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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책을 통해서 간다

기자명 법보신문
  • 법보시론
  • 입력 2013.04.08 16:19
  • 수정 2013.04.08 16:32
  • 댓글 0

불교에 두 가지 병폐가 있다. 하나는 책을 펼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펼쳐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있다.


1) 시절 인연은 변한다. 선의 발흥과 화두의 제창은 교학의 과잉에서 자랐다. 지금은? 교학이 부재하다. 21세기가 되었어도 교학, 즉 불교의 지식은 한문투의 낡은 방식으로 언설, 유통되고 있어 갑갑한데 오직 화두가 답이라는 고집이 그나마의 햇빛을 가로막고 섰다.


책을 읽지 않고 어떻게 불교에 이를 것인가. 혹 득의망전(得意忘筌)이나, 금강경의 뗏목을 앞세울지 모르나 그물을 버리기는 물고기를 잡고 난 후이고 배를 버리겠다면 우선 강부터 건너야 한다. 그러기 전까지는 그 소중한 도구를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안다. 책이 삶과 접맥되지 못하고 도청도설(道聽塗說), 가십으로 쓰거나, 교양의 잘난 척이나, 시험에 팔아먹는 것을 경계한다는 것을…. 자칫 분별은 불교가 노리는 목표를 심각하게 방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기를 포기할 것이냐.


선(禪)의 역사를 들추어 보라. 기라성의 거장들은 거의 다 교학의 대가들이었다. 불교를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그리하여 그 압력이 솥뚜껑을 튕길 정도가 된 사람들에게 한 소식이 문득 찾아온다.


2) 진짜 문제는 책을 펼쳐도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는데 있다. 소통하기에는 너무 크고 난해한 소식들이 팔만의 장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한자 한문의 검정콩알들 앞에서 다들 좌절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숨을 쉬며 남방으로 산스크리트와 팔리어를 익히고, 대승을 떠나 초기불교로 향한 분들도 있다. 그래도 어려움은 여전하다. 난공불락, 은산철벽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소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단’은 책과 경험 사이의 거리이고 긴장이다. 불교가 가르치는 바를 자신의 몸과 삶에서 증거하지 못할 때 그 불가해함의 압력은 증폭된다.


니체가 말했듯 “잠언들은 읽는다고 바로 해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 해석의 기술이 필요한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대인(modern man)이 아니라 소처럼 해야 한다.” 즉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의 ‘되새김질’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무엇일까. 왜 그렇게 말했을까.” 차를 마시면서도 그 생각이고, 화장실에서도 그 생각이고, 기쁜 일, 어려운 일에 처해서도 그 문제를 끌어안고 사는 것이 참선(參禪)이다.


갑갑함이 깊어지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곳, 거기가 크게 진전할 징후이다. 문득 일상의 경험, 스쳐 지나가는 것에서 그는 돌파의 단서를 본다. 그러다가 불교가 알리고자 한 삶의 진실이 점점 뚜렷해진다. 복잡한 것이 줄어들고, 엉클어져 있던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어느새 삶의 풍경 풍경이 팔만의 장경을 설하고 있음에 환호한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이해가 무르익으면서 비로소 수행이 시작되고 실천이 탄력을 받는다. 이 단계를 육조 혜능의 ‘새로운 교판’이 증거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승(小乘)이란 아직 경전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이고, 중승(中乘)은 대강의 이치를 캐치한 사람이다. 대승(大乘)은 그 이해에 따라 삶을 튜닝해 가는 사람이고, 그럼 최상승(最上乘)은? 그런 노력조차 필요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형조 교수

불교는 책을 통해서 간다. 그 사무치는 도정의 어디쯤에서, 문득 책의 바깥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책을 버리지도 말고 책에 끌려 다니지도 않는 곳, 그 중도의 사잇길에 불교가 있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idio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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