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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운문시궐(雲門屎橛)

기자명 법보신문

숭배하는 것이 없을 때에만 스스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운문스님 마른 똥막대기는
마음 속 우상 타파의 죽비


부처를 숭배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부처되라는 사자후


기독교는 신이 될 수 없지만
불교는 사람이 神될수 있어

 

어느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운문(雲門) 스님은 “마른 똥 막대기”라고 말했다.

무문관(無門關) 21칙 / 운문시궐(雲門屎橛)

 

 

▲ 그림=김승연 화백

 

 

1. 불교, 神 숭배 초월종교와 달라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종교로 기독교와 불교를 언급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불교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는 평가입니다. 근본적으로 불교는 신과 같은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초월종교와 함께 분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는 내재종교입니다. 초월(transcendence)이 우리의 삶과 세계를 넘어서는 곳을 지향한다면, 내재(immanence)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세계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내재종교에 따르면 이 세계 자체가 극락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는 겁니다. 당연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입장, 이것이 내재종교가 초월종교와 다른 지점입니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에서 인간이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불교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신이나 예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심판의 대상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사후에 심판을 거쳐야 간신히 허락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사정은 다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현재 살아가는 삶에서 우리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돌아보세요. 사찰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보고 스님들이 간곡히 기원하던 말이 무엇이었던가요. “성불하세요!” ‘성불(成佛)’! 그렇습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 주인공처럼 당당한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부처니까 말입니다. 집착으로 고통과 불만족에 시름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집착을 끊은 부처로서 살 수도 있는 겁니다.


초월종교에서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신이 완전, 행복, 전지전능, 순수, 고귀함, 권력 등등의 가치를 상징한다면, 인간은 불완전, 불행, 무지, 무능, 타락, 저열함, 무능 등을 상징하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나약하고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으니까 신에게 의지한 채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불교도 초월종교가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108배를 바친다거나 불상에 기원하는 경배 행위를 불교에서도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불상으로 상징된 수많은 부처들은 나와 다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지 않다면, 그런 경배 행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불교가 기독교와 함께 우리 사회를 양분하는 초월종교라는 오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2. 불교의 경배행위는 일종의 방편

 

우리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 삶의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합니다. 그렇지만 이 순간 우리는 속으로 다짐합니다. 언젠가 나도 저분처럼 스스로 삶을 냉철하게 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상에게 예배하는 행위는 이런 의미가 아니면 어떤 가치도 없는 행위입니다. 성불할 때까지, 그러니까 자신이 부처가 될 때까지 부처가 되었던 사람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찰에 가면 싯다르타 이외에 너무나 많은 불상이 있습니다. 그 불상들은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던 사람들을 기리는 것입니다. 미륵(彌勒)이란 부처도 사실 치열한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 인도 사람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너무 존경이 커서 그런지, 혹은 스스로 너무나 보잘 것 없다고 좌절해서 그런지, 일반 불교 신도들은 미륵을 마치 신처럼 생각하고 의지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불교 신도들은 불상에 대한 경배 행위를 통해 기독교도가 그렇듯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합니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부처에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성불할 수가 없습니다. 당당한 주인공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바로 부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부처가 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감당하기 힘들다면, 그나마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도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불교에서의 경배 행위는 일종의 방편(方便, upa-ya)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반대로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발원한 스님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 당당히 나아가려는” 치열한 구도 정신을 버리고 과거의 부처에 의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제야 ‘무문관(無門關)’의 21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를 모두 갖춘 것 같습니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대한 운문(雲門, ?~949) 스님의 대답은 차라리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마른 똥 막대기(乾屎)!” 부처가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추한 ‘마른 똥 막대기’라니, 운문 스님은 지금 미친 것일까요. 바로 이 대목이 여러분이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성스러운 부처에 모욕을 가하는 운문 스님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지금 운문 스님은 사찰에 모신 황금불상, 그러니까 도금한 불상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황금만큼 똥색이 나는 것도 없으니까요. 아마 제자는 위엄이 넘치며 심지어 화려하기까지 한 황금불상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자신도 저런 부처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나 봅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깨달았던 사람이 높아 보이면, 현재 수행하고 있는 자신이 낮아 보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처가 되는 것이 너무나 먼 일로 보여서 절망하게 됩니다. “마른 똥 막대기!” 지금 운문 스님은 제자의 숭배대상을 똥통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숭배하는 것이 없을 때에만, 제자는 스스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3. 다른 것 숭배하면 주연 아닌 조연

 

운문의 우상파괴는 과거의 부처들을 숭배하느라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제자를 깨우려는 사자후였던 셈입니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고 발원한 놈이 다른 놈을 흉내 낸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금 운문의 제자는 주인공, 그러니까 주연의 자리를 버리고 조연을 선택하려고 했던 겁니다. 다른 것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인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조연의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그만큼 깨달음과 해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깨달음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아는 것이고, 해탈은 조연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운문 스님은 지금 자신의 제자가 초월종교와 내재종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겁니다. 평범한 불교 신도가 되는 속박의 길과 스스로 부처가 되는 해탈의 길, 그 갈림길 사이에 제자는 서 있었던 겁니다.


“마른 똥 막대기!”라는 호통으로 운문 스님은 평범한 신도가 되는 길, 그러니까 초월종교로 가는 길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운문이 얼마나 그의 제자를 사랑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이제 제자에게는 스스로 부처가 되는 해탈의 길, 즉 내재종교로의 길만이 남겨진 셈입니다. 이처럼 초월종교인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내재종교입니다. 초월종교는 인간을 조연으로 만들지만, 내재종교는 인간을 주연으로 긍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과연 불교만의 생각일까요. 위대한 정치철학자 바쿠닌(Mikhail Bakounin, 1814~1876)도 자신의 주저 ‘신과 국가(Dieu et l’E´tat)’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적이 있으니까요.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성과 정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인간들을 명실상부한 노예 상태로 이끈다.” 아마 바쿠닌이었다면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보고 “녹슨 쇳덩어리”라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숭배 대상이 파괴되어야,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녹슨 쇳덩어리”라고 바쿠닌이 외쳤다면, 교회나 성당에서는 난리가 날 것입니다. 바쿠닌은 이단이나 사탄의 취급을 받고 화형에 처해질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이를 수 없는 절대적인 초월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는 운문 스님이 파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교가 아무리 초월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내재종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21번째 관문을 지나다보니 젊은 시절 어느 사찰에서의 경험이 떠오릅니다. 당시 패기만만했던 저는 어느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강신주

 “불상에게 경배한다면, 불교가 어떻게 기독교와 달라지겠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미소를 띠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불상은 선생님이 되어야 할 모습이니, 경배한다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셈입니다. 노스님이 살아 계신지 궁금해집니다. 이제 스님께도 제대로 경배하고 싶으니까요. 합장!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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