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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김천고 설립자 최송설당

일제강점기, 민족 미래 위해 인재불사에 매진한 대보살

조선 마지막 황태자의 보모
봉은사 기도 인연으로 입궁
엄비의 도움으로 재산 모아

 

퇴궐 후엔 나눔·회향에 매진
청암사 등 사찰불사도 이끌어
마지막 재산 희사해 학교 설립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930년 3월, 한 노부인의 이야기가 주요 신문지면을 일제히 장식했다. 평생 모은 재산 전부를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희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보시 금액만 무려 30만2100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액수다.

 

1922년 100평 규모의 청년회관 설립에 1만원이 소요됐으니, 30만2100원의 가치를 환산하면 3000평 규모의 건물 설립비용에 준하는 셈이다.


유례없는 통 큰 보시로 전국을 들썩이게 한 이 노부인은 바로 김천고등보통학교의 설립자, 최송설당 여사였다. 그녀는 이미 70세를 넘긴 고령에도 범상치 않은 행보로 수차례 세간을 놀라게 했다. 학교설립의 결심을 성명서를 통해 만천하에 공표한 비범함이 대표적이다. 여성의 몸으로 거액의 자본을 학교설립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나선 것도 놀랍지만, 본인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해 취지를 알리는 것 또한 유례없는 행보여서 이목을 더욱 집중시켰다. 더욱이 성명서에는 학교설립으로 민족의 발전을 담보하겠다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있었다.


“사회의 발전은 인재의 교육에 있고 교육의 확장은 재정의 확보와 무관하지 않다. 마땅히 해야할 바임에도 지금 재정이 궁핍하다는 이유로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사회의 급한 일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말할수 있겠는가. 이에 30만2100원을 내어 김천보통학교 설립의 자금을 대고자 한다.”(동아일보 3월5일자 신문에 실린 성명서 일부)


성명을 통해 학교설립의 취지가 ‘민족의 미래를 위한 인재양성’에 있음을 명명백백히 밝힌 것이다. 송설당의 포부에 국민들은 놀라움을 넘어선 벅찬 감동을 느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기, 그녀의 결심은 곧 교육이라는 기둥을 굳건히 세워 우리민족의 미래를 담보하겠다는 다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민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국권을 상실한 나라, 핍박받는 민족에게 희망은 없어 보였다. 일본의 감시망은 갈수록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압박하고 있었으며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한 일본의 교육정책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총독부는 근대화란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 대신 일본의 말과 글을 가르치도록 강요하는가 하면 민족성을 폄훼하기 위해 왜곡된 역사교육까지 일삼았다. 나아가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일왕의 신격화를 종용하고 일본의 우월성을 주입하며 일본의 신민의식을 심는데 주력했다.


지식인들의 우려는 깊어만 갔다. 민족의식이 사라진 식민지 백성들에게 미래는 없음이 자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문성과 민족의식을 갖춘 인재의 양성은 곧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희망에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송설당은 학교 설립에 담긴 의미를 누구보다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확고한 결심만큼이나 남다른 추진력으로 설립을 구체화시켜나갔다. 우선 학교설립 의지의 공표와 동시에 믿을 만한 김천유지 7명을 지정해 학교설립을 위한 제반사항들을 추진토록 했다. 학교설립 일체를 위임받은 7명은 즉각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 김천고등보통학교 창립위원회’를 결성해 사업에 본격 착수했다.


그러나 학교설립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돈만 있다고 가능한 일은 더더욱 아니어서 사사건건 난관에 부딪쳐야 했다. 1930년 3월24일 경상북도 학무과는 설립위원회가 처음으로 제출한 김천보통학교의 설립신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인문계고등학교가 아닌 실업학교로 전환하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뜻밖의 난관에도 최송설당의 의지는  확고했다. 인문계 학교가 아니면 기부 자체를 취소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고등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함양이라는 애초의 목표가 희석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총독부와 실랑이를 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도 불거졌다. 학교설립에 필요한 평가액이 당초 제시했던 금액 30만2100원에서 32만원으로 증액됐다며 제동을 걸고 나온 것이다.


송설당은 이에 또 한번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마지막 남은 재산인 서울의 거처 ‘송설당’을 팔아 부족한 금액을 추가 보시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송설당’의 평가액이 2만3000원이니 총독부로써도 이의를 제기할 명분이 없었다.


송설당은 그길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김천으로 이주했다. 마지막 남은 모든 재산까지 탈탈 털어 학교설립에 매진키로 한 동시에, 본인이 직접 나서 학교설립을 가로막는 문제들을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녀는 김천에서 총독부 관계자들과 직접 교섭에 나서는가 하면 일본 신문사를 통한 여론작업에까지 나서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총독 부인과의 면담에서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고등교육까지 시켜 대학에도 보내고 싶다. 부득이 안된다면 기부를 취소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는 등 초강수를 놓기도 했다.


그렇게 7개월이 지나자 총독부가 백기를 들었다. 인문계학교 설립시 실업과목을 포함시키겠다는 내용의 수정안 에 맞게 김천보통학교를 설립인가한다는 개선안을 내놓은 것. 일은 급물살을 탔다.


1931년 3월, 총독부는 공식적으로 김천보통학교의 설립인가를 공표했다. 송설당이 설립의지를 공표한지 꼭 1년만의 일이다. 김천보통학교는 5월9일 첫 입학식을 거행하고 학생들에게 교육의 문을 활짝 열었다.


시작이 어려웠던 만큼 교육열도 남달랐다. 정원을 50% 초과 선발해 최대한 많은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가 하면, 교사 월급을 서울 학교의 두배로 지급하는 방법으로 우수한 교사를 확보하는 등 모든 운영방침이 교육 위주로 돌아갔다.


송설당은 학교 설립과 동시에 모든 권한을 놓았다. 학교 설립을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남김없이 희사한 터였기에 학교 내 ‘정걸재’를 숙소 삼아 몸을 의탁했다. 학교재단이 매월 설립자를 위한 생활비를 지급했다.
가진 모든 것을 민족을 위해 희사했고 이후에도 일체의 작은 욕심조차 내비치지 않았기에 그녀를 향한 백성들의 존경심은 남달랐다. 학교설립 이후 김천보통학교가 주관한 ‘최송설당 여사 기념동상’ 건립이 십시일반 모인 성금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김천보통학교는 설립자인 송설당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제작키로 하고 모연을 시작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성금을 보내온 개인과 단체가 무려 천여명에 달했다. 요즘처럼 정보가 빠른 것도, 금융의 편의가 생활화된 것도 아닌 상황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결과였다. 신의주보통학교, 부산 동래일신여학교, 대구계성학교 등에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단체로 성금을 모아 보내는가 하면 멀리 만주에서도 동참의 손길이 답지했다.


송설당 여사 기념동상은 그녀를 향한 전국민의 존경심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런 까닭에 송설당 동상은 지난해 근대문화제 49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1935년 11월 열린 동상 제막식에서 최송설당은 또 한번의 폭탄발언을 한다. “재단에서 지급받은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학생들을 위한 특별교실(과학관) 설립에 필요한 건축비용으로 사용하겠다”는 것. 마지막 수중에 남은 돈까지 모두 학교에 보시하고 빈손으로 떠나겠다는 의미였다. 이 쯤되면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비범함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또 한가지, 남다른 그녀의 삶을 이야기함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바로 그녀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의 보모였다는  사실이다. 송설당은 순헌황귀비 엄씨(엄비)의 신뢰를 받아 1897년 영친왕의 보모로 입궁했다. 김천에서 나고자라 왕실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그녀가 영친왕의 보모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불교의 역할이 컸다.


독실한 불자였던 송설당은 김천에서 동학난을 피해 상경한 후 봉은사에서 신행생활을 했는데, 이때 만난 이가 바로 엄비의 동생이었던 것. 송설당은 엄비의 동생에게서 엄비의 잉태 소식을 접한다. 송설당은 정성을 다해 득남을 위한 100일 기도를 이어갔을 뿐 아니라 출산 이후에는 동생을 통해 최고급 산후용품을 바쳐 엄비로부터 총애를 받게 됐다고 전해진다.


송설당은 대략 10년간 궁궐에 머물렀다. 퇴궐한 시기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1907년 헤이그 특사를 계기로 고종이 퇴위한 후, 12월경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면서 궁을 나왔을 것이란 설이 많다. 10년간의 궁궐 생활을 통해 송설당은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한편, 엄비의 도움으로 재산을 운용해 상당한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 같은 재력을 기반으로 1912년 무교동에 ‘송설당’이란 호를 딴 큰집을 짓고 전국 수많은 사찰에 불사금을 보시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긍휼을 구제하는 데에도 수차례 기금을 쾌척했다. 김천보통학교의 설립을 결심한 1930년 이전, 그녀의 보시는 불심을 뒷받침하듯 사찰 불사에 집중됐다.


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그녀는 퇴궐한 이후 많은 사찰 불사를 이끌었으며 청암사와 영도사, 금강산 유점사, 표훈사 등의 사찰과도 인연을 맺었다. 특히 청암사의 경우 주지 대운 스님의 불사원력에 감화, 1905년 1차 시주에 이어 1911년 대화재 이후 재차 대규모 시주를 함에 따라 일주문 앞 ‘대화주 최송설당’이란 비석을 남기기도 했다.


자녀가 없었던 송설당은 애초 전 재산을 해인사에 보시하는 방안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구체화 하는 과정에서 만해 스님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원력을 굳건히 했다는 후문이다.


1930년 김천보통학교 설립기금을 보시하면서 작성한 계약서에도 그녀의 불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죽은 뒤 장례는 불교식으로 치르고 시신을 화장해 묘소에 안장해 달라고 요청한데 이어 본인이 거처하던 정걸재 대청마루는 3년간 불상을 봉안해 법당으로 만들어 달라는 당부였다. 어쩌면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그녀의 남다른 기부 역시 깊은 불심에서 비롯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1939년 그녀는 거처인 ‘정걸재’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유언을 통해 마지막 용돈까지도 학교에 기부한 뒤였다. 모든 것을 학교에 희사하고 빈손으로 떠난 송설당의 마지막을 온 백성이 눈물로 배웅했다.


“영원히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진정시킬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준수하되 부디 내 뜻을 잃어버리지 마라.”


송설당의 마지막 유언은 그녀가 행한 인재불사의 참된 이유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위태로운 민족을 위해 가진 모든 재물을 무주상 보시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철저히 무소유를 실천한 최송설당. 그녀가 보여준 삶의 여적이야말로 그 자체로 보살의 삶이라 이름 붙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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