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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 삶의 당간지주 경전 - 1. 왜 다시 경전에 주목해야 하나

기자명 법보신문

경전은 부처님 생생한 육성, 불자 삶의 중심으로 세우자

경전 외면할수록 기복화
스님들 경전 인용에 인색


선종 ‘불립문자’ 정신이
경전 무시 이어져선 안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진리의 말씀’을 얻기 위해 나찰에게 기꺼이 몸을 던진 설산동자 벽화,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서역에서 경전을 구해 돌아온 현장법사상, 외세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재난과 맞닥뜨린 상황에서 부처님 말씀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새겼던 고려대장경, 선운사 초기불교승가대학원 학인 스님들이 경전을 암송하고 있는 모습.

 

 

2600여년의 장구한 불교사는 깨침과 전법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경전은 깨침과 전법의 내용이 응축된 불교의 시작과 끝이다. “경을 지니는 자가 곧 나를 보는 자” “세상의 어떤 귀한 보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남을 위해 일러주는 자의 공덕이 무량하다” 등등 대다수 경전에서 ‘신수봉행(信受奉行)’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전에 대한 홀대가 심각하다. 불립문자에, 기복에, 장삿속에, 게으름에, 합리화에 떠밀리는 것이다. 경전이 삶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우리의 삶은 고통스럽고 각박해진다. 교단의 병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법보신문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경전의 의미의 가치를 되새기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왜 다시 경전인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불교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겠다. 그것은 경전을 다시 강조해야 할 만큼 우리 현실에 경전이 근본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경전을 다시 불교의 중심에 놓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선 경전이라는 것은 불교가 종교로 존재하는 한 언제나 근본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경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생생한 형태로 전하는 것이며, 그것을 떠나서는 불교가 있을 수 없다. ‘수트라’라는 범어의 의미나 ‘경(經)’이라는 한자의 의미나 모두 바뀔 수 없는 강요를 뜻하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발휘하는 것을 권(權)이라 말할 때, 경은 그 권이 발휘되기 위한 근본인 변함없는 원칙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원래 경전이 근본이며 지금도 경전이 근본이고 앞으로도 경전이 근본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그러한 경전이 불교의 근본으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경전을 직접 접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 불교와 관련된 해설서나 수필 등등을 읽는 경우는 좀 더 많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어떤 개인적인 관점을 통하여 가공된 이차적인 자료일 뿐이다. 불교의 근본정신에 직접 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안목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나온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배하게 되면 불교는 경전이라는 표준에 의해 통일성을 가지지 못하고 특정한 개인의 이해와 깨달음에 매달려 이합집산하는 어수선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모든 불자들이 일정 정도 직접 경전의 가르침을 마주하여 불교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런 위험성이 더더욱 증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회를 살펴보아도 경전이 중심이 된 경우가 드물다는 것도 이런 현실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계통과 비교하면 이런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부나 목사의 설교는 거의 모든 경우 바이블의 인용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하기에 적어도 최소한의 표준이 있는 셈이며, 그것에 바탕한 설교에 대하여도 올바른 이해인지를 평가할 기준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님들은 불경 인용에 인색하다. 자신의 깨달음을 중심으로 세울 뿐 그것이 부처님의 경전에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떤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리 되어서는 정말 십인십색 백인백색의 불교가 나올 뿐이다. 그것이 어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불교라는 통일적 이름을 가진 이상 그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통일성 위의 다양성은 아름다움 조화를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바탕이 없는 다양성은 단지 지리멸렬일 뿐이요 무질서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리멸렬과 무질서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불교의 일면인 것이다.


이는 불교가 지나온 역사적인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 조선 왕조 500년간의 탄압을 거치며 불교는 거의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경전에 바탕한 신행은 꿈꾸기 힘든 현실이었고, 일반인들의 기복에 의존하여 명맥을 유지하기도 급급하였다 할 수 있다. 그런 현실 속에도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경전과 복잡한 의례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선종이었고, 그것이 한국불교의 회생에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여러 큰스님들에 의해 승가의 위상이 높아지고, 기복 일색의 불교에 수행의 풍토를 진작시켜 한국 불교의 모습을 바로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러한 선종 중심의 불교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도 또한 만만치 않다. 선풍의 진작은 차분하게 경전을 바탕으로 단단한 바탕 위에 불교를 세워 나가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역행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교육과정이 선종의 정신에 기반하여 짜여졌고, 불교 경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지닌 스님들이 많이 배출될 수 없었다. 당연히 신도들의 교육도 그런 풍조로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결과가 지금 경전이 근본바탕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선종이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정신을 내세우지만, 그것을 경전에 대한 무시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견해이다. 선종은 지식이 깨달음과 혼동되고, 지식의 유무로 중생의 등급을 매기는 비불교적인 모습을 깨뜨리는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경전과 교리에 대한 앎이 기반에 깔려 있을 때 선종은 그것을 넘어서는 깨달음의 향기를 전해주는 진면목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만약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오로지 마음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해 보라. 백인백색의 깨달음에 무슨 표준을 정할 수 있겠는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깨달음에 어떤 우열을 매길 수 있겠는가?

 

경전 바탕 없는 깨달음을
저마다 외치기 시작하면
온갖 기언과 기행 판치는


‘공갈불교’로 전락 우려
한국불교 경전에 충실해야
부처님 참뜻도 펼쳐질 것


경전이라는 바탕이 무시된 깨달음을 저마다 외치기 시작하면 온갖 기언과 기행이 판치는 ‘공갈불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한 깨달음이요, 조사의 활구는 부처님 가르침의 참된 뜻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가는 결국 경전에 의거하여 판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 없는 문자는 공허하지만, 문자 떠난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다.


이런 시각에서 본 한국불교는 과연 불교인지 조사교인지 모를 정도로, 불교라는 통일성 위에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부처와 조사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결국 조사교의 모습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걸음 더 나가면, 부처님의 말씀에 의거하는 불자가 아니라 ‘우리 스님’의 말씀에 맹종하는 건강치 못한 불자들의 집단이 생겨나고 만다.


지식이 특수 집단에 머물러 있던 시대와 달리 오늘날은 지식이 대중화된 시대이다. 사제계급의 권위와 종교의 폐쇄성을 바탕으로 어떤 종파의 가르침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선종도 자신의 객관적인 위상을 바로 인식하고, 불교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인가를 밝게 드러내면서 불자들을 이끌어야만 한다.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진 불자들을 신화와 권위로 이끌 수 없다. 예를 들어 부처님으로부터 달마까지 전해온 조사의 계보를 보자. 선종의 제 2대 조사는 아난존자이다. 14대 조사는 용수보살이다. 이것이 조계종에서 인정하는 선종의 계보이다. 그런데 아난존자는 모든 경전을 외워서 구술한 분이다. 용수보살은 반야부 경전과 상응하는 수많은 논(論)을 지은 분이다.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선종의 종지에 과연 합당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교를 버리고 선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정말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경전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그야말로 선종의 정신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선종을 표방하더라도 그것을 불교 밖의 조사교를 선양하는 듯한 모습은 하루 빨리 지양해야 한다. 조사들의 정신이 어떻게 경전의 참 뜻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건강한 모습이다. 경전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부처님의 참 뜻을 활발발하게 드러내는 모습에서 선종의 진면목을 찾아야 한다.


인류 지성의 수준이 높아질 대로 높아졌기에 이제야말로 경전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불교의 경전은 여전이 구시대의 어둠 속에 묻혀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경전조차 가장 표준적인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지금 여기 사는 불자들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경전번역이 드물다는 상황은 우리 불교의 현주소를 아프게 말해주고 있다.

 

▲성태용

경전이 바탕이 되지 않은 불교는 뿌리 없는 불교요, 지리멸렬의 불교라는 것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모든 불자들이 경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부처님의 참 뜻을 지향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신도 교육 체제가 잡혀야 한다. 그렇게 신도들을 이끌 수 있도록 스님들의 교육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시대의 언어로 쓰여진 경전들이 널리 유포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불교가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건강한 종교로 설 수 있는 길이다.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 법보신문 논설위원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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