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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삼좌설법(三座說法)

기자명 법보신문

언어로 세상을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라

소승은 집착 고치는 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해 문제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일종의 약물중독 치료서


언어 함정에서 벗어나야
집착 끊어 내는 것 가능

 

 

▲그림=김승연 화백

 

 

앙산 화상이 미륵부처가 있는 곳에 가서 세 번째 자리에 앉는 꿈을 꾸었다. 그곳에 있던 어느 부처가 나무망치로 받침대를 치며 말했다. “오늘은 세 번째 자리에 있는 분이 설법을 하겠습니다.” 앙산 화상은 일어나 나무망치로 받침대를 치며 말했다. “대승의 불법은 네 구절을 떠나서 백 가지의 잘못을 끊는다. 분명히 들으시오. 분명히 들으시오.”

무문관(無門關) 25칙 / 삼좌설법(三座說法)


1.선종은 대승불교 전통의 적장자

 

많은 학자들은 선종이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 사상이 동아시아, 특히 중국화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 학자들은 이미 선종은 불교의 외양만 갖고 있는 노장(老莊)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선종은 이단 불교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입장이 옳은지 한 번 생각해볼까요. 불교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팔정도(八正道, āryāṣṭāṅgomārgḥ)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사유[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집중[正念]’, ‘올바른 참선[正定]’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싯다르타가 제안했던 여덟 가지 방법입니다. 불교학자들은 팔정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불교를 근본불교(fundamental Buddhism)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선종은 근본불교이기보다는 지엽적인 불교, 혹은 이단적인 불교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선종을 상징하는 선사들의 행동거지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제자의 손가락을 자르고, 심지어는 고양이를 칼로 죽입니다. 올바른 행동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부처를 똥막대기라고 부르면서 거친 말과 역설적인 표현을 즐기는 것 같으니, 올바른 사유나 올바른 말에도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는 좌선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없다고도 역설하기도 하니, 이것은 올바른 집중과 올바른 참선마저도 패키지로 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팔정도의 가치를 맹신하고 있는 사람들 눈에는 선사들이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와 같은 사람으로 보였을 겁니다. 아무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도덕경(道德經)’ 1장을 보면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지금 통용되는 도가 영구불변한 도는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장자(莊子)’에도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는 구절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도는 걸어 다녀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어느 것이든 현재 눈앞에 존재하는 길, 혹은 방법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장 사상의 정신이지요. 그런데 선사들도 거침없이 싯다르타의 도, 즉 팔정도를 짓밟아버립니다.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싯다르타가 제안했던 도가 영구불변한 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선종의 언행에서 근본불교가 아니라 자꾸 노장 사상의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선종은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있는 노장 사상일까요.


2.소승은 싯다르타 말을 신성시

 

선사들의 정신을 담고 있는 다양한 선어록(禪語錄)을 살펴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선종은 대승불교 전통의 적장자였기에 싯다르타의 팔정도마저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말입니다. 불교 철학사에 따르면 싯다르타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만들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의 다음 제자들에 이르러서는 심각한 딜레마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경전에 기록된 싯다르타의 말 자체를 신성시하는 경향이 벌어지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시기가 소승불교의 시대입니다.


나가르주나(Nāgārjuna,150?~250?)로 대표되는 대승불교가 출현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팔정도만이 아닙니다. 경전에 기록된 모든 언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아이러니한 기풍이 불교 내부에 팽배했던 겁니다.

 

집착이란 질병을 고치려고 싯다르타가 고안한 약이 남용되는 사태가 발생한 셈입니다. 이렇게 정리해도 좋을 것 같네요. 집착을 고치기 위해 싯다르타는 다양한 약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먼 제자들은 싯다르타의 약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심지어는 습관적으로 먹기 시작했던 겁니다. 한 마디로 약에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두통이 있을 때 두통약을 먹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두통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두통약을 먹는 것은 더 심각한 사태 아닌가요. 두통에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두통약에 중독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가르주나가 중도(中道, Madhyamā-Pratipad)라는 싯다르타의 개념을 자신의 슬로건으로 삼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병이 있을 때에만 약은 적절하게, 그러니까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가르주나의 주저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 은 제목이 나타내는 것처럼 ‘중도’에 입각하여 모든 개념적 집착을 치료하려는 이론서, 혹은 일종의 약물중독 치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책이 단순히 불교 전통을 넘어서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마저 인류 최고의 이론서라고 극찬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0세기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서양 지성인들이 고민하게 된 언어나 개념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를 나가르주나는 이미 충분히 숙고했고, 심지어는 앞으로 서양 철학자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마저 미리 정리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로서는 경악할 일이었지요. 어쨌든 ‘무문관’의 25번째 관문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힘든 길을 숨 가쁘게 달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선종은 승복을 입은 노장 사상이 아니라, 나가르주나로부터 시작된 대승불교의 정점에 서 있는 전통이었던 겁니다. 사실 선종의 슬로건 ‘불립문자(不立文字)’도 언어나 문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나가르주나의 생각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지요.


3.언어가 집착을 낳는다

 

꿈이나마 미륵부처의 처소에서 이루어진 앙산(仰山, 815~891) 스님의 설법만큼 분명한 증거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앙산도 말하지 않던가요. “대승의 불법은 네 구절을 떠나서(離四句) 백 가지의 잘못을 끊는다(絶百非).” 여기서 ‘네 구절’, 즉 ‘사구(四句)’란 집착을 발생시키는 언어가 가진 네 가지 언어형식을 가리키는 나가르주나의 전문 용어입니다. ‘같음[一]’, ‘다름[異]’, ‘있음[有]’, 그리고 ‘없음[無]’이라는 이름으로 네 가지 언어형식은 불립니다.

 

그렇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같음’과 ‘다름’이라는 두 가지 언어형식입니다. ‘있음’의 언어형식과 ‘없음’의 언어형식은 모두 ‘같음’과 ‘다름’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인도철학이나 소승불교 전통에서는‘같음’의 언어형식을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satkāryavāda)에, 그리고 ‘다름’의 언어형식을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 asatkāryavāda)에 연결됩니다. 인중유과론이 원인 속에 이미 결과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라면, 인중무과론은 원인 속에는 어떤 결과도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린다”는 말을 생각해볼까요. 인중유과론으로 읽으면 ‘내리다’는 사태는 ‘비’라는 사태가 이미 가지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비’와 ‘내린다’라는 두 가지 사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중무과론으로 읽으면 ‘내린다’는 것은 ‘비’라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겁니다. 이 경우 ‘비’와 ‘내린다’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비가 내린다면, 인중유과론으로 읽은 비는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비는 내리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반대로 진짜로 비가 내린다면, 인중무과론으로 읽은 비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겁니다. 이 경우 비는 내리는 것과 무관하기 때문에 비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하시지요. 그렇지만 어쨌든 이렇게 네 가지 근본적인 언어 형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리는 비일 수도 있고, 내리지 않는 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있는 비일 수도 있고, 없는 비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언어에 깊게 빠져드는 순간 우리는 비에 집착하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요.


‘같음’, ‘다름’, ‘있음’, ‘없음’이란 근본적인 언어형식 각각이 다시 이 네 가지 언어형식과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4×4=16이 되지요. 이어서 과거, 미래, 현재라는 세 시제가 가능하니까 16×3=48이 됩니다. 여기에 다시 미래 완료와 과거 완료라는 두 가지 시제도 가능하기에, 48×2=96이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에 원형이 되는 네 가지 언어형식을 합하면 마침내 100가지 가능한 언어형식들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집착으로 몰고 가는 구체적인 언어형식들은 100가지인 셈입니다. 이제 “네 구절을 떠나서 백 가지의 잘못을 끊는다”는 앙산의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강신주
그러나 사실 ‘같음’의 언어형식과 ‘다름’의 언어형식, 이 두 가지만 끊어내면 우리는 언어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언어로 세상을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냥 비가 내릴 뿐입니다. 비라는 주어 때문에 비라는 실체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내린다는 동사 때문에 내림이란 어떤 작용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잘못하면 언어형식 때문에 ‘내리지 않는 비’라는 말도 안 되는 관념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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