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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달마안심(達磨安心)

기자명 법보신문

괴로움에 직면하는 용기 있어야 괴로움서 벗어난다

달마와 혜가 사이 선문답은
깨달음의 가장 원형적 형태


선불교사상 가장 극적 장면
선종 초조와 이조 탄생 순간


고통 외면하려는 비겁함이
모든 부자유와 고통 원인

 

달마(達磨)가 벽을 향하여 참선하고 있을 때, 두 번째 스승이 되는 혜가(慧可)가 사납게 내리는 눈 속에서 서서 자신의 팔을 자르고 말했다. “제 마음이 아직 편하지 않습니다. 부디 스승께서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달마는 “네 마음을 가지고 와라. 그러면 너를 위해 네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혜가는 “마음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달마는 말했다. “마침내 너를 위해 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무문관 41칙 / 달마안심(達磨安心)

 

 

▲ 그림=김승연 화백

 


1. 폭설 속 젊은이 왼팔을 자르다 


12월9일 낙양(洛陽) 근처 소림사(少林寺)의 풍경은 계속 내리는 눈으로 흐릿하기만 합니다. 폭설입니다. 어찌나 눈이 장하게 내리는지, 밤에도 어둡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흩날리는 눈 속에서 어느 사나이가 법당을 응시하며 서 있습니다. 법당 안에는 어느 스님 한 분이 벽을 마주보며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눈 속에 우뚝 서 있는 젊은이와 그를 등지고 참선하고 있는 스님 사이에는 묘한 긴장마저 흐르고 있습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그 젊은이는 반겨주지도 않는 경내에 그렇게 고독하게 서 있었던 것일까요. 자비를 품고 있는 스님은 무슨 이유에서 그 젊은이에게는 일체의 마음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는 사이 12월9일의 밤은 깊어만 가고 어느 사이엔가 다음 날 새벽 무렵이 되었습니다. 새벽녘에 계속 내린 눈은 어느 새 젊은이의 무릎 근처까지 차올랐습니다.


법당 안의 스님은 마침내 젊은이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벽을 향하던 몸을 돌려 경내에 바위처럼 눈을 맞고 서 있는 젊은이를 향하게 되었으니까요. “지금 그대는 눈 속에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가?” 젊은이는 자신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이끌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매몰차게 그를 대합니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칼을 뽑아들고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서 스님에게 바칩니다. 눈밭에 흩날리는 핏자국처럼 깨달음을 얻으려는 젊은이의 의지는 그만큼 애절하고 절실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스님은 그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정도의 의지만 있다면 깨달음에 이르려는 노력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지요. 선불교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마침내 선종의 초조(初祖)와 이조(二祖)가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짐작이 가시나요. 법당 안에서 벽을 향해 참선하고 있던 스님이 바로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깨달음을 전하려고 했던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 ?~528)이고, 불퇴전의 기상으로 눈을 맞고 서 있던 젊은이가 신광(神光, 487~593)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로 받아들이자마자, 달마는 신광에게 혜가(慧可)라는 이름을 내립니다. 충분히 깨달음, 즉 ‘지혜[慧]’를 얻을 수 있다고 달마가 ‘인정하고[可]’ 있다는 것을 표현한 법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달마와 혜가! 그렇습니다. 선불교의 오래된 전통, 그러니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표현되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통은 바로 달마와 혜가라는 두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기원은 항상 두 번째나 세 번째에 온다는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말처럼 혜가가 없었다면 달마도 결코 선종 초조의 지위를 얻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긴 제자가 있어야 스승도 있을 수 있고, 두 번째나 세 번째 왕이 있어야 누군가는 태조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요.


2. 선종은 깨달음 촉발하는 과정

 

선종의 역사는 글이 글을 낳는 과정이 아니라 깨달음이 깨달음을 촉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등불이 다른 등불이 켜지도록 만드는 전등(傳燈)의 아름다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깨달은 스승은 강제로 깨닫지 않은 제자를 깨달음에 이끌 수는 없습니다. 제자 스스로 깨닫도록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고요. 깨달음은 스승의 말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선종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가르치기는 하지만 가르치는 것이 없으니 스승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배운 것이 없으니 제자라고 하기도 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아이러니한 사제 관계에서 마침내 제자는 스승과는 다른 스타일의 깨달음, 그러니까 자신만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지요.


달마와 혜가 사이에 일어났던 드라마틱한 일화는 지금도 ‘전등록(傳燈錄)’ ‘보리달마전(菩提達磨傳)’으로 전해져서 1500 여 년 전 소림사 경내의 새하얀 눈밭에 흩뿌려진 선홍빛 핏자국을 우리에게 기억하도록 합니다. 달마와 혜가 사이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던 사자전승의 논리는 그 후 깨달은 사람과 깨달으려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홍인(弘忍 601~674)과 혜능(慧能, 638~713), 황벽(黃檗, ?~850)과 임제(臨濟, ?~867) 사이에도 여전히 달마와 혜가 사이의 핏빛 긴장이 흐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41번째 관문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관문은 달마와 혜가 사이의 선문답을 통해 가장 소박하고 원형적인 형태로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혜가는 스승 달마에게 자신의 속앓이를 털어놓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마음을 편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스승이니까 그리고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니 그가 깨달은 것을 조금만 일러주면, 자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질문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혜가는 자신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스승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잘못된 속앓이이자 해서는 안 될 요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할 터인데, 지금 그는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미 제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달마는 실망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혜가를 이끌려고 합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마는 말합니다. “괴로워하는 네 마음을 가지고 와라. 그러면 네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


3. 고통 응시한 혜가의 용기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제 마음만 가지고 오면, 스승은 깨끗하게 자신이 마음이 겪고 있는 고통을 치유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희망은 잠시뿐이었고 혜가는 다시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맙니다.

 

“마음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혜가는 자신의 마음을 응시했던 것입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마음을 찾으려는 혜가가 되어보셔야 합니다. 고통스런 마음을 응시하는 혜가의 용기를 가슴에 아로새겨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마음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읍니다!”라는 혜가의 말이 표면적으로는 절망에 빠진 절규로 들리지만, 사실 고통에서 벗어난 희열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해에 새로운 빛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아포리즘 모음집에서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말입니다.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나 스승에게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는 아마 불행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불행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에 거리를 두게 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아름다운 꽃을 그리려면 그 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불행한 자신을 이야기하는 나는 순간적이나마 불행한 자신이 아니게 됩니다. 물론 이야기가 그치자마자 다시 불행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적어도 불행한 자신의 모습에 거리를 두고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은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혜가가 고통스런 마음을 찾으려고 했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순간 그의 마음은 더 이상 고통스런 마음이 아닐 테고, 당연히 그의 마음도 고통에서 벗어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혜가의 말은 기묘한 데가 있습니다. 고통스런 마음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찾으려는 마음 자체는 결코 고통스러운 마음이 아닙니다. 고통스런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하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초월하게 되니까요. 혜가가 고통스런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신주
고통스런 마음에 직면하려는 그의 마음은 그만큼 더 이상 고통스러운 마음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고통에 빠진 마음을 찾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결국 모든 부자유와 고통은 자신의 부자유와 고통에 직면하지 않는 비겁함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무섭고 징그러워도 우리는 고름이 철철 흐르는 상처를 응시해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는 작으나마 치료의 전망이 생길 테니까 말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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