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암 사성선원장 일오 스님
월명암 사성선원장 일오 스님
  •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3.06.1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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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 생각에 세상 바뀌니‘무심’으로 정토 장엄해야

 

▲월명암 사성선원장 일오 스님.

 

 

월인 스님 은사 상연대 출가 후
근 50년‘이뭣고’화두 정진일로


거울, 암명·대상 관계없이 비추듯
청정 자성·불성도 여여하게 작용


분별시비 떨친 부설거사 열반송
무심·무상·무주 관통했기에 가능

번뇌망상 당장 끊을 수 없다면
집착하지 않는 마음부터 내 보라

 

산길은 있어도 찻길은 없는 월명암. 약 2Km의 산행을 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월명암을 일러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라 한다.‘ 다툼이 없는 곳’이니 적정처(寂靜處)다. 호남정맥의 첩첩산중과 운해(雲海)가 빚어내는 풍광은 말 그대로 절경이라 한다. 하지만 월명암을 오르는 동안 산은 자신의 자태를 내보이지 않았다. 비 개인 직후 일어나는 산 속의 안개와 바다에서 밀려 온 해무가 합쳐져 지척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월명암 절경도 3대의 복을 쌓아야만 접할 수 있는 것일까? 후드득! 나뭇잎에 남아있던 빗방울이 떨어지며 목덜미를 적신다. 산의 사자후가 들리는 듯하다.


‘입산을 허락하기에 방금 내리던 비를 멈추게 하지 않았는가!’


통일신라의 부설거사는 도반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법왕봉(현 쌍선봉) 아래 한 칸의 초가를 지어놓고 묘적(妙寂)이라 이름 했다. 선정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간다는 의미의 묘입선적(妙入禪寂)을 뜻함이다. 부설전(浮雪傳,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 140호)이 전하는 일화 한 토막을 벗삼아 산을 오른다.


어느 날 부설거사는‘부부 인연을 맺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는 묘화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이를 지켜 본 영조 스님은‘부질없는 지혜가 헛된 견해를 이루고 편벽된 자비는 애연에 이루고야 말았네’라며 안타까워 했고 영희 스님은 ‘수행은 대나무 쪼개듯 해야 하고, 득도는 채찍을 휘갈기듯 해야 하네’라며 날을 세웠다. 이별을 고한 두 도반을 위해 부설 거사는 솔잎차를 건네며‘도란 검은 비단을 입느냐 흰옷을 입느냐에 있지 않다. 모든 부처님들은 생명체들을 이롭게 하려는데 뜻을 두었다’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후 부설거사는 부인 묘화와 아들 등운, 딸 월명과 함께 정진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영조, 영희 스님이 찾아왔다. 부설 거사는 병 3개에 물을 담아 대들보에 매달고는 각자 하나씩 깨뜨리기로 했다. 공부가 얼마큼 되었는지 점검해 보자는 의도였다. 영조와 영희 스님이 병을 때리자 병이 깨지면서 물이 쏟아져버렸다. 부설 거사가 때린 병도 깨졌지만 물은 보에 매달려 있었다.

부설거사가 일갈했다.
“몸에 본성의 진상이 나타나니 생멸에 얽매이지 않는다. 무상(無常)한 환신(幻身)이 삶과 죽음을 따라서 옮겨 흐르는 것은 병이 깨어져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진성(眞性)은 본래 신령하여 밝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물이 공중에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대들이 두루 높은 지식있는 이를 찾아보았고 오랫동안 총림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하여 생과 멸을 섭수(攝受)하며 진상(眞常)을 삼고 환화(幻化)를 공(空)으로 하여 법성(法性)을 지키지 못하는가.”


부설거사는‘벌써 열반에 들려 했으나 자네들을 만나려고 여태 미루었다’며 이내 게를 지었다.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이 없고/ 귀로 듣는 소리 없으니 시비가 끊어졌다./ 분별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니/ 다만 심불이 스스로 귀의함을 보도다.’


부설거사는 일념으로 단정히 앉아 허물을 벗고는 열반에 들었다. 훗날 월명은 온 몸이 보랏빛 구름에 휩싸여 홀연히 서쪽 하늘로 향했다. 이를 지켜 본 등운은‘반야삼매에 깊이 들어 극락 가는 길이 기쁘다’는 시를 짓고는 미소를 머금으며 입적했다. 지금의 월명암은 부설거사의 딸 월명을 기려 이름 한 것이고 사성선원(四聖禪院)은 부설, 묘화, 등운, 월명 네 명의 사성에서 유래 됐다.

 

월명암의 부속 암자인 묘적암은 부설거사가 수행했던 초가 한 칸의‘묘적’터라 추정돼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사성선원장 일오 스님은 이 묘적암에 주석하고 있다.

 

 

 

 


일오 스님은 1965년 고향인 함양 상연대에서 월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월인 스님이라면 6.25한국전쟁 직전 잿더미로 변한 월명암에 법당을 세우며 부설거사의 법을 이은 스님으로서 ‘숨은 도인’이라 불렸다. 스승으로부터‘이 뭣고’화두를 받은 일오 스님은 행자시절부터 지금까지 해인사 조사전, 화엄사 탑전, 백장암, 도솔암 등 전국 제방선원에 머물며 정진해 왔다. 대승경전은 물론 초기경전에도 밝아 선교를 겸수한 선승으로 정평 나있다.
일오 스님에게 여쭈어 볼 건 부설 거사가 열반송에서 이른‘심불(心佛)’이다. 무엇을 심불이라 하는지, 또 그 심불이 스스로 귀의함을 본다는 건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지 궁금했다.


심불 질문에 일오 스님은‘거울’을 들어보였다. “거울은 만상을 비추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했지요?”그렇다. 산을 비춘다 해서 거울이 산이 되는 건 아니다. 바위를 비춘다 해도 거울은 틀어지지 않는다. 거울은 대상에 따라 비출뿐 왜곡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일오 스님은 하택 신회의‘거울’(明鏡)을 꺼내들었다.

“남양화상문답집징의에 나오는 신회 선사와 장연공 사이에 오고 간 선문답 일부분입니다. 신회 선사가 말하지요. ‘형상을 비춘다고 말하는 것은 대상물이 있기 때문에 그 모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장연공이 다시 묻습니다. ‘만약 대상이 없으면 비춥니까? 비추지 않습니까?’어떻습니까. 대상이 없으면 거울은 아무 것도 비추지 않나요?”
대상이 없다면 비출 게 없으니 거울은 비추지 않는다고 말해야 옳다. 신회 선사는 어떻게 답했을까?
“신회 선사가 말합니다. ‘명경은 대상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언제나 비추고 있습니다.”뇌리를 강타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거울은 밝은 곳에서만 비추는 게 아닙니다. 어두운 곳에서도 비춥니다. 항상 여여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렇다. 어두운 곳에서 거울을 보았을 때, 거울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어둠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내 눈의 망막에 확연하게 잡히지 않아서 안 보이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거울을 통해 내가 안 보인다 해서 거울이 나를 비추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어두운 가운데서도 거울은 나를 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말이다.
일오 스님은 월암 스님이 쓴‘친절한 간화선’에 신회의 명경에 대한 해설이 잘 돼 있으니 꼭 한 번 보라며 책에 설명된 자성견(自性見)과 수연견(隨緣見)을 전했다.


“대상이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거울의 본성이 항상 비추는 것은 중생의 자성이 청정하여 지혜의 광명이 세계를 비추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를 일러 자성견이라 합니다. 수연견은 대상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작용적인 면을 말합니다. 방안이 어두울 때 대상을 분명하게 볼 수 없는 것은 자성견이 작용하지만 수연견은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자성견은 밝고 어둠에 관계없이 보는 견이고, 수연견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작용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성, 불성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식들이 전한 청정자성, 불성, 참나를 신회는‘명경’으로 바꿔 좀 더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시비와 분별을 떨쳐내면 나와 세상을 차별 없이,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음을 일오 스님은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설거사의‘심불’은 신회의‘명경’과 같다는 뜻이다. 그렇다 해도 의구심이 남는다. 어떻게 해야 심불이 될 수 있는가. 어찌해야 거울처럼 항상 여여하게 비추면서도 대상에 따라 왜곡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체 모든 존재가 인연화합으로 생긴 것이므로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습니다. 그러기에 무상이라 합니다. ‘나’라는 존재도 찰나 생멸의 과정 속 연기적 작용에 따라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라고 내세울 게 없지요. 그러기에 무아라 합니다. 나와 세상이 다 무상이요 무아인데 집착할게 있겠습니까?”
하지만 시비분별을 떨쳐내기란 녹록치 않다. 연기를 알아도 이를 체득하지 못한 중생으로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일체유심조라 했듯이 한 생각을 어떻게 일게 했는가에 따라 언행도, 세계도 달라집니다.”무서운 이야기다. 내 생각 하나에 이 세계는 예토가 될 수도 있고, 정토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이른 것처럼 한 생각조차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합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었다는 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내었다는 것의 의미합니다. 역설적으로 보면‘한 생각도 낸 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일러 무심이라 합니다.”


‘단 번에 이러한 무심을 내기란 불가능 하다’고 전제하면서도 스님은‘연기적 세계관을 알았다면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어려움이 놓였다 해서 산이 꺼져라 한 숨 쉴 일은 아니라고 한다. 비록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들었더라도 뒤돌아서면 훌훌 털어버리려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성선원에서 내려다 본 월명암과 내변산 전경.

 


부설 거사도 그랬던 것이다. 연기법 속의 무상을 확연하게 알았기에 무심하려 노력하며 정진 하다가 궁극에는 시비분별을 떨쳐 버렸다. 시비분별을 떠나야만 무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달리 보면 무심하려 노력하는 중에 시비분별의 굴레도 벗을 수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숨통이 트인다. 번뇌와 상이 일어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작은 노력도 정진이기 때문이다. 갈 길이 멀지만 시작은 할 수 있다.


밖을 내다보니 어느 새 해무가 걷혔다. 월명암 사성선원에서 내려다 본 내변산은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일오 스님이 한마디 이른다.
“왜 산상무쟁처라 했는지 알겠지요?”
“예, 참 멋진 풍광입니다.”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을 수 있는 그 자리를 무쟁처라고 하지요. 풍광은 그저 그림일 뿐입니다.”


한 방 맞았다. 내면의 대립과 갈등, 시비와 분별을 떨친 그 자리가 무쟁처 아닌가. 그 자리, 어디 있는가. 서산 대사의 사자후가 들린다. ‘가히 우습다 소를 찾는 사람이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소요 스님은 그 자리서 깨달았다 하는데, 내 눈에는 절경만 가득하다.
그래도 참 좋다! 이런 호사 누려도 되는가!
penshoot@beopbo.com

 

일오 스님은
1965년 월인 스님을 만나 출가. 근 50년 동안 해인사 조사전, 화엄사 탑전, 백장암, 도솔암, 남해 염불암 등의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곡성 태안사 선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월명암 사성선원장을 맡아 후학을 제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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