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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전백수(庭前柏樹)

기자명 강신주

카르페 디엠!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은
과거 기억에 대한 집착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는
활발발 살아있는 순간의 마음


달마 스님이 훌륭해도
집착하면 자유는 사라져

 

어느 스님이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라고 묻자,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 

무문관(無門關) 37칙 / 정전백수(庭前柏樹)

 

 

▲ 그림=김승연 화백

 


1. 알라야 의식은 과거의 기록

 

히말라야(Himalaya)를 아시나요. 에베레스트를 정점으로 해서 8,000 미터가 넘는 수많은 고봉들을 품고 있는 장대한 산맥입니다. 만년설을 가득 품고 있는 장관을 보다보면, 정말 철학자 칸트가 말한 숭고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경험하게 됩니다. 거대한 폭포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변에서 느끼는 압도감이 바로 숭고(das Erhabene)의 느낌이지요. 히말라야라는 단어는 불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안겨줄 겁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생각해보면, 히말라야는 힘(him)이라는 어근과 알라야(ālaya)라는 어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힘이 눈[雪]을 의미한다면, 알라야는 저장[藏]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중국 승려들은 히말라야산맥을 한자로 설장산(雪藏山)이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눈을 가득 저장하고 있는 산, 즉 만년설을 가득 품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지요.


중관불교(中觀佛敎)와 함께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던 불교 전통을 아시나요. 바로 유식불교(唯識佛敎)입니다. 이 유식불교에서 ‘알라야’라는 개념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유식불교는 인간의 가장 심층에 있는 의식을 바로 ‘알라야 의식(ālaya-vijñāna)’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의 가장 심층부에는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것이 일종의 무의식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볼까요. 고기를 구워 먹는 음식집에 들려 식사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냄새가 옷에 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면 짙은 향수를 뿌린 여성과 밀폐된 공간에서 환담을 나누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옷에 배어 낭패를 보는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그 삶의 흔적은 몸에 밴 냄새처럼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것이 알라야 의식입니다.


유식불교에서 알라야 의식을 중시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심층 의식이 ‘나라는 집착’, 그러니까 아집(我執, ātma-graha)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렇지 않나요. 보통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사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불행한 사고로 손을 잃은 사람이나, 혹은 정치적 사건으로 권력을 잃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손이 있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혹은 권좌에 있었을 때 존경받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알라야 의식이 작동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은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당연히 그는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삶에 주어진 것에 ‘있는 그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겁니다. 유식불교가 알라야 의식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울 때에만 우리는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 주어진 삶을 주인으로서 당당히 살아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2. 과거 기억과 단절해야 해탈

 

유식불교에서는 말합니다. 과거와 단절해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직 그 순간 해탈이란 대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무문관’의 37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가 대충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37번째 관문을 지키고 있는 스님은 바로 조주(趙州, 778~897)입니다. 제자 한 명이 스승 조주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 여기서 달마(達磨)는 중국에 선종(禪宗)의 기풍을 가져와서 첫 번째 조사로 추앙되는 남인도 출신의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 ?~528 혹은 536)를 가리킵니다. 조주 스님의 제자는 얼마나 야심만만합니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면, 이미 스스로 조사가 된 것이니까요. 한 번에 깨달음에 얻겠다는 조바심도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조주 스님은 너무나 쿨하게 말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무문관’의 능숙한 가이드인 무문 스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화두를 마무리합니다. 그렇지만 ‘조주록(趙州錄)’을 보면 조주 스님과 그의 제자 사이에는 대화가 더 이어집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어쩌면 무문이 생략한 부분이 더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제자는 말합니다. “화상께서는 경(境)으로 보여주지 마십시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말합니다. “나는 경(境)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스승으로부터 다짐을 받자 제자는 이제 제대로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다시 물어봅니다.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주 스님은 대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어떻습니까. 느낌이 조금 다르지요. 무문이 생략한 대화에서 핵심은 아마 ‘경(境)’이라는 개념에 있을 겁니다. 경은 인식 대상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비사야(viṣaya)의 번역어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결정적인 지점은 바로 이 ‘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지요. 제자가 잣나무를 자신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뜰 앞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로 이해하고 있지만, 스승에게는 잣나무는 자신의 마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조주 스님에게 있어 잣나무는 후설의 용어를 빌리자면 노에마(noema)였던 것입니다. 사실 잣나무가 마음에 들어온다는 것은 마음의 활발발(活潑潑)한 작용, 그러니까 노에시스(noesis)가 작동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하면서 조주 스님은 살아있는 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노에마를 지목한다는 것 자체가 노에시스를 암시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3. ‘지금 바로 여기’가 깨달음

 

더 숙고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뜰 앞에 펼쳐져 있는 잣나무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만일 어제 읽던 경전의 내용이나 아침에 제자와 나누었던 대화에 마음이 가 있었다면, 조주 스님의 눈에 잣나무들이 들어왔을 리 없을 겁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 조주 스님의 마음은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은 마음, 즉 자유로운 마음 아닌가요. 불행히도 제자의 눈에는 여전히 잣나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만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 자신의 스승이 선불교 특유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대화법을 사용한다고 짜증까지 내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200여 년 전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승은 자꾸 “뜰 앞의 잣나무!”만을 외치고 있으니 어찌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무문관’의 37번째 관문이 생각보다 난해하지는 않으시지요. 그렇습니다. 조주 스님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면, 제자의 마음은 200여 년 전 달마 대사에게로 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여여(如如)하게 사태를 보세요. 달마 대사는 단지 제자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아닌가요. 물론 제자가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려고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안다면, 자신도 달마처럼 혹은 스승 조주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자는 지금 자신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알라야의식을 끊어내기는커녕 그것을 강화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스님이 되기 전, 아니면 스님이 된 후에, 책이나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달마 이야기가 어느 사이엔가 그의 내면에 지울 수 없는 기억, 즉 알라야식이 되어버린 겁니다.


알라야의식은 끊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과거나 기억에 매몰되어 있는 마음을 극복한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아있는 마음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혹은 달마 대사의 가르침이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운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제2의 싯다르타나 제2의 달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강신주

무문 스님이 “조주가 대답한 것을 자신에게 사무치게 알 수만 있다면, 과거에도 석가가 없고 미래에도 미륵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지금 바로 여기’에 살아있는 마음,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가 확연히 드러날 때, 우리 자신이 이미 석가이자 미륵처럼 깨달은 사람이 되어 있는 겁니다. 기억 나시나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영화에서 키팅(John Keating)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역설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잡아라!”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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