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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산 서광사

기자명 법보신문

은사와 상좌의 애틋한 사연 얽힌 서쪽의 빛가람

신라 경순왕 때 대경선사 창건
천년 세월 지나며 퇴락한 암자로


1984년 법장 스님 주지 부임
사찰 중흥 100일 기도 끝나자
서쪽 하늘에 붉은 기운 가득
삼선암서 서광사로 이름 바꿔
유치원 건립…진신사리 봉안


상좌 도신 스님 스승 뜻 이어
삼층 법당 준공 등 불사 지속

 

 

▲ 서광사 주지 도신 스님은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상좌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만큼이나 노래에 대한 애정이 깊은 도신 스님에게 언젠가 스승이 던진 “네 노래는 무언이냐 유언이냐?”는 물음은 이생에서 반드시 풀어야할 화두다.

 


지난 부처님오신날에 부처님은 어디로 다시 내리셨을까. 오월의 산사는 싱그럽다. 산 위에서는 녹음이 흘러내리고, 풍경을 흔드는 바람은 어느 때보다 결이 곱다. 충남 서산시 서광사(주지 도신 스님)를 찾았다. 서광사는 미처 시내를 빠져나기기 전에 나타났다. 3층 법당이 뒷산만큼 우람했다. 산에는 여러 가지 자태의 소나무가 경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여래보궁으로 가는 입구에는 늙은 소나무를 죽은 나무가 떠받치고 있다. 그 밑을 지나니 흡사 일주문 같다.


서광사는 부춘산 옥녀봉 아래 있다. 부춘산은 불토(佛土) 가야산의 낙맥이다. 신라 경순왕 2년(928) 대경선사가 창건했고 상선, 중선, 하선에 암자가 있어 삼선암(三仙庵)으로 불렸다. 천년도 넘는 세월은 시나브로 신성한 공간을 범했고, 하선의 암자만 퇴락한 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삼선암에 시절 인연이 있었다. 1984년 법장 스님이 주지로 부임했다. 스님은 석장을 꽂고 불사를 시작했다. 절 이름도 서광사로 바꿨다.


사찰명을 바꾼 사연은 이렇다. 법장 스님이 삼선암 중흥을 위해 100일 기도를 드리고 회향하는 날이었다. 관음전에서 아침 기도를 마치고 문득 하늘을 보니 서쪽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서쪽에서 해가 뜰 리 없었다. 자세히 보니 서기가 어려 있었다. 절 식구들은 스님의 기도가 서쪽 하늘을 물들였다고 했다. 그래서 아예 절 이름을 서쪽에서 빛이 났다는 의미로 서광(西光)으로 바꾸었다. 그러다 다시 서기를 품은 빛이 나타났다는 의미로 서광(瑞光)이라 했다. 이후 절에서는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 일주문을 지나 여래보궁에 오르는 길.

 


법장 스님은 서광사를 서해 제일가람으로 만들고자 원력을 세웠다. 1986년 사찰의 ‘과거’를 제대로 규명해서 전통사찰로 지정받았다. 스님은 1991년 서광사를 떠날 때까지 많은 일을 했다. 지금의 3층 법당도 당시에 이미 설계도면을 완성했다. 사찰 입구에는 유치원을 세웠다. 인재불사를 중시했던 스님다운 결단이었다. 스리랑카에서 석가모니 진신치사리를 모셔와 봉안했다. 그런 후 스님은 덕숭총림 수덕사로 떠나갔다. 7년 동안의 불사에 신도들과 절 식구들은 감동했다. 눈물로 스님을 떠나보냈다. 그 후 법장 스님은 큰 길을 걸었고, 마침내 조계종 제31대 총무원장을 맡아 한국불교를 이끌었다.


서광사 주지인 도신 스님의 이력은 사뭇 특이하다. 그리고 스승 법장 스님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서광사에는 법장 스님과 도신 스님의 인연이 스며 있다.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는 지금도 완성을 향해 진행 중에 있다.


도신은 8세에 예산 수덕사의 일주문을 넘어가 동자승이 되었고, 17세에 법장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그럼에도 타고난 예인기질을 숨기지 못했다. 중광 스님을 만나 그림을 배웠고, 신중현과 이남이 같은 뮤지션에게 노래와 작곡을 배웠다. 명창 박동진 선생으로부터는 판소리를 사사했다. 출가승 최초로 국악가요 음반을 냈고 사찰, 양로원, 교도소 등을 돌며 노래 보시를 했다. 틈틈이 익힌 바둑 실력은 프로기사와 접바둑을 둘 정도이다. 하지만 은사스님은 그런 제자의 재능이 마뜩치 않았다.

 

 

▲ 소나무가 만들어낸 서광사 일주문.

 


법장 스님은 도신을 어려서부터 키웠다. 도신에게 은사스님은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무던히 속을 썩였다. 학교를 가라고 하면 분신자살하겠다고 오히려 스님을 위협했다. 스님은 “중도 배워야 한다”며 종아리를 때렸다. 그리고 끝내 당신이 돌아서서 울었다. 학교에 가면 중이라 놀림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얻어터질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스님이 달려왔고, 스님의 등에 업혀 수덕사로 돌아왔다. 그러다 잠이 들어 스님의 등에 그만 오줌을 쌀 때도 있었다.


도신은 노래가 좋았다. 기타를 끼고 살았다. 그러나 스님은 보는 족족 부숴버렸다. 그럼에도 도신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 중광 스님이 수덕사에 들렀다가 일주문 근처에서 도신이 부르는 ‘한오백년’을 들었다. 중광 스님은 노래를 향한 도신의 열망을 알아봤다. ‘저 놈에게는 노래가 법문이로구나.’ 중광 스님은 도신을 서울로 데려갔다. 도신은 절집 지하에 연습실을 차리고 국악가요그룹을 결성했다. 밤낮없이 연습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스님이 서울로 올라와 곧장 연습실로 쳐들어왔다. 스님은 기타와 드럼 등 악기를 닥치는대로 부숴버렸다. 그리고 죽비로 도신을 내리쳤다. 매질은 다른 스님들이 달려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번은 외딴 섬 암자인 간월암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도신은 자신의 음악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런데 귀에 익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하고 있는 것이냐.”


뒤돌아보니 은사스님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고깃배를 타고 건너온 것이었다. 스님은 말없이 손짓으로 기타를 달라고 했다. 기타를 건네받은 스님은 무릎에 끼고 힘을 주었다. 기타 대가리가 와지끈 부러졌다.


“중이 참선을 해서 중생을 구제해야지, 금쪽같은 시간을 기타를 치며 노래로 허비하다니.”


도신은 그런 꾸지람에도 다시 기타를 샀고, 스님은 보는 족족 부숴버렸다. 그런 중에 도신이 국악가요 앨범을 발표하고 이름을 얻었다. 어느 날 보니 산사음악회의 스타였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역시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도신은 은사스님이 참석하는 행사에는 일체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숨을 수 없었다. 천안의 어느 불사 준공식에서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는데 은사스님이 계셨다.


“도신아, 너는 은사와 인연을 끊을지언정 노래는 끊지 못할 녀석이구나.”


스님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도신은 가슴이 미어졌다.


“상좌가 스승의 눈물을 흘리게 하다니, 이 얼마나 못난 짓인가.”


그래도 도신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2001년 어느 날 법장 스님이 도신을 불렀다.


“너의 노래는 유언(有言)이냐, 무언(無言)이냐?”


도신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산에 가면 서광사라는 절이 있다. 젊은 날 나도 주지를 맡았던 절이다. 비록 법당이 작지만 앞으로 호서지방 중심포교당으로 키워보거라. 그런 후 내 질문에 답을 해 보거라.”


은사스님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기타를 튕기던 손에 목장갑을 끼고, 오선지 대신 법당 설계도를 봐야 했다. 떠돌며 노래하던 도신에게 붙박이 생활은 고역이었다. 그래도 묵묵히 은사스님의 원력을 이어받아 불사에 전념했다. 마침내 2005년 8월 연건평 400평의 3층 법당 기공식을 갖게 됐다. 당시 총무원장이던 법장 스님은 말썽장이 상좌가 이룬 ‘가피’를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한 달 후 법장 스님이 돌연 입적했다. 게송 하나만 남기고 이승의 색신을 벗었다.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입도 없고 밑도 없다./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 2008년 6월 완공된 서광사 3층 법당.

 


도신은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스님이 남겨놓은 원대한 구상을 실천하기로 했다. 그것은 법장 스님이 넘겨준 설계도대로 3층 법당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시주는 부족하고 문제는 계속 생겼다.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노래 품을 팔기도 했다. 중간에 몇 번이나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법장 스님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스승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2008년 6월 법당 준공 기념법회를 열었다.


“스님 속만 썩이던 상좌 도신이가 스님의 원력을 이뤄냈습니다.”


도신은 참 많이 울었다. 법당을 바라만봐도 가슴이 저미고 스승을 향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도신 스님은 아직도 울고 있다. 법장 스님 사이버 추모관에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스님. 오늘은 강릉불교사암연합회 개최 주관인 불교 희망나눔음악회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지금껏 노래를 하면서 크고 작은 보람을 느껴왔지만 오늘처럼 보람을 느낀 날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 노래를 통해서 부처님의 법을 생각했고, 부처님의 자비를 생각했습니다. 스님께 꾸중 받으며 불러온 노래지만 더욱 더 정진해서 좋은 부처님 말씀을 노래로 전달해야 된다는 사명감을 느끼는 날이었습니다. 제자가 스님께 많이도 속을 썩여 드렸는데 아직도 철이 덜 들어 이것만은 저버리지 못하는 제자를 용서하시고 더욱 훌륭한 포교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서광사에서는 해마다 산사음악회를 성대하게 열고 있다. 수천 명이 몰려와 환호성을 지른다. 도신 스님은 밴드와 함께 등장하여 노래를 부른다. 이날만은 법장 스님도 제자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법장 스님은 도신에게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하라고 이르셨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하화중생의 길임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도신 스님은 그 가르침대로 덕숭 문중과 법장 문도들이 상대를 배려하며 화합하는 진정한 도반이기를 바라고 있다.


도신 스님은 이제 법장 스님 기념관 건립과 스승의 유지인 노인복지회관을 설립하는데 매진하고 있다. 불사를 완성하면 서광사를 떠나고 싶다. 불음을 노래에 담아 전하는 떠돌이가 되고 싶다. 언젠가 기타 하나 둘러메고, 스승이 내린 물음 하나 품고 길을 나설 것이다.


“네 노래는 무언이냐 유언이냐?”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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