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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불교와 힐링, 그 가능성에 대한 고찰

기자명 법보신문

-위빠사나 성공사례와 비교를 통해-
번뇌 벗어나게 이끄는 화두가 간화선 힐링 원천

화두는 농축적인 힐링수단
분별망상 제거 용도로 고안


간화선이 지향하는 깨달음은
개념·인습적 사고서 벗어남

 

 

▲위빠사나가 현대사회 힐링프로그램으로 각광 받고 있는 가운데, 임승택 교수는 “간화선 역시 실천방식의 다원성에 주목할 경우 대중적 힐링프로그램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간화선에서는 일체의 형식에 매이지 않는 격외(格外)의 방법을 사용한다. 설명이나 분석의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는 전략을 취한다. 조계종교육원에서 발행한 ‘간화선: 조계종 수행의 길’에도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타난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방법으로 역대 조사들은 선문답을 하고 코를 비틀고 뺨을 때리고 고함을 치고 방망이로 때린 것이다.”


간화선에서 깨달음의 정(正)과 사(邪)를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스승은 철저한 검증을 통해 제자가 작은 지견에 매이거나 착각도인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깨달음의 정과 사를 판별하기 위한 법거량(法擧量)은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되며 격내(格內)와 격외(格外)의 언어와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격내와 격외의 방법을 함께 활용하는 간화선의 법거량은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스승과 제자가 비밀스럽게 1대 1로 대면하여 진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과정은 제자의 깨달음의 정도와 상태를 정확하게 판별해 내기 위한 것으로 감변(勘辨)이라고도 부른다. 감변의 엄격한 절차를 통해 화두(話頭)를 타파하여 깨달은 것이 확인되면 스승은 제자에게 인가(認可)를 내려준다. 스승에게 인가를 받은 제자는 비로소 수행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제자가 스승에게 인가를 받지 못하면 화두 참구를 계속해야 하며 이러한 과정은 마침내 대오(大悟)하는 순간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간화선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계보를 이어 오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간화선은 치유적 기능을 지니는가. 간화선(看話禪)이라는 말 자체부터 살펴보자. 이것은 화두(話頭)를 간(看)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 779-897)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선사는 “없다(無)”라고 대답했다. 바로 거기에서 “왜 스님은 ‘없다’라고 했을까?”라고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 간화의 한 사례이다. 이때 사용된 ‘없다(無)’를 무자(無字) 화두라고 부른다. 화두에 대한 의심은 객관적인 이치를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분별하는 마음 자체를 내려놓도록 하여 깨달음의 차원으로 비약하도록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두는 일체의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끄는 수단이 된다. 간화선이 지니는 힐링(healing)의 역량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질 수 있다.


초기불교 이래로 불교명상은 다양한 내용과 방식으로 계승되어 왔다. 그러나 각각의 방법들은 ‘견해에 의존하는 상태(見依)’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대략 일치한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과거에 관련하여 ‘견해에 의존하는 상태’와 미래에 관련하여 ‘견해에 의존하는 상태’를 제거하고 초월하기 위해 나는 이 사념처(四念處)를 가르쳤고 선언하였다.”라고 회고한다. 이러한 언급을 간화선에 적용시키면 간화선이야말로 불교명상의 본래 취지를 올곧게 계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간화선의 화두는 애초부터 분별망상을 제거하기 위한 용도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상좌부 위빠사나의 근거가 되는 사념처는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隨觀)’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위빠사나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무상(無常)·괴로움(苦)·무아(無我)의 진리를 체득하도록 이끈다. 그런데 이렇게 얻어지는 진리란 외계의 현상에 관한 자연과학적 지식이 아니다. 무상의 진리는 오온(五蘊)으로 드러나는 ‘나’ 자신의 경험내용이 바로 그렇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서 ‘나’만의 경험에 빠져 도취된 상태를 망상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힐링을 필요로 하는 상태이다.


결국 위빠사나란 견해와 망상에 얽매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데 목적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에서 위빠사나는 간화선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간화선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위빠사나를 통해 체득하는 일어남(生)과 사라짐(滅)의 진리는 화두참구와 같은 폐쇄적인 집중의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몸이나 느낌 따위의 개방된 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점진적으로 얻는 통찰의 내용이다. 따라서 위빠사나의 실천에는 그 과정과 결과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위빠사나는 통찰을 행하는 만큼 그 깊이가 깊어지는 점진적 힐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화선은 화두타파라는 반전의 과정을 거쳐야만 그 묘미를 맛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반전의 경험이 철저할수록 기존의 낡은 관념을 확실하게 무너뜨릴 수 있다. 간화선 수행에서는 화두타파 이전의 소소한 깨달음이나 신비체험은 별반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화두란 한꺼번에 몰록 깨치는 데 특징이 있으며 점차적인 방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화두는 매우 농축적인 힐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화선이 지향하는 깨달음이란 개념적·인습적 사고방식으로부터의 벗어남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이점에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근본 목적은 다를 수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서로를 배태시킨 역사적·문화적 차이에 의해 다르게 포장되었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렇다면 견해와 망상의 제거는 어떻게 해서 힐링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가. 견해와 망상은 있는 그대로를 왜곡시킨다. 경험하는 일체의 현상을 고착화하고 거기에 ‘나의 것’ 혹은 ‘나’라는 관념을 투사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괴로움이 있다”라거나, “나의 이 괴로움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라는 따위의 상황이 전개된다. 견해와 망상의 제거는 이러한 심리적·인식적 뒤엉킴과 부풀림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준다. 다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를 일깨운다. 이러한 일깨움은 괴로움을 짊어진 존재로서의 ‘나’를 해소한다. 바로 이것이 위빠사나와 간화선을 통해 얻게 되는 힐링의 효과이다.

 

점진적 수행은 붓다 교화방법
위빠사나 수행체계화로 성공


실천방식 다원성에 주목할 때
 간화선 힐링역량 확대도 가능


수행단계의 체계화는 위빠사나의 현대화를 이끈 주요 요인이다. 그런데 이것은 수행단계를 고정된 실체로 오인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화는 사념처(四念處)와 같은 초기불교 이래의 명상법이 점진적이고 개방적이라는 사실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체계적이고 점진적인 수행은 붓다가 사용했던 원래의 교화 방법이다. 필자는 이러한 방식이 지닐 수 있는 장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점진적인 과정으로 제시되는 위빠사나는 설령 궁극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실천한 만큼의 효력을 그때그때 가져다 줄 수 있다. 현대의 심리치료에서 위빠사나를 용이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보급된 힐링의 메시지가 다만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차원에서 그치라는 법은 없다. 이것은 더욱 심화된 모습으로 붓다의 가르침에 다가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간화선은 어떠한가. 교리적 측면에서 간화선은 위빠사나에 비해 얼마간의 우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화두일념이라는 폐쇄적인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또한 화두타파 이전에 있을 수 있는 일련의 체험들은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즉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수행자에게는 그때그때의 효력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이점에서 간화선은 수행단계를 체계화하기 곤란하며 또한 다른 용도로의 활용 가능성마저 낮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많은 경우 간화선의 실천은 수행의 진전을 가름할 수 있는 검증의 장치마저 자상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점은 간화선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한 모색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난제를 타개하지 못한다면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소위 상근기 수행자들만의 전유물로 남게 될 것이다. 자칫 ‘그들만의 힐링’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의미이다.


하우트만(Houtman)에 따르면 위빠사나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간화선의 대중화 작업이 그렇게 늦은 것만은 아니다. 또한 현재 실천되고 있는 위빠사나의 종류는 미얀마에서만 적어도 24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간화선의 실천방식이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문제 역시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위빠사나가 그러하듯이 간화선 역시 다양한 방식을 용인하는 가운데 앞으로의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출가자에게 적합한 방식과 일반 재가자에게 적합한 방식을 적절히 구분한다면 전통의 고수와 대중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천방식의 다양성은 이미 붓다 당시부터 용인되고 있었다. 필자의 기존 연구에 따르면 붓다가 직접 걸었던 해탈의 길은 네 번째 선정(第四禪)을 통한 삼명(三明)의 획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외도의 길을 걷다가 불교로 전향해 온 일부의 제자들은 멸진정(滅盡定)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번뇌의 단절을 이루었던 듯하다. 또한 애초부터 붓다의 제자로서 입문한 이들은 오직 지혜의 성취에 의해 갈망과 번뇌로부터 해탈을 이루었던 듯하다.

 

▲임승택 교수
이점은 500명의 아라한 가운데 삼명과 육신통을 갖춘 아라한은 소수에 불과했고 나머지 다수는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로써 아라한을 성취했다고 기술하는 방기사상윳따의 언급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사실은 불교의 실천방식이 원래부터 다원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간화선이 지니는 힐링의 역량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실천방식의 다원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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