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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세존염화(世尊拈花)

기자명 법보신문

유일한 진짜 세계는 없다. 당신만의 세계를 긍정하라

부처님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부처되는 것


자신들의 세계를 부정하면서
초월적 세계 꿈꾸는 건 집착


설사 부처님이 꽃을 들어도
부처를 보지 말고 꽃을 봐야

 

 

▲그림=김승연 화백

 


옛날 석가모니가 영취산의 집회에서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때 대중들은 모두 침묵했지만, 오직 위대한 가섭(迦葉)만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말했다. “내게는 올바른 법을 보는 안목으로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과 실상(實相)에는 상(相)이 없다는 미묘한 가르침이 있는데, 그것은 문자로 표현할 수도 없어 가르침 이외에 별도로 전할 수밖에 없어서 위대한 가섭에게 맡기겠다.”

 무문관(無門關) 6칙 / 세존염화(世尊拈花)

 

1.싯다르타가 들어 올린 한송이 꽃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 BC563?~483?)는 우리에게는 석가모니(釋迦牟尼)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합니다. 사실 석가모니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석가(Śakya)라는 부족의 성자(muni)를 뜻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싯다르타는 성스러운 사람을 의미하는 석가모니라는 명칭을 탐탁하게 생각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제자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일종의 멘토로 숭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자신처럼 제자들도 그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깨달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타당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싯다르타는 자신을 부처로 숭배하기보다는 제자들이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을 계속 존경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학생으로 남게 되고, 부모님의 말에 계속 복종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자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아이러니한 데가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 것을 맹신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나의 깨달음을 부정하라!”라는 역설적인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제자들도 자신처럼 성불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모든 맹신은 맹신의 대상이 좋든 그렇지 않든 일종의 집착일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권위에 대한 부정은 모든 종류의 집착을 끊고 자유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자신만큼 자유로워져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다리며, 싯다르타는 제자들을 가르쳤던 겁니다. 전설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주로 인도 중부 영취산(靈鷲山, Gṛdhrakutaparvata)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고 합니다.


‘무문관’의 여섯 번째 관문은 우리를 바로 2,500여 년 전 영취산의 설법 현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지금 영취산에서 싯다르타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제자들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방금 스승 싯다르타가 했던 말을 메모하던가 아니면 그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로서는 너무나 못마땅한 광경이었을 겁니다. 집착을 끊어 해탈의 길로 나아가야 할 제자들이 반대로 말과 글, 혹은 그 의미에 집착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펼쳐졌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싯다르타는 갑자기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려 제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스승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제자들로서는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을 겁니다. 무엇인가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으니까요.


2. 꽃 보며 빙그레 웃은 가섭의 미소

 

당연히 제자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스승님은 왜 꽃을 들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일까? 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손에 들고 있는 꽃 한 송이는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화두(話頭)로 기능했던 겁니다. 제자들 중에는 기억력과 이해력이 탁월해 동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아난(阿難, Ānanda)도 있었습니다. 25년간 싯다르타를 따랐던 탓일까요. 아난은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부릴 정도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많이 들었고 그만큼 많은 것을 암기하고 있던 제자입니다. 여기서 다문제일이란 가장 많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뒤에 싯다르타가 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난이 스승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정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스승이 들고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앞에서 아난마저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에 실망하려고 하는 순간, 싯다르타의 눈에는 제자 한 명이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이 들어옵니다. 아난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제자 가섭(迦葉, Kāśyapa)이었습니다. 평소 지적인 이해에 몰두했던 아난과 달리 가섭은 철저히 자신에 직면하는 수행으로 일찌감치 싯다르타의 눈에 들었던 제자였습니다. 아난을 ‘다문제일’로 부르는 것처럼 가섭을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여기서 두타(頭陀, dhūta)란 집착과 번뇌를 제거하려는 일상생활에서의 치열한 수행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쨌든 가섭의 미소를 보고서 싯다르타는 비로소 안심하게 됩니다. 어차피 유한한 생명일 수밖에 없기에 싯다르타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자신이 애써 불을 지핀 깨달음의 등불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안심입니다. 가섭이라면 자신이 떠난 뒤 뒷일을 충분히 감당할 테니까 말입니다.


‘무문관’의 여섯 번째 관문에는 싯다르타가 들고 있던 아름다운 꽃 이외에도 가섭의 환한 미소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싯다르타가 왜 꽃을 들었는지도 아직 아리송하기만 한데, 이제 가섭의 미소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미소가 깨달았다는 징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도대체 싯다르타는 가섭의 미소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만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어지는 싯다르타의 말을 통해 우리는 여섯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하나 얻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는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과 “실상(實相)에는 상(相)이 없다”는 미묘한 가르침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미묘한 마음이나 미묘한 가르침이나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이란 실상에는 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음일 테니까 말입니다.


3. 사람 수만큼 많은 세계 존재한다

 

“실상에는 상이 없다(實相無相)”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영민한 프랑스 소설가만큼 우리의 삶과 마음을 민감하게 포착했던 작가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자신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프루스트는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참되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마다 다르다. (…) 사실은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 및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 사람들의 수만큼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세계가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쉽게 믿고 사람들에게 프루스트의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일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런 믿음은 타당한 것일까요. 혹시 집착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여기 안경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안경을 쓰고 보는 세계와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보는 세계는 매우 다를 겁니다. 전자가 뚜렷하고 명료한 세계라면, 후자는 불명료하고 탁한 세계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일까요. 불교 용어로 표현하자면 안경의 세계와 맨눈의 세계 중 어느 것이 실상(實相)일까요. 사람들은 쉽게 안경의 세계가 진짜 세계라고 믿을 겁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에게 맨눈의 세계는 가짜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바로 우리를 고통으로 내모는 집착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요. 안경의 세계가 진짜 세계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안경이 없으면 전전긍긍하게 되고 그만큼 안경과 안경의 세계에 집착하게 될 테니까요. 이제 “실상에는 상이 없다”는 가르침이 납득이 되시나요.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실상, 그러니까 유일한 진짜 세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까마귀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물고기에도 그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또한 눈이 좋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눈이 나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깨달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진짜 세계,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지요. 자신이 보는 세계는 가짜이고 스승이 보는 세계가 진짜라고 믿는다면,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세계를 긍정하며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니까요. 이제야 싯다르타의 꽃과 가섭의 미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강신주
어떤 아이가 아름다운 꽃을 보여준다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오를 겁니다. 반면 자기보다 우월한 어떤 사람이 꽃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왜 그분이 꽃을 드셨는지 고민하게 될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가섭은 꽃을 보고 기뻐했지만, 지금 다른 제자들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섭의 환한 미소는 그만이 스승 싯다르타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증거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스승이 안중에도 없어야 꽃을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법이니까요.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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