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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주지 일선 스님

계율이 스승, 칼끝 위를 걷듯 한치의 틈도 주지 말라

언어 사유 속에서 길 잃고
중학교 때 송광사로 출가
서암 스님 시봉하며 정진


천지 무너지는 희유한 체험
서암·경봉, “공부해라” 일침
훗날 알고 보니 ‘식광’일 뿐

 

 

▲일선 스님

 


‘가난과 영화는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뜻대로만 되리요/ 나는 내 멋대로 유유히 지내왔노라/ 고향 하늘 바라보니 천리길 아득하고/ 남녘을 떠도는 내 신세 허망한 물거품/ 술잔을 비삼아 쌓인 시름 쓸어버리고/ 달을 낚시삼아 시를 건져올리네/ 보림사와 용천사를 두루 돌아보니/ 속세 떠난 한가함이 비구와 한가지라’


희대의 묵객 김병연. 스스로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며 삿갓 쓰고 길 떠난 지 30여년. 화순 땅에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찾은 보림사에서 그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술잔을 비삼아 쌓인 시름’을 한 순간에 쓸어버린 그가 ‘달을 낚시삼아 시를 건져’올리며 ‘속세 떠난 한가함이 비구와 한가지라’하지 않는가! 동부도군 앞에 서 있는 시비에 투영된 그의 심상이 길손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어쩌면 김삿갓은 여기서 진정 쉴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 일주문이 또 다른 애환으로 다가온다. 도의 국사의 3대손인 보조 체징 선사가 개창한 이 도량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50여 동의 전각이 펼쳐져 있던 대찰이었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가지산에 집결하며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다. 그 때까지도 보림사에 별다른 탈은 없었다. 공산군 유격대가 떠난 직후인 봄, 군경토벌대가 이내 도착해 불을 질렀다고 한다. ‘공비들이 머문 본거지였다’는 게 이유였다. 그나마 남아있던 20여 동의 전각이 거의 불탔다. 일주문과 사천왕만이 영욕의 순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림사는 이 때부터 세간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보림사가 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건 1990년 중반 들어서서다.

 

 

▲동부도군 앞에 세워진 김병연의 시비. 김삿갓은 보림사에서 무엇을 건져 올렸던 것일까.

 


하지만 보림사는 지난 해 새로운 주지 일선(一善) 스님이 부임하며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선종사찰로서의 면모는 물론, 템플스테이 등의 수련회와 ‘한중일선차대회’를 열며 대중과 함께 거듭나기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첫 걸음은 힘차다.


일선 스님의 고향은 제석사가 자리하고 있는 전남 고흥. 초등학교 6학년 때 의문이 일었다. ‘연필이라 하는데 왜 연필이어야만 할까? 심이 없어도 연필일까? 찻잔은 차를 담아내는 일만 해야 하는 것일까?’ 보통의 초등학생이 가져 볼만한 의문은 분명 아니다.


중학교 2학년. 숨을 쉬다가 ‘호흡’이라는 단어에 몰두했다. ‘한 번 들이마신 숨, 그대로 내 뱉지 못하면 죽는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여름까지 이어진 이 의문에 대해 누구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는 핀잔도 모자라 ‘단단히 미쳤다’는 비난까지 들었다. 언어를 통해 사유의 폭을 넓혔던 그가 언어에서 길을 잃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학교를 그만뒀다.

 

▲1951년 봄, 군경토벌대가 일으킨 화마에도 일주문은 살아남았다.

 

 

송광사로 향했다, 법흥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일선 스님은 그 곳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구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던 그날, 즉석에서 큰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계를 받았는데 흔적이 없습니다.” 사미승치고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법거량’이 아닐 수 없다. 구산 스님이 일렀다. “강원으로 가라!” 송광사에서 도망치다시피 나왔다. 자신이 품고 있었던 생사문제가 경전을 통해서는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스님의 발걸음은 어느덧 봉암사로 향했다. 당시 조실은 서암 스님. 당시 혜국, 적명, 현기 스님 등 기라성 같은 구참 스님들이 즐비했다. 막내였던 일선 스님은 다각 소임을 보며 첫 안거를 보냈다. 그 인연으로 조계종 전 종정 서암 스님을 3년이나 시봉했다.


청화산 원적암에서 서암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던 어느 날,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희유한 체험을 했다. ‘무’자 화두가 깨졌다고 단언하며 그 일을 큰 스님에게 고했다. 서암 스님의 일성이 떨어졌다. “아니다. 공부 더 해라!” 하지만, 참으로 역력했다. 산도, 암자도, 심지어 시간도 사라진 듯 했다. 천지와 내가 하나인 듯해 덩실덩실 춤이라고 추고 싶었다. 이러한 체험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서암 스님은 더 공부해라 했지만 뭔가 건져 올린 것만 같았다. 통도사 경봉 스님을 찾아갔다. 점검을 마친 큰 스님이 일렀다. “아직 멀었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큰스님들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선 스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식광(識光)이었습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무서운 경계입니다. 여기서 헤매면 ‘착각도인’된다는 걸 한참 후에나 알았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것조차도 모르거나, 타인의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의 전후생이 보이기도 하고, 공중부양은 물론, 시뻘겋게 타오른 화로를 만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착각, 바로 그 경계에 빠지는 현상을 일러 ‘식광’이라고 한다. 마장이다. 일선 스님은 어떻게 벗어났을까?


“병 속의 새를 꺼내면서 그나마 헤어날 수 있었습니다.”

 

수련회 지도법사로도 명성
수행자 본모습 보여 ‘지도’ 


‘금사슬’ 풀기 위한 정진 절실
자신과 세계 바꾸고 싶다면
이웃부터 내몸처럼 아껴야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 체징선사 부도탑비가 말없이 경내를 응시하고 있다.

 


서울 법련사 한 강연에서 이 문제를 접한 순간 ‘나는 꺼냈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병 속의 새’라면 병을 깨뜨리지 말고 새를 온전하게 꺼내 보라는 문제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다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선입관을 버리고 굳이 따져 보면 내버려 둬도 나올 수 있다. 병의 입구가 꼭 새의 몸집보다 작다는 전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물론 이런 식의 풀이는 알음알이일 뿐이다. 나름대로의 직관, 선관이 뚜렷하게 발현되어야만 일갈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어떻게 풀었는지는 여쭈어 볼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날 이후 스스로 식광에서 벗어났음은 물론 더 큰 정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법흥, 구산, 서암, 경봉 큰스님의 가르침이 컸습니다. 그 때 ‘더 공부하라’는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다면 평생 허튼 경계에 사로잡혀 허송세월 보냈을 겁니다.” 일선 스님은 누구보다 서암 스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빨래, 방 청소 한 번 저에게 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손수 다 하셨지요. 심지어는 밥을 지어놓고 기다리신 적도 있습니다. 제가 하겠다고 나서도 스님은 한결같이 ‘공부하라’며 마다하셨습니다.”


수행의 길이 힘겹거나 마장이 일어날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렸다. 단순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해태심이 일어날 때마다 아픔으로 고통 받던 어머니를 뒤로하고 수행한다는 핑계로 떠났던 것을 생각하면 천 개의 창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합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 정말 큽니다. 여기에 말없이 보내 주신 은혜까지 더해졌습니다. 그 은혜 갚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분심’을 일으켰음을 고백하고 있음이다.


일선 스님은 수련회 지도법사로서의 명성이 자자하다. 1990년부터 송광사 여름수련회를 10여년 동안 지도하며 세상 사람들을 무아의 세계로 안내했다. 보림사 주지를 맡기 직전까지도 거금도 송광암과 금천선원에서 수련회를 이끌었다. 스님의 지도를 받고자 대중들이 남해의 외진 섬까지 찾았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저는 누구를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좌선하는 법을 일러주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제가 그 분들 덕에 힘입어 더욱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의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수련회 지도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리 하라, 저리 하라’ 이전에 지도 법사 자신이 올곧게 보여주는 게 가장 큰 가르침 아닌가. 대중들은 일선 스님의 선기와 덕성에 이끌려 거금도를 찾았을 것이다. 일선 스님은 ‘자신’과 만난 인연 도반들이 지금은 물론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 정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전했다.


“태평양으로 떠났던 연어도 거친 물살을 거슬러 다시 돌아오는 것은 떠났던 자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본래 고향인 자기 마음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입니다. 이 일에 출가자와 재가자, 남녀노소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본래 부처’라는 말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 믿음이 굳건하게 서지 않은 수행은 과녁 없이 화살만 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 역시 이 믿음이 부족해 각종 마장에 휘둘리며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믿음이야말로 ‘도의 근원이며 일체 공덕의 어머니’라 한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잘 새겨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함부로 깨달았다고 스스로 단언하며 수행을 멈추는 건, 너무도 위험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의 습기도 무섭습니다. 한 순간 업력에 이끌릴 경우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정진의 힘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를 스승으로 삼으며, 칼날 위를 걷듯이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아야 합니다. 깨달았다는 건, 미혹의 쇠사슬은 벗어났지만 오히려 ‘금사슬’에 다시 묶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눈과 귀를 멀게 해 크게 죽어서 보통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선지식이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어머님께 드릴 선물조차 하나 없다’고 했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일선 스님은 ‘자신을 혁신시키고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고 싶으냐’고 반문하며 그렇다면 ‘모든 이웃과 자연을 내 몸처럼 아껴야 한다’고 했다. 대승보살의 삶을 통해서 일체 상을 없애면 대자비심이 발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꽃잎은 물 따라 흐르지만, 물은 뜻 없이 꽃잎을 흘려보냅니다. 물은 담연상적(湛然常寂)하여 모양이 없기에 모든 형태에서 자유롭고 머물지 않아 끝내는 바다에 이릅니다. 보림사 앞을 흐르는 탐진강도 결국 남해 도암만으로 흘러 바다와 하나가 되지 않습니까!”


일선 스님은 노파심에서인지 사족이라며 ‘강물 맛’과 ‘바닷물 맛’은 다르니 강물 맛 한 번 보고 바닷물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초중학교 때 가졌던 의문은 풀었는지 여쭈어 보았다. 환한 미소를 보인다.


“한때 무성했던 잎들이 떨어져 뿌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생멸 그대로가 적멸이기 때문입니다.”


물(水)의 흐름(去)이 곧 법(法)이라 했던가! 보림사에 새 물길이 흘러 들어왔음을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도량에 피었던 매화와 동백꽃은 졌으나, 이내 배롱나무꽃이 길손을 반길 것이다. 남해로 부는 춘풍(春風)을 따라 보림사 일주문으로 들어서 보라! 청량한 선풍(禪風)이 번뇌 하나 쓸어 갈 것이다. 잠시나마 ‘속세 떠난 한가함이 비구와 한가지’였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일선 스님
순천 송광사에서 법흥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를 졸업하고 봉암사를 비롯한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송광사에서 10여년간 수련회를 이끌었으며 전남 고흥 거금도 송광암, 금천선원에서 간화선 실참을 바탕으로 참선과 명상을 지도했다. 현재 구산선문 보림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소리’, ‘행복한 간화선’, ‘보림의 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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