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옛 사람들의 ‘위법망구’
5. 옛 사람들의 ‘위법망구’
  • 법보신문
  • 승인 2013.05.15 16: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선지식들은 ‘참된 말씀’ 한 마디에 목숨도 바쳐

붓다말씀은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힘 갖고 있어


불교가 동북아 전파될 시기엔
법현·현장·혜초·의정스님 등
구법승들 목숨걸고 국경 넘어

 

 

▲ 그림=김승연 화백

 


‘열반경’과 ‘자따까’에 설산동자(雪山童子)이야기가 나온다. 줄거리는 이렇다.


아득한 옛날, 진리에 목말랐던 한 열혈청년이 눈 덮인 산중에서 홀로 좌선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수행자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노랫가락이 스쳤다.


“모든 것은 덧없어라. 태어나면 죽지 않는 이 아무도 없구나.”


깊이 묻어둔 나의 속내를 훤히 알기라도 한다는 냥, 구슬픈 가락이 온 가슴을 휘저었다.


‘그래, 삶은 참 덧없는 것이야. 이 슬픔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다행히도 노랫소리는 점점 커졌고, 궁금하던 ‘가수’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뜻밖에도 구슬픈 노래의 주인공은 송곳니가 입술 밖까지 삐져나온 험상궂은 사나이였다. 청년은 설레는 가슴으로 공손히 부탁했다.


“다음 구절을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눈을 힐끔거리던 사나이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배가 고파 노래도 못하겠네. 고기라도 한 점 먹이시던지.”


“눈 덮인 산중에 무슨 고기가 있겠습니까?”


목청만 고운 험악한 사내는 입술을 핥았다.


“자네 몸뚱이라도 주던가.”


그는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이었다. 청년은 선뜻 약속했다.


“마저 불러주신다면 제 몸을 드리겠습니다.”


나찰은 목청을 가다듬고 다음 구절을 노래하였다.


“나고 죽는 일 사라져버리니 그 고요함 행복하구나.”


노랫말 한 구절에 고대하던 마음의 평화를 얻은 청년은 약속대로 나찰의 먹이가 되기 위해 절벽에서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청년은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인도 땅에 태어나 완전한 행복을 성취한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불교의 주요한 특징 하나를 명확히 지시하고 있다. 주요한 특징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참된 말씀’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참된 말씀’은 화자(話者)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힘을 가지고 있고, 불교도들이 ‘참된 말씀’을 얻는 걸 목숨을 걸만큼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는 것이다.


설화 하나 끄집어내 불교 전체의 특징인 것처럼 거론하는 건 침소봉대의 너스레가 아니겠냐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설화(說話)다. 인명도 지명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역사적 사실로 취급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결코 화려한 치장을 위해 덕지덕지 떼어다 붙인 영웅담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2, 제3 아니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설산동자들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여 이 이야기의 진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경전은 예배와 찬탄 대상 승화
금은으로 제작·피뽑아 사경도


16년간 조성한 팔만대장경엔
고려백성들 간절함 배어있어


‘참된 말씀’ 한 마디를 위해 절벽 위에서 가볍게 몸을 날렸던 설산동자처럼, 불교가 동북아시아로 전파되던 무렵 서역과 동토의 수많은 승려들은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또 부처님의 말씀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다. ‘목숨을 걸었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낯선 이역의 풍습과 험악한 여정으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신고(辛苦)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여러 전적들을 통해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고승전’의 석담무갈전(釋曇無竭傳)에 실린 기록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송(劉宋) 영초(永初) 원년(420), 석담무갈(釋曇無竭)은 승맹(僧猛)과 담랑(曇朗) 등 뜻을 함께하는 25명과 함께 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고 마침내 파미르고원에 올라 설산(雪山)을 넘을 때였다.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안개에 끝없이 펼쳐진 만년설, 아찔한 계곡 사이로 사나운 폭류가 휩쓸고 있었다. 그들은 양쪽 기슭에 매어놓은 한 가닥 밧줄을 잡고 계곡을 건너야 했다. 밧줄이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을 염려해 열 사람씩 건넜고, 기슭에 닿은 사람들은 연기를 피웠다. 연기가 피어오르면 무사히 도착한 것을 알고 다음 사람들도 계곡을 건넜다. 출발하고 한참이 지나고도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사나운 바람에 줄이 흔들려 계곡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수없는 계곡을 건너며 3일이 지나자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막아섰다. 유리처럼 반반한 바위에는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다행이 절벽에는 누군가 뚫어놓았을 구멍이 꼭대기까지 쌍쌍으로 이어져 있었다. 네 개의 말뚝을 이용해 아래 말뚝을 뽑아 위로 꼽아가며 기어올라야 했다. 꼬박 하루를 오르고서야 마침내 평지에 도착했다. 점검해보니, 동료 열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계빈국(賓國)에 도착한 담무갈 일행은 그곳에서 겨우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 1부를 구했다. 다시 길을 나서 월지국(月氏國)을 거쳐 광활한 벌판을 넘어 중인도로 가는 길, 그 길에서 열세 명 가운데 여덟 명이 죽고 다섯 명만 살아남았다. 담무갈은 끝없이 닥치는 위험과 고난에도 흔들림 없이 계빈국에서 얻은 ‘관세음경’만 생각하였다.”


어찌 담무갈 일행만 쓰라린 아픔을 겪었으랴. 법현(法顯)·현장(玄)·혜초(惠超)·의정(義淨) 등 수많은 구법승(求法僧)들이 설산을 넘으며 목숨을 걸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 구법승만 신고를 겪었으랴.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비롯한 수많은 전법승(傳法僧)들 역시 감당키 어려운 간난(艱難)을 이겨내야만 했었다.


또한 불교도들은 피와 눈물로 새겨진 ‘참된 말씀’을 후대에 전하는 일에도 온 정성을 다하였다. ‘화엄경지험기’에 실린 덕원(德圓) 스님의 ‘사경기’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그는 ‘화엄경’을 사경하기로 마음먹고 깨끗한 동산부터 따로 하나 마련하였다. 그리고 동산에 곡식과 닥나무를 심고 아울러 향초와 화초를 심었으며, 매일 한 차례 목욕재계하고는 정갈한 옷을 입고서 동산에 들어가 물을 주었다. 닥나무가 삼년을 자라자 따로 집 한 채를 짓고 일 년에 걸쳐 종이를 만들었다. 사경하는 서생 역시 매일 향탕에 세 번씩 목욕하고, 꽃을 뿌려 공양한 다음에야 사경을 시작하였다.”


경전을 제작하는 과정은 차치하고 준비기간만 4년을 가졌으니, 그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글자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다한 분이 어찌 덕원 스님뿐이었겠는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배인 금과 은으로 경전을 제작한 사례가 고금에 수두룩하고, 심지어는 피를 뽑아 경전을 쓰기도 하였다. 후대에는 경전이 부처님 유골인 사리처럼 학습의 대상을 넘어 예배와 찬탄의 대상으로까지 승화되었으니, 선대 불교도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나라 말 당나라 초의 혼란기, 혹여 말세가 닥쳐 불법이 사라지면 어쩌나 염려한 정완(靜琬) 스님은 세상이 뒤집혀도 파괴되지 않길 발원하며 외지고 외진 태행산(太行山) 줄기 방산(房山)에 석굴을 파고 돌덩어리에다 부처님 말씀을 새겼다. 정완 스님의 비원은 후대 스님들에게 이어져 요(遼)나라 금(金)나라 때까지 석경(石經)이 제작되었고, 1만4278개의 돌에 대장경을 새긴 방산석경(房山石經)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찌 중국의 불교도만 부처님 말씀을 귀히 여겼겠는가. 1232년의 몽고군 2차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이 잿더미로 사라지자 고려의 백성들은 16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강화도로 피신한 초라한 임금과 신료, 몽고군의 말발굽에 유린당한 피폐한 백성들이 그 엄청난 대역사를 감행하였으니, 그들이 흘린 피눈물이 또 얼마였겠는가. 삼년을 바닷물에 담근 목재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하였다니, 그들의 간절함이 또 어떠하였는가.


소소한 몇 가지 사례만 들더라도 ‘불교도들은 참된 말씀을 구하고 참된 말씀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것이 과거의 사례로만 그쳐는 안 될 것이다. 훌륭한 선배들을 본받아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의 불교도들도 ‘참된 말씀’을 구하고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부처님 말씀은 뗏목과 같고 손가락과 같은데 뭐 그리 집착하는가?”

 

▲성재헌

그런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은 주체할 수 없는 탐욕과 분노의 강물을 이미 건넜습니까? 당신은 온 법계를 고루 비추는 달빛에 헛된 심신의 그림자를 말끔히 털어버리셨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반드시 ‘참된 말씀’ 한 마디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