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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바스투

기자명 법보신문

왕자 싯다르타를 붓다로 길러낸 비옥한 성장의 토양

카필라바스투 위치에 대한
네팔·인도 측 주장 엇갈려
1898년 명문 새긴 유물이
발견된 후 인도 측에 무게


유년기부터 출가 전까지
최고의 교육 받으며 성장

 

 

▲인도 우타르프라데쉬주 바스티 지역 피프라와의 카필라바스투 유적. 이곳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병과 ‘카필라바스투’라는 명문이 적힌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 유적이 카필라바스투라는 주장이 급격히 힘을 얻었다.

 


룸비니동산이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성지라면 싯다르타가 유소년기를 거치고 성년이 되어 출가직전까지 머물렀던 곳은 카필라바스투다. 진정한 고향인 셈이다. 싯다르타가 태어난 카필라국은 작은 나라였다. 당시 북인도에는 코살라국이나 마가다국, 밤사국, 밧지연합 등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국가들이 서로 힘을 겨루며 확장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자리한 농경국가 카필라국의 수도 카필라바스투에서 싯다르타는 성장했다. 스스로를 ‘태양의 종족’이라 자부했던 사캬족은 비록 작은 영토지만 비옥한 땅을 일구며 독립왕국 카필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탄생성지 룸비니에서 발길을 돌려 다시 인도로 넘어왔다. 네팔의 국경을 넘어 인도로 돌아오는 길은 룸비니로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소나울리를 거쳤다. 이른 아침, 국경 마을은 한 낮의 분주한 모습과를 달리 조용하고 한산하다. 네팔로 들어갈 때 보다 훨씬 빠르고 여유 있게 국경을 통과해 우타르프라데쉬주 바스티 지역의 피프라와로 향한다. 피프라와는 인도 측이 주장하는 카필라바스투 유적지다. ‘인도 측 주장’이라는 단서가 붙는 데는 이유가 있다. 네팔과 인도가 주장하는 카필라바스투의 위치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네팔 측이 주장하는 카필라바스투는 룸비니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티라우라코트라는 지역이다. 네팔은 인도를 순례한 중국 법현 스님과 현장 스님의 기록을 근거로 티라우라코트를 카필라바스투라 주장하고 있다.


7세기 인도를 순례한 중국의 현장 스님은 룸비니에서 카필라바스투까지의 거리를 서쪽으로 약 80리, 그에 앞서 5세기 인도를 순례한 법현 스님 역시 룸비니에서 서쪽으로 약 50리 떨어진 곳에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룸비니 서쪽 약 20~30km 범위 안에 카필라바스투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일치한다. 학자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카필라바스투의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895년 인도고고국의 퓨러가 티라우라코트 동남쪽 3km 지점인 니갈리하와 마을 근방에서 아쇼카왕의 석주를 발견했다. 이것을 근거로 1899년 인도의 고고학자 무케르지가 티라우라코트 근방에 대한 발굴 작업을 진행해 동서로 약 400미터, 남북으로 약 500미터에 달하는 건물유적을 확인했지만 결정적인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후 1966년부터 네팔 정부와 일본 릿쇼대학 고고학조사단이 공동으로 유적지에 대한 추가 발굴을 진행해 여러 유물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곳이 카필라바스투라 확정지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카필라바스투라 추정할 만한 새로운 유적이 발견됐다. 바로 피프라와였다. 피프라와는 룸비니에서 서남쪽으로 14.5km 지점, 인도와 네팔 국경에서 인도 쪽으로 불과 1km밖에는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98년이다. 당시 이 지역의 지주였던 영국인 윌리엄 펩페가 피프라와에 있는 스투파를 발굴하던 중 지하 5.5m 지점에서 돌로 만든 커다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속에서는 높이 15cm, 직경 10cm 크기의 사리병 4개가 출토됐다. 사리병 가운데 한 개의 뚜껑에 브라흐만 문자로 ‘이것은 사캬족의 붓다인 석가모니의 사리병으로서 명예로운 형제, 자매, 처자들이 모신 것이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글귀를 근거로 학자들은 이 스투파가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사리를 얻어갔던 사캬족이 세운 것으로 추정했다. 그 후 1970년 이곳에 대한 발굴이 다시 이뤄졌는데 스투파 북쪽의 승원터에서 점토를 구워 만든 직경 3cm 크기의 도장과 항아리 등 4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그 가운데 하나에 ‘이 승원은 데바푸트라가 카필라바스투 비구 승가에게 기증한 것’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함께 발견된 항아리 뒷면에서도 ‘카필라바스투’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이 유물들은 이곳 피프라와를 카필라바스투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후 1975년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km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성터로 추정되는 간와리야 유적이 발굴돼 이 일대가 카필라바스투 유적이라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카필라바스투의 위치를 놓고 여전히 갑론을박을 이어가던 당시, 이 소식은 전 세계에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발견을 보도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76년 5월6일 경향신문은 ‘석가가 살았던 환상의 성, 카필라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카필라성의 정확한 위치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카필라성은 그 위치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숱한 논란을 벌여왔으나 정설이 없는 채 ‘환상의 성’처럼 여겨졌었는데 인도고고국이 지난 70년부터 우타르프라데쉬 북부에서 발굴조사를 계속한 결과 마침내 그 소재를 확인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학계에 남아있는 논란을 의식한 듯 “법현이나 현장 등이 기록한 카필라성의 위치는 두 사람의 거리 계산상 차이로 혼란을 일으켜 인도 네팔 국경 부근의 어디쯤이라고 막연히 알려져 왔었으며 그밖에 네팔 영내의 티라우라코트라는 설, 석가 탄생지로 유명한 룸비니 부근이라는 등 의견이 엇갈려 있었다”고 첨언했다.


티라우라코트에서 보다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피프라와의 유적이 옛 카필라바스투의 흔적이라는 주장에 당분간 더 힘이 실릴 전망이다.


국경을 넘어 얼마가지 않아 도착한 피프라와에는 ‘카필라바스투’라고 쓰여진 커다란 석조 안내판과 이곳에서 발견된 사리병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함께 서 있다. 유적지 주변의 넓은 들판은 한 눈에 보아도 농사를 짓기에 적당한 비옥한 토지임을 알 수 있다. 숫도다나왕이라는 이름은 한역으로 정반왕(淨飯王), 즉 ‘깨끗한 쌀의 왕’이라는 뜻이다. 카필라국이 쌀농사를 국가의 기반으로 삼는 농경국가이자 당시의 풍요로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숫도다나왕은 걸음마를 시작한 싯다르타를 위해 황금 안장을 얹은 숫양을 장난감으로 선물했고 싯다르타는 궁전 뜰에서 사촌들과 어울려 숫양을 타고 놀았다. 일곱 살이 되서부터는 명망과 학덕을 갖춘 학자들과 무예, 수학, 언어학을 가르칠 스승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싯다르타는 당시의 정통 학문이던 베다와 함께 외도의 사상과 64종의 문자 외에도 수학, 신화, 서사시, 경제학, 정치학, 수사학, 논리학, 음악, 기예 심지어는 동물과 식물에 관해서도 배웠으며 승마, 창술, 궁술, 격투기, 수영 등 29종의 군사학을 연마했다.


‘태양족’ 자부심이 불러온
사캬족 멸망 비극의 무대


스투파·건물 흔적 뿐이나
기름진 들판 옛 풍요 전해

 

 

▲불타보헤미안의 순례단은 이곳에서 사캬족에 대한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요즘말로 지능지수와 감성지수에 창의력지수까지 두루 높이는 당대 최고의 지성교육에 체력과 운동교육까지 두루 받은 것이다. 작지만 풍요로운 땅 카필라바스투는 싯다르타를 전륜성왕으로 키우기 위한 숫도다나왕의 꿈이 함께 성장해나간 터전이기도 했다.


타고난 지적 능력에 최고의 교육까지 더해진 싯다르타가 숫도다나왕의 희망대로 왕좌를 이어 받았다면 카필라국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아마도 동족이 멸족당하는 비참한 최후는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처님 말년 카필라국은 이웃의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의 비두다바왕에 의해 멸망했다. ‘태양의 종족’이라는 석가족의 자부심이 화근이었다. 카필라국과의 정략혼을 원했던 코살라국의 파세나티 왕에게 사캬족은 ‘고귀한 혈통인 사캬족의 공주를 다른 계급에게 시집보낼 수 없다’며 하녀의 딸 바사바키티야를 공주라 속여 결혼시켜다. 바사바카티야의 아들로 태어난 비두다바왕은 어린 시절 외갓집 친척들로부터 ‘천한 여인의 소생’이라 업신여김을 받았고 왕좌에 오른 후 카필라국을 점령해 피의 복수로 모욕감을 씻었다. 비두다바의 외할아버지 마하나마는 종족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부탁하며 연못 속으로 들어가 풀뿌리에 머리카락을 동여매고 죽었지만 사캬족의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부처님 또한 ‘친족의 그늘은 시원한 법’이라며 비두다바왕의 정복전쟁을 돌이키고자 했지만 ‘숙세의 죄업은 어쩔 수 없음’을 한탄하시며 조국의 멸망을 지켜보셔야만 했다.


역사의 모든 페이지가 그러하듯 카필라바스투에도 빛나는 영광과 피로 얼룩진 비극이 함께 하고 있다. 카필라바스투의 비옥함과 온화함은 싯다르타가 깨달은 이 붓다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수많은 생을 거듭하면 쌓아올린 선업이 깨달음의 씨앗이 되었다면 키필라바스투는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울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지금 피프라와에 남아있는 스투파와 벽돌 유적 사이에는 그 찬란했던 시절의 영광도, 카필라바스투 최후의 날에 흘러내렸던 붉은 선혈의 흔적도 그저 아련하기만 하다. 유적지 안의 작은 연못에는 때마침 한껏 꽃망울을 터트린 연꽃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혹여 저 연꽃 어느 뿌리에 마하나마왕이 종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동여매었던 것은 아닐까. 그 탐스러운 연꽃의 붉은 빛 위로 손끝 저미는 슬픔이 내려앉는다.

 

 

▲연꽃이 만발한 카필라바스투의 연못.

 


카필라바스투의 정확한 위치를 놓고 학계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지만 그 논란은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성지순례길 우리의 동반자는 역사의 건너편에 머물러있던 옛 사람들의 숨결과 그날의 이야기다.


‘실로 이 세상에서는 원한으로 원한이 없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려야만 비로소 원한이 없어지는 것. 이것이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법구경’의 말씀처럼 사캬족의 피로 카필라바스투를 물들였던 비두다바왕도 불길에 타죽는 비참함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기독교의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도교의 장자는 ‘원망을 덕으로서 대하라’고 가르쳤다. 유대교에서는 ‘피는 피’로, 이슬람교에서는 ‘눈에는 눈으로’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원망을 끝내는 법, 원한이 사라지게 하는 법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직 부처님만이 원한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카필라바스투는 사라졌어도 진리의 법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카필라바스투에서 예불 올리고 사캬족의 최후를 애도하는 추모의 시간을 갖은 후 너른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은 이른 아침 출발한 불타보헤미안의 순례단을 위해 지난 밤 머물렀던 룸비니 대성석가사에서 마련해준 도시락이다. 소박한 포장을 여니 윤기 도는 하얀 쌀밥이 정갈히 담겨있다. 깨끗한 쌀의 왕, 숫도다나왕이 황금안장을 얹은 숫양을 타고 노는 아들 싯다르타를 바라볼 때의 흐뭇함이 떠오른다. 카필라바스투에 정겨운 부자의 화창했던 어느 날이 햇살처럼 고여 든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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