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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수산죽비(首山竹)

기자명 법보신문

무거운 집착 털어버리고 경쾌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다

언어와 논리 집착하면
거짓말쟁이 역설 빠져


수산 스님 죽비 화두는
이중구속의 함정일 뿐


죽비 집착 없는 대답은
무엇이라도 정답이다

 

수산(首山) 화상이 죽비(竹)를 들고 여러 스님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이것을 죽비라고 부른다면 이름에 집착하는[觸] 것이고, 그렇다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사실에 위배되는[背] 것이다. 이제 바로 너희들이 말해보라!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무문관(無門關) 43칙 / 수산죽비(首山竹)

 

 

▲그림=김승연 화백

 


1. 이중구속은 선불교 이해에 도움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 1980)과 그의 주저 ‘마음의 생태학(Steps to an Ecology of Mind)’은 우리의 마음이나 선불교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전개했던 ‘이중 구속(the double bind)’이라는 이론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내 말을 듣지 마라!” 아이는 당혹스러울 겁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인지, 듣지 않아야 하는 것인지 헛갈리기 때문이지요. 만일 앞으로 어머니가 하는 말을 일체 따르지 않는다면, 아이는 “내 말을 듣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이는 “내 말을 듣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을 어긴 것이 됩니다. 당연히 아이는 헛갈릴 수밖에 없지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 어머니의 말을 어긴 것이 되고, 어머니의 말을 어기면 어머니의 말을 듣는 꼴이 되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중 구속의 상황입니다.


베이트슨은 이중 구속 상태에 빠질 때 우리는 정신 분열증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어겨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면, 정신이 분열될 수밖에요. 그렇지만 사실 이중 구속 이론은 베이트슨만이 이야기했던 것은 아닙니다. 서양 철학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을 아실 겁니다. 어떤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도 바로 거짓말쟁이로 유명한 크레타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 참이라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셈입니다. 지금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반대로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 거짓이라면 그는 참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경우 그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다시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헛갈리기만 합니다.


20세기 서양의 지성인들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풀기 위해서, 아니 정확히 말해 ‘역설’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도 그렇고 수학자 괴델(Kurt Gödel, 1906 ~1978)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들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없애는 데 성공했던 것일까요. 불행히도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만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언어와 논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크레타 사람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지요.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주장을 어느 크레타 사람이 말하는 순간, 역설이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역설로 보이는 이유는 그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대부분의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이야기했다면, 역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자신은 거짓말쟁이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2. 언어 집중하면 모순에 빠져

 

러셀이나 괴델은 모두 ‘모든’이라는 말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역설은 불가피한 것 아닐까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친구한테 배신을 당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지요. 지금까지 한 번도 본인은 자신의 친구들을 배신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분노와 비탄은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그는 절규합니다. “모든 인간은 배신자야!” 과연 여기서 ‘모든 인간’은 절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가 만날 미지의 모든 친구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모든’이란 지금 자신을 배신한 그 친구에게만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제 신뢰할 만한 친구가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그는 ‘모든’이라는 말을 썼던 겁니다. 배신감을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일종의 과장법인 셈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역설은 언어를 엄격하고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사용하려는 집착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베이트슨이 말한 이중 구속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 말을 듣지 마라”는 어머니의 명령을 글자 그대로 집착했을 때, 아이는 이중 구속에 빠지고 심하면 정신 분열증에 걸리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정말 아이가 자신의 말을 듣지 말기를 원해서였을까요. 물론 아닐 겁니다. 아이가 자신의 말을 너무나 듣지 않아 화가 나서 했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듣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라!”이거나 아니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니!” 바로 이것이 어머니가 아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가령 옛날 어른들도 예쁜 손주를 보고 “밉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말에 집착했다면, 손주는 할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자신을 아껴주어야 하는 할아버지가 오히려 자신을 밉다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43번째 관문을 지키고 있는 수산(首山, 926~993) 스님을 만날 든든한 채비가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이 43번째 관문에서 수산 스님은 제자들을 ‘이중 구속’의 함정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죽비를 들고서 죽비라고 말해서도 안 되고, 죽비라고 말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물어봅니다. 자신이 들고 있는 죽비를 가리키며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작은 죽비 하나가 제자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견고하고 높아만 보였을 겁니다. 제자들은 정신 분열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마 온몸을 땀으로 적시고 있었을 겁니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화두, 역설에 지나지 않는 화두를 던지면서 스승이 자신들을 괴롭히니 말입니다. 아마 제자들의 뇌리에는 “죽비, 죽비, 죽비”라는 글자가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3. 유머, 집착없는 가벼운 마음

 

제자들은 스승 수산 스님이 막고 있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문은 수산 스님이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막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논리적이었던 겁니다. 논리적으로 죽비는 죽비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전자는 참이고 후자는 거짓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추론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승은 죽비라고 말해서도 안 되고, 다른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죽비’라는 말과 그와 관련된 논리적 추론에 집착한다면,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을 겁니다. 마치 ‘모든’이란 말에 집착했던 러셀이나 괴델, 혹은 ‘내 말을 듣지 말라!’는 말에 집착했던 아이처럼 말입니다. 간단한 화두로 제자들을 이중 구속에 빠뜨린 수산 스님의 능력은 탁월한 데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수산 스님은 제자들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 마음 상태에 있는지 보여주었으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베이트슨의 주저 ‘마음의 생태학’을 다시 넘겨볼까요. 베이트슨은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어느 날 어떤 직장인이 근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다. 직장의 다른 동료가 집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가볍게 그에게 묻는다. ‘어, 거기에 어떻게 갔니?’ 그러자 그 직장인은 대답했다. ‘자동차로.’ 그는 글자 뜻 그대로 대답한 것이다.” 웃음이 터져 나올 만한 재미있는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에서 우리의 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거기에 어떻게 갔니?’라는 동료의 질문에 사례의 주인공이 ‘자동차로’ 갔다고 말하는 대목일 겁니다. 주인공은 동료가 질문한 말을 표현한 그대로 집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라는 말을 집에 돌아간 방법으로 들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요. 주인공의 동료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도대체 일은 하지 않고 왜 집에 갔니?”라는 물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만일 이것을 죽비라고 부른다면 이름에 집착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사실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수천수만 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죽비에 집착하지 않고서 대답했다면 어떤 말이라도 정답일 테니까 말입니다. 아마 방귀를 우렁차게 내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대답에는 웃음기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갔니?”라는 질문에 “자동차로”라고 대답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터뜨렸던 것과 같은 웃음 말입니다.

 

▲강신주
웃음, 혹은 유머는 언어에 집착하지 않아야 가능한 법이니까요. 집착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만들고 그만큼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유머는 언어와 논리에 집착하지 않는 가벼운 마음, 그러니까 자유로운 마음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스님, 농담도 잘 하시네요.” 아마 수산 스님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하실 지도 모릅니다. “자식, 지랄을 하네. 아주 지랄을 해.”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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