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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소멸과 고갈

기자명 이성운

화탕은 소멸, 지옥은 고갈

음양이 대비된 한시 미학

의례문 곳곳의 일반 현상

 

‘천수경’ 6향 2~3구의 서술어 ‘화탕(火湯)’은 고갈(枯竭)되고 ‘지옥’은 소멸(消滅)돼야 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1970년대 어느 출판사에서, 중국의 경전이 그렇다고 하며 -아마 중국 독체(讀體, 1601~1679)의 ‘천수천안대비심주행법’이나 ‘선문일송’ 등을 보았을 듯하다-이 두 구를 교체한 ‘천수경’을 보급해 오고 있다. 해서 소멸과 고갈의 의미에 대한 상징 조작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국내 고본은 어떤가. 가범달마 역 천수다라니경, 불공(不空)의 천수다라니, 지례의 ‘천수안대비심주행법’이나 또 국내의 ‘오대진언집’(1485)에서 ‘석문의범’에 이르기까지 ‘화탕자고갈(火湯自枯竭)’과 ‘지옥자소멸(地獄自消滅)’로 표기된 본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원본도 잘못됐으면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마 이 구절이 생성된 시기는 가범달마나 불공이 천수다라니경을 번역한 7~8세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때는 근체시풍이 유행하던 시기다. 근체시형의 핵심은 대구와 대조를 바탕으로 한 기승전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가를 짓는 한시미학을 유념해야 한다. 중국의 한시 작풍을 거론할 자리는 아니지만 작시(사)의 기본 작법이나 자원(字源)의 이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화탕(火湯)의 화(火)는 불기운이고, 탕은 펄펄 끓는 물 기운을 나타낸다. 곧 양기와 음기를 표현하고 있다. 이의 술어로 쓰이는 소멸(消滅)을 분석해 보면, 소(消)는 수(?)+초(肖)로 물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나타내고, 멸(滅)은 수(?)가 불(火)의 위세(戈)를 점점 사라져 없어지게 하는 형상의 자(字)이다. 결국 물의 기운이 줄어듦과 불의 기운이 사라져 없어짐을 나타내는 소멸은 화탕의 서술어로 최적이다. 또 고갈(枯竭)이 지옥의 서술어로 쓰이는 것은, 지옥은 추계(杻械)와 같은 형틀에 얽매이는 고통이므로 그와 같은 형구가 다해져야 함을 나타낸다. 갈(竭)은 갈진(碣盡), 갈력(竭力)의 용례에서 보듯이 재물 등 물자 등이 없어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옥의 구조물이 사라짐을 나타내는 서술어의 용례로 합당하다. ‘영고성쇠’(營枯盛衰)라는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고갈(枯竭)의 의미는 구조물이 사라지는 데 쓰이는 것이다.

 

의미가 전성돼 현재 우리의 언어 용례로 보면 그럴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적지 않다. 도산(刀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도산은 최절(嶊折)인데 ‘최’(嶊)는 꺾였지만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을 말하고, ‘절’(折)은 꺾여 나감으로 분절된 것을 나타낸다. 꺾이기도 잘려 나가기도 하는 상태이다.

 

▲이성운 박사

소멸에서 또 하나 우리가 얻어 볼 수 있는 것으로 뉴스라는 의미의 ‘소식’(消息)이란 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소’(消)는 없어지는 것이고 ‘식’(息)은 생기는 것이고 늘어나는 것이다. 소화(消化)나 자식(子息)이라는 말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없어지고 생기고 하는 것들이 곧 소식인 것이다. 만일 이를 잊고 있다면 우리는 음과 양, 양과 음의 콘트라스트 미를 놓치게 된다. 뒤편에 나오는 참회게송의 백겁 대 일념, 적집(積集) 대 돈탕(頓蕩) 등 의례문의 곳곳에는 한없는 문예미가 붓다의 깨침을 구하고 중생과 함께하는 자비의 미학이 널려 있다. 더없이 훌륭하지만 지나치게 신심에 묶이면 그 미(味)를 향유할 수 없을 것이다.

 

동국대 강사 woochun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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