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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청계산 청계사

기자명 법보신문

경허 선사 불연 맺은 절… 열린도량으로 ‘미래 경허’ 키운다

통일신라 시대 창건 됐으나
조선 개국 이후 반대파 모여
새 세상 도모한 ‘은둔의 산’
전답몰수·화재 등 부침 겪어


1854년 경허 스님 출가 인연
만공·보월·금오·월산 스님
근대 선풍 중흥조 법맥 이어져


주민보다 먼저 마을로 다가가는
‘포근한 사찰’이 미래의 청사진

 

 

 

 

비가 내렸다. 봄비는 확실히 다르다. 세상 구석구석을 닦아낸다. 가늘어도 그 빗줄기를 타고 온갖 새 울음이 내려올 것이며, 그 울음은 온갖 새 잎들을 춤추게 할 것이다. 비가 그치면 볕은 곱고 봄날은 화사할 것이다. 의왕시 청계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내렸다. 부처님오신날 봉축 연등이 마을까지 내려와 있었다. 연등을 따라 올라갔다. 산사로 가는 길을 벚꽃이 밝히고 있었다. 청계산 숲길을 한참 걸어가니 문득 청계사(주지 성행 스님)가 나타났다.

경내를 돌아봤다. 경허, 만공, 보월, 금오, 월산 선사의 부도탑도, 청계사를 중창하거나 시주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도 비에 젖었다. 작은 돌멩이를 붙여 조성한 거대한 와불 또한 비를 맞고 있었다. 누워서 비를 맞고 있는 부처님이 안쓰러웠다. 풍경소리만이 비에 젖지 않았다. 비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씩씩했다. 산사는 비에 무엇을 씻을까. 저 비에 내가 지닌 무엇을 씻어내야 황홀한 봄날에 탈 없이 섞일 수 있을까.


청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했다고 한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창건 설화도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세도가 조인규(1227~1308) 일가의 원찰이 됐을 때에야 비로소 역사에 부각되었다. 조인규라는 인물의 행적을 살피면 참으로 흥미롭다. 그는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머리가 좋아 몽골어 통역관이 되었다. 당시에는 온통 원나라(몽골)의 세상이었다. 조인규는 빼어난 몽골어 실력으로 관리들의 환심을 샀다. 나라 밖이나 나라 안이나 너도나도 조인규를 찾았다. 소통의 도구인 말을 장악했으니, 말(言)이 곧 권력이었다.


왕재(王才)임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원나라로 향하던 세자 심(諶 훗날 충렬왕)을 수행했다. 충렬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왕실 주위를 맴돌았고, 원나라 공주와는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그의 딸이 고려 충선왕비가 되었다. 이후에도 말년에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그는 꺾이지 않았다. 권력을 움켜쥐고 부를 쌓았다. 그의 아들들은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이로써 아무도 그의 미천한 과거를 조롱할 수 없었다. 그런 조인규가 원찰을 삼았으니 사찰 또한 크고 빛이 났을 것이다. 그는 불사를 할 때 별당에 머무르며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부귀영화였으니 오래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 후에도 500년 동안 평양 조씨 원찰로 후손들이 영당(影堂)을 관리했다.


그 후 조선이 개국 할 때 다시 청계사는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성계의 개국에 반대하는 무리가 청계산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청계산에는 주봉 망경대가 있고 또 그 아래 국사봉이 있다. 이들 산봉우리 이름은 사뭇 ‘정치적’이다.


주봉인 망경대는 원래는 그곳에서 바라보는 일대가 온통 절경이어서 만경대(萬景臺)라 불렸는데 고려 충신들이 이곳에 올라 옛 고려의 수도 개경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고 해서 망경대(望京臺)로 바뀌었다고 한다. 특히 조윤은 이성계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흡사 걸인 같은 험한 차림으로 날마다 망경대에 올랐다고 한다.


또 그 아래 국사봉(國思峰)은 이들이 이곳에서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다른 지방 국사봉은 대개 선비 사(士)를 쓰는데, 유독 청계산에서만은 생각 사(思)가 붙여졌다는 것이다. 북한산을 비롯한 서울 인근의 산봉우리 이름들은 거의 불가에서 따왔지만 청계산만은 그렇지 않다.


청계산에 숨어든 무리들은 왜 두문동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지 않고 청계산에 들어왔을까. 그것은 아마도 도성에서 가까운, 그러면서도 개와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청계산에서 정변을 기다리거나 도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청계사에서 려말선초의 칼바람을 피하며 체념하거나 또 다른 칼을 갈았을 것이다. 성행 스님은 그래서 청계산을 ‘은둔의 산’이라고 했다. 도성과 가장 가까이서 야망을 숨기고 정세를 살폈으니 어찌 보면 위험한 산이고, 그 산중턱에 있는 청계사는 위험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계사는 부침이 유독 심했다. 1689년(숙종15)에 불이 나 중건했는데 다시 1876년(고종 13)에 불이 났다. 광해군 때에는 사찰 소속 전답과 노비를 몰수당했다. 빼어난 군주 정조는 청계사를 원찰을 삼아 주변에 밤나무 3000그루를 심었다, 하지만 왕이 세상을 뜨자 권세가들의 수탈이 빈번했다. 1503년 연산군이 도성 내 모든 사찰을 없애자 청계사가 봉은사 대신 선종본찰의 기능을 맡았다. 그러나 그 선풍은 그 후 경허 선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미미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청계사엔 연등이 가득하다.

 


1854년 한 소년이 어머니의 손에 끌려 가파른 오솔길을 걸어 청계사에 들었다. 바로 근대 한국불교에 새 빛을 뿌린 경허였다. 소년은 물을 긷고 나무하고 채마밭을 가꿨다. 스승 계허는 비승비속(非僧非俗)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이나 빌어주었다. 소년의 잠재력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청계사에 글을 깨친 박 처사가 찾아들었다. 처사는 소년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비범한 재주에 놀랐다.


“참으로 그릇이 크구나.”


이윽고 5년 동안 청계사에서 잔일을 거들던 소년에게 다른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사인 계허 스님이 환속을 하면서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에게 소년을 맡긴 것이다. 소년은 이후 동학사 강원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불교 경전과 유가서 등을 섭렵했다. 청년이 되었을 때는 그 이름이 인근에 자자했다. 그리고 동학사 강원을 물려받았다. 세수 23세 때의 일이다.


한국 근대불교의 샛별이며 조계종의 실질적 중흥조 경허선사는 청계사의 인연을 바탕으로 만방에 선 기운을 떨쳤다. 경허선사가 키워 낸 세 개의 달빛(수월, 혜월, 만공)은 다시 온 누리를 비췄고, 지금도 숱한 선승들이 선사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조선말 ‘억불숭유’의 먹장구름을 걷어냈던 선사의 삶은 청계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청계사는 경내에 선중흥조 오대선사를 모셔놓고 선종본찰의 맥을 잇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2000년 10월, 청계사 극락보전 관음보살상 왼쪽 눈썹 주변에 꽃이 피었다. 스님과 불도들이 21송이의 꽃을 들여다봤다. 상서로웠다. 누군가 우담바라꽃이라고 했다. 우담바라는 3000년 만에 한 번 피어난다는 전설의 꽃이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파를 탔다. 전국에서 불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호기심에 일반인들도 찾아왔다. 그들을 맞기 위해 진입로를 넓혔고, 그 길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러자 우담바라꽃에 대한 진위 논란이 일었다. ‘풀잠자리알’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종단 일각에서도 “우담바라꽃을 뽑아 아궁이에 던지라”고 일갈했다. 당시 부주지로 있었던 성행 스님은 이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했다.
“우담바라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언론에서 증폭시키고 또 언론에서 희화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꽃이 피고 나서 절이 정화되었습니다. 청계사는 그 전과는 다른 사찰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 안에 있습니다. 당시 그 꽃을 처음 발견한 보살님의 마음 속에 피어 있음이지요.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해는 나라에 경사가 많았고(남북정상회담 개최,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등) 겨울에는 눈도 많이 왔습니다. 우리 겨레에게는 서설(瑞雪)이었습니다. ‘우담바라 108일 무차전진 대법회’를 했는데 2001년 2월 1일 회향하는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쌓인 눈에 해가 비쳤는데 온 세상이 금빛이었습니다. 분명 장엄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꽃이 핀 것이지요.”
우담바라꽃과 풀잠자리알은 그렇게 공존하고 있었다.


성행 스님은 앞으로는 청계사가 먼저 마을로 내려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주민들이 절을 찾아 올라올 것이라고 했다. 선풍으로 깨어 있으되 누구에게나 포근한 사찰, 그것이 미래의 청계사라고 말했다. 그러면 경허 스님 같은 소년이 찾아오고, 경허 스님에게 글을 가르친 처사도 머물 것이다.


“천지만물이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가 무비도(無非道)라 했습니다.”


스님의 말씀대로 우리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귀할 뿐이다. 절이 내려서고 주민들이 올라서는 데 ‘숲’이 있다. 스님은 청계산의 숲을 나눠가지고 싶다. 그래서 숲과 관련한 여러 행사를 마련하여 주민들을 숲으로 초대한다. 그래서 청계사의 숲은 소통과 나눔의 상징이다.


청계사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왔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문득 돌아보니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고 새겨진 바위가 입구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우담바라는 진정 마음에서 피었으니, 이제 바위가 아닌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라갈 때는 연등의 안내를 받았지만, 내려 올 때는 새잎들이 더 고왔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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