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행위는 무의미한 일상에
목표 잡아주며 삶의 질 높여
도덕 결핍된 재능, 자신 해쳐
좋은 스승 롤모델 삼고 정진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듣는다. 그러면서 보고 듣는 것에 의지해서 연상을 한다.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보다는,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며 추구하는가가 중요하다. 무의미하고 평범한 일상의 행위가 좋은 연상에 따라서 훌륭한 행위로 바뀔 수 있다. 좋은 연상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선한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일상의 행위와 상응하는 선한 연상 행위는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 준다. 힘든 삶을 살고 있더라도 선한 연상 행위를 연습하면, 자신을 안정되고 행복하게 하며, 삶의 목표와 방향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 정행품 경문을 보자.
“누각에 올라갈 때면, 중생들이 정법의 누각에 올라 일체의 법을 뚜렷하게 보기를 발원해야 한다.”
여기서 ‘누각’은 여러 층으로 된 건축물을 말한다. 과거에는 부유하고 존귀한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누각도 함께 지었다. 평민들은 누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누각에 올라가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대에는 여러 층으로 되어있는 건물이 너무도 많다. 도시에는 상가와 아파트 관공서 등 고층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얼마든지 있다. 백층이 넘는 건물도 사람들이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꿈에서도 생각을 못해본 상황이다. 우리는 그 건축물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른다. 오르고 내려오는 반복된 행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며 무엇을 얻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단순한 위치이동만 반복하고 있는가.
‘중생들이 정법의 누각에 올라’에서 ‘중생들’이란 모든 사람 더 나아가서는 모든 생명 있는 존재를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정법의 누각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정법의 누각’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안목이 되는 경계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도덕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우리의 학문 수준을 끌어올리고 우리의 기능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우리가 서있는 경계의 수준이 높아야 도덕수준도 따라 높아진다. 이렇게 해야 정법의 누각에 오른다고 말할 수 있다.
학문이나 재능만 높고 경계나 도덕의 수준이 낮으면 그 학문과 재능이 우리를 해치게 된다. 학문과 재능은 양날의 칼과 같고 도덕과 경계 수준은 그 칼을 다루는 사람과 같다. 사람에 따라 그 손에 있는 칼이 다양한 역할을 한다. 최근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에 가서 우리나라 대통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성추행의 문제를 일으켜 국제적인 망신을 사고 있다. 아마도 미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상황이 올 것 같다. 이 청와대 관료는 학문도 있고 재능도 있는 사람이다. 학문과 재능을 인정받아 그만한 지위에 올라간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행위는 그 영향이 자기 한 사람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가정을 대표하는 사람은 가정에, 도시를 대표하는 사람은 도시에,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은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 파급효과가 큰 만큼 좋게 행동하면 복을 크게 짓고 나쁘게 행동하면 복을 크게 까먹는다. 부정적인 행위 때문에 작게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크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결과가 나타날 즈음에는 이미 때가 많이 늦은 것이다.
민주화되고 개방적인 현대의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학문과 기능을 익히고 있다. 학문과 재능을 익히는데 열중한 나머지 도덕적 판단 행위 습관에 대해서는 잠시 덮어두고 있다. 그렇게 할아버지 세대가 덮어두었고 아버지 세대도 덮어두었다. 자식세대에서는 도덕적 판단과 행위 습관을 익히고 연습할 롤 모델이 주변에서 사라져 버리고 있다. 습관은 윗세대를 본받아 아랫세대가 배우는 것이다. 윗세대가 준비가 안됐는데 어떻게 모범을 보여줄 수가 있겠는가. 보고 배울 수 있는 사회적 자산이 점점 더 적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점점 더 이기적인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다. 이기적인 욕망이 충동질하여 나쁜 습관이 발생한다. 그 나쁜 습관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장소가 없어지고 있다.
‘일체의 법을 뚜렷하게 보기를 발원해야 한다’에서 일체의 법을 뚜렷하게 본다는 것은 경계가 높다는 것이다. 높은 경계가 주는 안목은 높은 누각에서 바라보는 안목에 비유된다. 누각에 한층 더 올라가면 그만큼 더 멀리 보인다. 우리의 경계가 높아지면 우리의 판단과 행위 습관이 주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것도 결과의 단계에서가 아니라 원인의 단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원인의 단계에서 결과를 분명하게 예측할 수 있으면 그 삶이 나아가는 방향의 행위와 습관은 자연스럽게 좋아진다. 경계가 높아지면 자기가 자기의 스승이 된다. 우리의 경계가 낮을 때는 자신의 경계가 낮은 것을 알아차리고 좋은 스승을 모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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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스승은 우리의 욕망에 부응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좋은 행위와 습관에 부응하는 사람이다. 낮은 경계에 있는 우리가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스승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대단히 복이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도암 스님 송광사 강주 doam1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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