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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종성칠조(種聲七條)

기자명 법보신문

한걸음 걷지 않은 2보 3보는 관념에 불과하다

등산로가 여럿이지만

지금 걷는 등산로만이

실제 존재하는 등산로

 

머릿속 생각을 비우고

한걸음한걸음 이어가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운문(雲門) 화상이 말했다. “세계는 이처럼 넓은데, 무엇 때문에 종이 울리면 칠조(七條)의 가사를 입는 것인가?”

무문관(無門關)16 / 종성칠조(種聲七條)

 

 

▲그림=김승연 화백

 

 

1. 그때그때의 일보만이 진보다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인문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벤야민의 탁월함은 그의 영향력만을 살펴보아도 분명해집니다. 처음 우리는 그를 미학자라고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이라는 논문으로 매체 미학이란 새로운 연구 분야를 만들었으니까요. 카메라, 영화, 그리고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스마트폰 등 매체가 변하면, 예술의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체 미학은 매체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예술의 성격을 다루는 연구 영역입니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그는 가장 탁월한 사회철학자 혹은 정치철학자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없다면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년 출생)과 같은 우리 시대 탁월한 정치철학자도 나올 수 없었을 정도니까요.

 

‘무문관’에 마련된 48개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갑자기 벤야민을 꺼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벤야민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 때문입니다.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의 일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망치가 머리를 강타하는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요. 누구나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꿈꿉니다. 현재 자신이나 사회의 모습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을 보수적(conservative)이라고 부르지요. 반면 개인의 삶이든 사회이든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미래에의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진보적(progressive)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지금 벤야민은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라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1보를 걷지 않으면 2보도 3보도 n+1보도 우리는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1보를 걷지 않고서 꿈꾸는 2보도 3보도 그리고 n+1보도 단지 백일몽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말해 2보보다는 3보를, 3보다는 4보를, 아니 100보를 꿈꾸는 순간, 우리는 1보 내딛는 것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학창시절 누구나 경험했던 적이 있을 겁니다. 자그마치 교과서 100쪽이나 벼락치기를 해야 합니다. 이럴 때 첫 페이지부터 천천히 공부하면 될 것을, 우리는 자꾸 30쪽을 넘기고 50쪽을 넘겨보고, 98쪽을 넘겨봅니다. 이러다가 무의미한 시간만 흘러가고 공부는 되지 않는 경험을 해보았을 겁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우리는 후회하게 됩니다. 그냥 첫 쪽부터 한 장 한 장 넘겼다면, 그래도 50쪽이나 60쪽 정도까지는 공부를 했을 텐데 하는 때늦은 후회인 셈이지요.

 

2. 매너리즘은 조건반사적인 삶

 

벤야민의 통찰은 우리를 서늘하게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 걸음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걸음을 내딛지 않고 논의되는 2보나 3보는 단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한 걸음을 걷지 않으면서 우리 뇌리에 떠오르는 2보나 3보는 구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덧없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2보나 3보, 혹은 n+1보만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1보 내딛기가 무섭거나 1보 내딛는 것을 회피하려는 무의식 때문은 아닐까요. 공부를 하려고 하지만 성적이 잘 나지 않는 학생들이 종종 상급학교로 진학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헛되게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운문(雲門, 864~949) 스님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를 음미할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춘 것 같습니다. “세계는 이처럼 넓은데, 무엇 때문에 종이 울리면 칠조(七條)의 가사를 입는 것인가?”

 

가사(袈裟, kaṣāya)는 승복을 입은 뒤 겉에 걸치는 일종의 망토와 같은 겁니다. 보통 가사는 오조 가사, 칠조 가사, 구조 가사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한 삼의(三衣)란 바로 이 세 가지 가사를 말합니다. 오조니 칠조니 구조니 할 때 조(條)라는 글자는 가사에 붙인 직사각형 베 조각의 수를 가리키는 단위입니다. 그러니까 칠조가사는 가사 위에 일곱 개의 베 조각을 덧대서 기운 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불이나 혹은 공식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입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스님들이 칠조 가사를 포함한 가사를 걸친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공식적인 행사에 정장을 갖추어 입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공식적 행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스님들은 누구나 가사를 걸칩니다. 여기서 무엇인가 찜찜한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요. 일체의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겠다는 투철한 소망을 품고 있는 스님들이 종이 울리면 자동적으로 가사를 걸치고 공식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니까요.

 

운문 스님의 사자후는 선방(禪房)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매너리즘을 질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는 이렇게 넓고 그만큼 가야할 곳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데, 너희들은 어떻게 선방에 틀어박혀 이다지도 매너리즘에 빠져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고도 너희가 주인의 삶을 살려는 소망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정도의 가르침이라면 ‘무문관’의 16번째 관문은 너무나 쉽지 않은가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으신가요. 다른 모든 관문이 얼마나 통과하기 어려웠는지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는 이처럼 넓다(世界恁廣闊)”는 운문의 이야기를 쉽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자유인이 살아가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일몽의 세계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1보도 내딛지 않는 사람이 꿈꾸고 있는 2보, 3보, 그리고 n+1보의 걸음처럼 말입니다.

 

3. 당당한 한걸음이 주인의 삶

 

설악산에 오르는 비유를 들어볼까요. 1708m 대청봉(大靑峰)을 정상으로 하는 웅장한 산 설악산에 오르는 등산로는 무한히 많습니다. 오색약수터로 올라도 되고, 천불동 계곡을 아니면 가야동 계곡을 따라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개척되지 않은 수많은 등산로도 이론적으로 가능하지요. 등산 지도를 보거나 혹은 직접 속초나 인제로 가서 설악산을 올려보면, 정말로 대청봉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고 많아서 우리가 자유롭게 고르면 될 것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마십시오. 다양한 등산로 중 어느 길이 좋을까를 자유롭게 생각하는 순간, 사실 우리는 대청봉에 이르는 1보를 내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일 오색약수터에서 출발하는 길을 잡았다면, 우리는 천불동 계곡에서 출발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대로 오색약수터를 박차고 1보를 내딛는 순간, 우리의 뇌리에는 수많은 등산로가 봄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기묘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으로야 천불동 계곡으로도 오색약수터 길로도 가야동 계곡으로도 설악산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색약수터 길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몸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는 천불동 계곡 길도 가야동 계곡 길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오색약수터에서 정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으면서도 가지 않는 다른 방향을 떠올리며 번뇌하고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당당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으로 걸어가지 못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오색약수터 길로 출발했는데, 마음은 다른 등산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집착 아닌가요. 이런 집착 때문에 우리는 오색약수터 길에 들어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어느 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칠조의 가사를 입은 스님이어도 되고, 아니면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이어도 되고, 집안일 돌보는 전업주부여도 좋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이 한 걸음 내딛은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제대로 이어간다면, 우리는 정상에 혹은 주인의 삶에 이르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덤으로 1500미터 이상 되는 높은 산에 올라가는 방법을 하나 가르쳐드릴까요. 대개 5시간 이상 걸리는 힘든 산행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선 자신이 한 걸음을 내던진 그 등산로를 긍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어떤 길이든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등산로로 갔으면 좋았겠다”라는 후회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후회가 항상 우리를 더 지치게 하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몇 번이나 산에 올라가는 것이 힘들 때가 올 것입니다. 가슴이 터질 듯이 호흡이 가쁘거나 다리가 뻣뻣해져 쥐가 나기도 합니다. 이때 저 멀리 도달해야 할 정상을 보는 것은 자제해야만 합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 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은 우리를 더 쉽게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강신주
그렇다면 이렇게 힘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발만 보고 터벅터벅 한 걸음씩 옮기면 됩니다. 아니면 열 걸음을 걷고 저 바위에서 쉬어야지 하고 걷는 겁니다. 이러다보면 어느 새 도달할 것 같지 않았던 정상이 눈 앞에 다가오게 될 겁니다. 아마 그곳에서 여러분들은 벤야민이나 혹은 운문 스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흐뭇한 미소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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