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주소의 비극
도로명주소의 비극
  • 김형규 기자
  • 승인 2013.06.10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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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도로명주소 전면 시행
우리 도로 실정에는 부적절
지명 속에는 지역특성 담겨
국민 불편 고려해 재고돼야


벼농사가 잘 된다는 화곡동(禾谷洞), 소나무로 둘러싸인 송내동(松內洞), 도선국사의 전설이 깃든 도선동(道詵洞), 이성계에 쫓긴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피난 도중 절에서 몰래 올린 식사를 했다고 해서 붙은 식사동(食寺洞). 나라 어디를 가도 그 땅엔 반드시 이름이 있다. 지명(地名)이다. 지명 속에는 지역의 특성이 담겨 있다. 가지 않아도 지명만 들으면 그 마을을 알 수 있다. 역사와 문화, 전설을 알 수 있고 지리적인 특성과 땅의 성질까지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지명은 그냥 땅의 이름이 아니라 오랜 세월 조상들이 그 땅과 함께 일궈내 지혜의 산물이다.


그러나 내년부터 국토의 아름다운 지명 상당부분이 사라지게 됐다. 주소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국무회의를 통해 주소변경을 확정하고 2011년 현행 지번 중심의 주소 대신 도로명주소로의 변경을 공표했다. 주소로 인한 국민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란 설명이다. 그런데 환영해야 할 국민들이 반발했다. 별 불편 없이 사용하던 주소를 왜 변경하느냐며 따졌다. 특히 문화, 학계, 종교계를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거세다. 편리성도 없고 지명이 가진 문화적인 측면을 간과한 졸속행정의 극치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정부는 2014년 도로명주소로를 전면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번주소는 토지를 필지단위로 나눠 번호를 부여한 토지중심의 주소체계다. 이에 반해 도로명주소는 도로와 건물을 중심으로 번호를 붙여 사용한다. 도로명주소를 쓰는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역사가 짧다. 따라서 대부분이 계획도시다. 도로가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어 도로에 번호를 붙여 사용하는 것이 용이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필요에 따라 도시와 마을이 생긴 우리나라는 도로가 복잡할 뿐 아니라 미로처럼 생긴 골목길이 많아 도로에 번호를 붙여 사용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정부는 15만개에 이르는 도로이름을 일일이 만들어가며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다보니 보석의 종류를 딴 도로명에서, 친일파의 이름이 들어간 도로명까지 역사성도, 문화성도 없는 이름들이 양산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사실 주소 때문에 불편을 겪는다는 정부의 생각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주소가 어렵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택배와 배달문화를 가질 수 있었을까. 더구나 인터넷과 내비게이션의 발달로 지금은 누구나 쉽게 주소를 찾을 수 있다. 오히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국민의 불편만 가중될 뿐이다. 부동산 매매 및 전월세 계약 때마다 현행 지번주소를 그대로 사용해야하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불교청년회와 뜻있는 사람들이 도로명주소 철회를 위해 나섰다. 지명 전문가와 전 문화부장관 등 60여명이 위헌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들은 전통지명을 서구식 주소로 바꾸려는 것은 창씨개명 못지않은 민족말살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당장 도로명주소가 시행되면 4만여개에 이르는 시도군구의 마을이름이 사라지게 된다.

 

▲김형규 부장

200여개에 이르는 유서 깊은 불교식 지명도 지도에서 지워질 것이다. 국민들은 고향을 잃게 되고 아이들은 ‘OOO로’라는 이름의 길바닥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가뜩이나 지금 국민들의 삶이 팍팍하다. 그런데 정부는 불편을 던다면서 오히려 국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있다. 이제라도 정부가 번지수를 제대로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형규 kimh@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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