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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열반지 쿠시나가르 - 상

기자명 법보신문

열반으로 보이신 위대한 가르침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하지만
아쇼카왕도 공양한 열반 성지
이슬람 침략 후 폐허로 변해
19세기 열반상 등 발굴되며
전 세계 불자들 발길 이어져


“무아 깨닫는 것 최상의 공양”
붓다의 가르침은 생생하지만
꽃 한 송이 올리는 손길 위로
스승 잃은 슬픔 진득이 쌓여

 

 

▲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지나니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나는 방일하지 않았으므로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쿠시나가르 열반당 안에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댄 채 사자처럼 발을 포개고 누워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열반상이 조성돼 있다. 열반은 부처님께서 보이신 위대한 진리의 증거인 동시에 정진하라는 경책이다. 그 앞에 손 모으고 머리 조아린 우리는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할 마지막 말은 이렇다.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지나니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나는 방일하지 않았으므로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부처님이 눈을 감자 등불이 꺼졌다. 깊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붓다께서 열반에 드셨다. 바이살리를 떠나 반다 마을을 지나 하티마을, 암바마을, 잠부마을, 보가마을을 거쳐 파와에 도착한 석가모니부처님은 이곳에서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병을 얻었다. 춘다의 집을 나서 채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심한 설사 증세를 보이셨다. 땀과 피가 엉겨 붓다의 맨발을 흥건히 적셨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쿠시나가르에 이르러 두 그루 살라나무 아래에 누우셨다. 그곳이 이 세상 마지막 휴식처, 대열반의 장소가 되었다.


바이살리에서 쿠시나가르까지 버스로 약5시간, 직선거리로는 100km가 조금 더 된다. 하지만 세수 여든의 부처님께서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걸어갔을 이 길은 고되고 고된 길이었을 것. 그 마지막 여정을 뒤따르니 늦은 밤 쉼 없이 달리는 차창 밖으로 슬픔이 어둠처럼 내려 쌓인다.


쿠시나가르는 작디작은 도시다. 도시라는 표현도 어색한 보잘 것 없는 시골에 불과하다. 부처님 재새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아난다 존자가 참파나 라즈기르, 사와티나 사케다, 코삼비나 바라나시 같은 큰 도시에서 열반하시라 부처님께 청하였을까.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대열반에 드셨다. 왜일까. 쿠시나가르로 향하는 내내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흙길을 달려 도착한 쿠시나가르. 지난밤의 흙먼지를 털어내고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열반당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쿠시나가르의 어린 상인들은 하얀 연꽃 몇 송이를 손에 들고 길가 곳곳에서 순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서 부처님께 공양할 연꽃 두 송이를 샀다.


니르와나템플로 불리는 열반당은 옅은 아침 안개에 쌓여있다. 부처님께서 당도하셨을 때 살라나무숲엔 때 아닌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진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숲이라기보다는 잘 정리된 정원에 가깝다. 곳곳에 큰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저 나무들이 모두 살라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안개 속에서 이제 막 얼굴을 내미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열반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북으로 길게 만들어진 열반당은 건물 정면과 측면에 각각 둥근 창문이 있고 그 아래로 건물을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이 서 있다. 그 모양이 예전에 보았던 아잔타석굴의 26호굴과 비슷하다. 하지만 규모나 조각의 정밀함, 예술성은 아잔타에 미치지 못한다. 1927년 미얀마 불자의 보시로 지은 것을 1956년 인도 정부가 수리한 것이다.


열반당 뒤편에는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높이 55m의 대열반탑이 있다. 이 탑 역시 발굴 당시 심하게 훼손돼 있던 것을 미얀마 스님들이 1927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고 증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상 신축이나 다를 바 없다. 1900년대 이전까지도 이곳은 그저 황량하고 허물어진 유적지에 불과했다.


4세기 초 이곳을 방문했던 중국의 법현 스님은 “성의 북쪽 쌍수 사이 희련하(希連河. 히라냐바티) 가에 세존께서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반열반에 드신 곳과 수밧타가 최후에 득도한 곳, 금관에 모신 세존을 7일간 공양한 곳, 금강역사가 금강저를 놓은 곳, 여덟 왕이 사리를 나눈 곳들”에 모두 탑과 승원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 열반당은 1956년 인도정부가 보수했다.

 


200여년 후 이곳에 도착한 현장 스님은 “벽돌로 만든 큰 정사 안에 여래의 열반상이 있다.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워 있다. 옆에 아쇼카왕이 세운 스투파가 있다. 기단은 허물어져 기울고 있으나 높이는 아직도 200여 척(약65m)이 된다. 옆에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여래가 적멸(寂滅)한 사적이 적여 있는데 글은 있으나 적멸한 날짜는 적혀 있지 않다”고 묘사 했다.


그러나 8세기 신라 혜초 스님이 당도했을 때 쿠시나가르의 모습은 다소 변해 있었다.


“성은 이미 황폐해져서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자리에 탑을 세워 두었는데 스님 한 분이 그 곳을 청소하면서 물을 뿌리고 있다. 해마다 팔월 초파일(설일체유부의 율장에 남아있는 부처님 열반일)이 되면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도인과 속인들이 탑 있는 곳에 모여 크게 공양을 베푸는 행사를 치른다.…탑 주위 사방으로 사람이 잘 가지 않는 곳에 거칠게 우거진 숲이 있다. 탑으로 예배를 하러 가는 자들이 무소나 호랑이에게 해를 입기도 한다고 한다.”


기록을 차근차근 정리해보면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이 세운 탑을 비롯해 4세기 초까지 쿠시나가르 곳곳에는 탑과 사원이 있었다.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 후 7세기가 되기 전 열반상을 모신 열반당이 지어졌고 아쇼카왕이 세웠던 탑 역시 그 사이 제법 크게 증축됐으나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8세기에 이르러 쿠시나가르는 인적이 드문 숲으로 변해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가 되었고 아쇼카왕이 세운 탑만이 스님들에 의해 근근이 관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열반일에는 불자들이 모여 법회를 보았지만 평소에는 적막할 뿐이었다.


이후의 역사도 쓸쓸하고 가슴 아프긴 마찬가지다. 인도의 다른 불교성지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열반성지도 12세기 말 이슬람교도들의 침입 때 크게 훼손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쿠시나가르가 다시 주목 받은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다. 1838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직원 부케넌이 방문한 이후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해 1876년 커닝햄의 조수였던 칼레일이 이곳에서 약 1.5km 동쪽에 있는 히라냐바티 강바닥에서 심하게 훼손된 열반상을 찾아내며 세간의 이목이 모였다. 그리고 1911년 열반당 뒤쪽에서 범어로 ‘대반열반’이 새겨져 있는 동판과 ‘열반사’라고 새겨져 있는 도장, 그리고 두 그루 살라나무 아래 석관이 놓여있는 문양의 도장이 발견되며 이곳이 부처님의 열반지였음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 열반당에 모셔져 있는 열반상은 히라냐바티 강바닥에서 발견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발견 당시 열반상은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파손돼 있는 상태였다. 그 조각들을 주워 모으고 1956년 불멸 2500년을 기념해 미얀마 불자들이 개금했다.


열반당 안은 이미 발 딛을 틈이 없다. 스리랑카, 대만, 인도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불자들까지. 모두 열반에 드신 부처님 주위로 몰려들었다. 마치 부처님께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 찾아온 천신들 때문에 살라나무숲이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찼던 것과 같다. 천신들이 덩치 큰 우파와나 비구에 가려 붓다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탄했듯 열반당 안에 가득한 불자들 때문에 열반상을 보기가 쉽지 않다. 한참을 기다리고 약간의 ‘비집기’를 감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열반상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대열반. 한 없이 평온한 부처님의 얼굴. 그때까지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연꽃 두 송이를 열반에 드신 부처님 머리맡에 놓았다. ‘이게 뭐라고.’ 문득 허무함이 밀려왔다.


부처님께서 살라나무 아래 누우시자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이 모습을 보고 아난다 존자가 “살라나무도 부처님께 공양올린다”고 말하자 부처님께서는 “꽃을 뿌린다고 여래에게 공양하는 것은 아니다”며 여래에게 올리는 최상의 공양을 말씀하셨다.


“아난다, 사람들이 스스로 법을 받아들여 법답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나’와 ‘나의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여래에게 올리는 최상의 공양이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처럼 선명하다. 하지만 열반당으로 향하는 내내 손에는 꽃이 꼭 쥐여있었다. 내가, 내 꽃을 공양 올리겠다는 마음으로 열반당에 들어서고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어디에 있었는가. 과연 지금 법답게 행동하고 있는가. 나와 나의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했는가. 최상의 공양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열반상 대좌에는 세 명의 사람이 조각돼 있다. 마지막 공양을 올린 춘다,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밧타, 그리고 부처님의 발아래서 슬퍼하고 있는 아난다 존자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춘다와 수밧타가 아니라 코살라국의 왕비 말리카와 이 열반상을 기증한 하리말라 스님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리말라 스님은 5세기 굽타왕조 시대의 스님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열반상 기단에는 ‘마하비하라 하리말라 스님의 기금으로 딘(조각가 이름)이 조성한 것’이라 새겨져 있다. 역사 속 어느 인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쓰러져 슬퍼하던 당시의 사람들, 그리고 부처님의 열반을 지키며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지니 게으름없이 정진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던 장로들, 그리고 아무리 참고 이기려 해도 슬픔을 감출 수 없었던 아난다 존자의 모습 속에 부처님의 열반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모든 가르침을 담고 있는 듯하다.

 

 

▲ 열반당 앞에는 사원 유적이 즐비하다.

 


부처님의 열반은 피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무엇이 급해 이리 빨리 멸도에 드시는가’라며 항의도 하고 ‘세상의 눈이 너무 빨리 닫힌다’며 통곡도 했다. 부처님의 열반을 받아들일 수 없었음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이루신 후 부처님께서는 줄곧 말씀하셨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진리의 법칙에 예외란 없다. 부처님의 육신이 갖고 있는 생명도 영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생명이 언젠가는 끝나고 말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평범한 범부들이 하물며 깨달음을 이루신 분, 붓다의 열반을 어찌 선뜻 납득할 수 있었을까. 땅을 치는 통곡은 차라리 당연하다. 하지만 붓다는 그 스스로 열반에 듦으로써 진리의 위대함을 보이셨고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주셨다. 슬픔 속에서도 정신을 가다듬고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아라한의 모습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래도 슬픔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승을 잃은 이의 방황이요, 다시는 붓다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그리움이요, 여전히 배울 것이 남아있다는 아쉬움이다. 고개 숙인 아난다 존자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이제 일어서야 한다. 열반상에 예배하고자 뒤에서 기다리는 불자들의 눈길이 따갑다. 아무도 채근하거나 불평하지는 않지만 모두들 이 앞에서 예배하고 싶을 것이다. 배워야 할 것은 여전히 많지만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부처님의 얼굴은 변함없이 평안하다. 대열반의 가르침은 계속되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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