벽화편.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호류지의 창건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호류지는 대체로 쇼토쿠 태자가 607년에 발원하여 615년경에 최초의 건물이 건립되고, 628년까지는 거의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담징이 일본에 간 때가 610년이니 그가 일본 최고의 사찰 금당에 벽화를 그렸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670년 4월30일 한밤중에 일어난 큰 화재로 인해 건물이 한 채도 남지 않고 소실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많은 학자들은 19세기 말부터 이 기사를 둘러싸고 수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호류지가 화재 이후 재건되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재건론자들은 일단 ‘일본서기’의 기사를 믿는 입장이기에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겠지만, 비재건론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부정해야 했으므로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오랜 기간 이어져 오다가 1939년 현 호류지 경내의 와카쿠사가람(若草伽藍)이라는 유적을 발굴조사하게 되면서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2007년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는 1968년과 1969년도에 실시했던 조사와 관련해 ‘호류지약초가람적발굴조사보고(法隆寺若草伽藍跡發掘調査報告)’를 간행했다. 조사자들은 고고학적 발굴조사와 과학적 분석의 결과로 ‘일본서기’의 기사 즉 670년에 호류지가 전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그 때 소실된 사찰은 바로 와카쿠사가람이라고 판단하였다. 즉 현 호류지의 금당은 670년 이후에 재건된 것이고, 현 금당에 있던 그러니까 1949년에 화마를 겪었던 벽화들도 610년에 일본에 온 담징이 그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는 631년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호류지 주변지역에 대한 일련의 조사 중 2004년과 2006년에 매우 중요한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와카쿠사가람의 금당을 장식했던 벽화편의 발굴이었다.


나라현 교육위원회는 2004년 12월1일 와카쿠사가람유적의 서쪽에서 7세기 초의 채색벽화편이 출토되었다고 발표했다. 조사지역에서는 백점이 넘는 벽체의 파편이 발견되었으며, 이러한 벽체 편은 점토층 위에 퇴적된 모래층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중 문양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약 20점, 채색된 것이 약 30점 확인되었다. 가장 큰 것이 폭 5cm 정도로 아주 작은 파편들이다.


벽화 편들은 채색한 흙벽이 화재로 인해 고온으로 구워졌기 때문에 도자기처럼 변성되어 수중에서도 녹지 않고 기적적으로 보존되었을 것이다. 나라문화재연구소는 형광X선 분석을 실시해 동이나 철 등 광석 성분을 확인했고, 이 광물질들은 초록이나 빨강의 안료로 판정되었다. ‘일본서기’의 와카쿠사가람 대화재설이 이러한 벽화 편에 의해서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2006년에도 벽화 편 등이 대량으로 확인되었다. 채색흔적이 남아 있는 벽화 편은 약 80점으로, 가장 큰 것이 7cm 정도이고 그림의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새롭게 수목과 같은 문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벽화편의 존재는 와카쿠사가람의 금당 혹은 목탑이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벽화는 누구에 의해서 그려진 것일까?


이 시기 가장 먼저 일본에 건너간 화가는 백제 출신의 인사라아(因斯羅我)이다. 이후 백제에서는 588년 승려·사공·노반박사·와박사와 함께 화공인 백가(白加)를 보낸다. 고구려 또한 백제 못지않게 여러 명의 화가들을 일본에 보내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역시 610년에 파견된 담징이다. 담징은 오경과 불법에 통달한 학승이었고, 동시에 화승이었다.


고구려계 화가로서 담징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은 가서일(加西溢)이다. 가서일은 622년 쇼토쿠태자가 사망한 후 그의 비가 극락왕생을 염원하여 제작한 ‘천수국만다라수장’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이다. 천수국만다라의 명문 끝에 ‘고려가서일’이라고 쓰여 있어 그가 고구려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천수국만다라수장’의 등장인물들은 고구려 복식을 착용하고 있어 가서일을 통한 고구려 회화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7세기 작품들에 보이는 고구려의 영향이나 당시 활약했던 고구려계 화사들의 활약상으로 미루어 볼 때 호류지의 창건가람이라고 할 수 있는 와카쿠사가람의 금당벽화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서 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출토된 벽화 편들은 모두 소형이고, 아직 보존처리가 끝나지 않아서 공개된 유물 또한 극히 제한적이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7세기 초반에 사찰벽화를 그려낼 수 있는 집단은 도래계 화사 외에는 없었다고 볼 수 있고, 특히 담징이라는 걸출한 화가가 도일한 610년을 기점으로 해서 고구려계 화사들의 활동이 갑자기 활발해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와카쿠사가람의 벽화를 담징이 그렸거나 감독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카미요도하이지 벽화편-연화문.
그리고 일본의 사찰벽화와 관련해서 호류지나 와카쿠사가람과 더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카미요도하이지(上淀廢寺)에서 출토된 벽화이다. 카미요도하이지는 일본 돗도리현(鳥取縣)에 7세기 무렵 건립되었던 사찰유적으로 발굴조사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5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유적에서는 금당과 탑지가 확인되었으며, 부속 건물지도 다수 발견되었다. 금당의 동쪽에 남북으로 2기의 탑지가 있고, 또 다른 1기의 탑지가 그 옆에 조성되어 있는 독특한 가람배치로 주목 받아온 유적이다. 탑지에서 주목할 부분은 기단부인데 기와를 이용한 와적기단을 사용하였다. 일본에서 와적기단을 사용한 사찰은 대부분 도래계 씨족이 관계된 사찰로 여겨지는데, 역시 와적기단이 발견된 교토의 고마데라(高麗寺)도 고구려계 고마씨가 단월로 참가한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카미요도하이지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류, 철제품, 그리고 소조상이나 벽화 등 귀중한 자료가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금당지에서는 소조불상의 파편과 함께 채색된 벽화편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는 전형적인 고구려 문양이라고 여겨지는 연화문 벽화편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연화문은 광개토왕릉 출토 기와를 비롯해 무용총과 장천1호분 그리고 호류지의 옥충주자 등 고구려의 미술품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카미요도하이지의 벽화를 그린 사람들도 아마 고구려와 관련이 깊은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카미요도하이지에서 보이는 고구려의 영향은 사찰의 입지조건과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되는데, 사찰이 위치한 구릉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현재 사찰 아래쪽에 펼쳐져 있는 요도에(淀江)평야도 과거에는 포구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의 문화는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수도와 상관없이 대륙에서 들어온 새로운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된다.

 

▲임석규 실장
2008년 가을 와카쿠사가람에서 출토된 벽화 편들을 볼 수 있다는 전언을 듣고 불원천리 달려간 박물관에는 매우 작은 파편 10점만이 전시되고 있었다. 낙심천만이었지만, 사진을 찍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하나가 있었다. ‘지금 나는 고구려 최고의 화승 담징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거 좀 비현실적인 것 같은데…’ 그때 가슴 뛰던 느낌이 새삼스럽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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