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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건봉일로(乾峰一路)

기자명 법보신문

네 마음에 이미 부처가 들어앉아 있다

부처마음 중생마음은
마음의 두 가지 모습
본질은 하나로 같아


물·얼음·수증기도
본질은 H2O로 동일


한 스님이 “세계의 모든 부처들은 ‘하나의 길[一路]’로 열반문에 이른다고 하지만, 도대체 그 ‘하나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묻자, 건봉(乾峰) 화상은 주장자를 들어 공중에 하나의 선을 긋고 말했다. “여기에 있다.” 뒤에 그 스님은 운문(雲門)에게 이 문답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운문은 부채를 들고 말했다. “이 부채가 뛰어올라 33천(天)에까지 올라가 제석천(帝釋天)의 콧구멍을 찌르고, 동해의 잉어를 한 방 먹이면 물동이가 기울어지는 것처럼 비가 엄청나게 올 것이다.”

무문관(無門關) 48 / 건봉일로(乾峰一路)

 

 

▲그림=김승연 화백

 


1. 스피노자 범신론 불교와 일맥상통

 

스피노자(Spinoza, 1633~1677)라는 철학자를 아시나요.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철학자로 범신론(pan theism)을 주장한 철학자로 유명하지요. 범신론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pan)’이 ‘신(theos)’이라고 주장합니다. 서양 정신을 지배했던 기독교에 따르면 신은 세계만물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옳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신보다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지요. 신은 만드는 자이고, 인간 등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니까요. 인간을 폄하하는 기독교적 사유를 붕괴시키기 위해, 다시 말해 인간의 능동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범신론을 주장한 겁니다. 스피노자나 기독교 전통 모두에서 신은 능동적인 생산자를 의미하니까요. 그래서 모든 것이 신이라는 주장은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논의일 수 있습니다.


집착과 번뇌에 사로잡힌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부처가 된다는 불교 전통이 스피노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불교 전통도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능동성과 생산성을 부여하니까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실체(substance)’와 ‘양태(mode)’라는 스피노자의 개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간단한 비유로 이 개념들을 설명해보도록 할까요. 물이 가장 좋은 비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은 자연계에서 세 가지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0℃ 아래에서는 얼음이란 고체로 있고요, 0℃에서 100℃ 사이에서는 물이라는 액체로 있습니다, 100℃ 이상에서는 수증기라는 기체로 존재하지요. 여기서 그러니까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라는 세 가지 상태가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양태’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반면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라는 상태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H₂O가 바로 ‘실체’에 해당합니다.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었거나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고 해서, H₂O라는 실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H₂O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물이거나 얼음이거나 아니면 반드시 수증기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내 눈 앞에 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H₂O이고, 얼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H₂O이고, 수증기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H₂O라는 겁니다. 이제 실체와 양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해지셨나요. H₂O가 얼음, 물, 혹은 수증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는 다양한 양태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체와 양태는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른 겁니다. 동양 전통에서는 이것을 ‘이이일(二而一), 일이이(一而二)’라고 표현하지요. 아마 중국 최대의 형이상학자 주희였다면 실체와 양태 사이의 관계를 ‘불상리(不相離), 불상잡(不相雜)’이라고 이야기했을 겁니다. ‘서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섞여 있지도 않다’는 것이지요.


2. 실체, 현상 떠나 존재 할 수 없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Mahāyāna-śraddhotpāda-sāstra)’이란 책은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인도보다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불교 이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선불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2세기 경 인도 중부에서 활동했던 이론가 마명(馬鳴, Aśvaghoṣa)이 지었다고 알려진 책인데요, 지금은 한문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원효(元曉, 617~686) 스님 때문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책이지요.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는 지금까지 나온 주석서들 중 14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승기신론’의 어느 측면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던 선불교의 선사(禪師)들마저 매료시켰던 것일까요. 하나의 마음에는 두 가지 양태가 가능하다는 발상이었습니다.


‘대승기신론’은 시작부터 하나의 마음에는 두 가지 양태가 있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합니다. 한 번 직접 읽어볼까요. “일심(一心)이란 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등장하는 ‘문(門)’이라는 말은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양태’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승기신론’은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이라는 ‘실체’에는 두 가지 ‘양태’가 있다는 겁니다.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이 바로 그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자신과 세계를 보는 부처의 마음이 진여의 마음이라면, 집착 때문에 자신과 세계를 왜곡하여 항상 일희일비하는 일반인의 마음이 바로 생멸의 마음입니다.


부처의 마음이나 일반인의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란 실체의 두 가지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다시 H₂O를 비유로 들어볼까요. 당연히 물을 얻으려고 얼음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 얼음이 없어지는 순간, H₂O도 사라질 테니까요. H₂O가 사라진다면, 우리가 아무리 물을 얻으려고 해도 물을 얻을 수가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마음을 얻으려고 일반인의 마음을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인의 마음을 제거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도 사라질 겁니다. 마음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부처의 마음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왜 선사들이 ‘대승기신론’을 좋아했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나 ‘직지인심(直指人心)’에는 하나의 마음, 그로부터 파생되는 부처의 마음과 일반인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불립문자를 이야기해도 제자를 가르치거나 중생들을 이끌려면, 언어적 표현은 방편으로 불가피한 법입니다. 비로 이것이 선사들이 ‘대승기신론’에 열광했던 이유였던 겁니다.


3. 생멸의 마음은 황당무계한 상상

 

‘대승기신론’이라는 무기를 몸에 숨기고 있다면, ‘무문관’의 48번째 관문을 지키고 있는 건봉(乾峰) 스님이나 운문(雲門, 864~949) 스님을 전혀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건봉 스님은 생몰년대가 확실치는 않지만 운문 스님과 거의 동시대 사람이라고 합니다. 불행히도 건봉 스님과 운문 스님을 우리보다 먼저 만난 어느 무명 스님은 별다른 무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치열하게 노력했던 그 스님은 ‘수능엄경(首楞嚴經, Śurāṅgamasamadhi-sūtra)’에 등장하는 한 구절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부처들은 하나의 길로 열반문에 이른다(十方薄伽梵, 一路涅槃門)”는 구절입니다. 무명 스님은 ‘하나의 길’을 알고 싶은 겁니다. 그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도 열반에 이를 수 있으니까요. 마치 가고 싶은 곳에 이를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명 스님의 절절한 질문에 건봉 스님은 허공에 주장자로 한 획을 긋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있다.” 여기서 사실 무명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주장자로 허공에 새겨진 한 획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아니 사실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순간 무명 스님의 마음은 공중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주장자에 마음이 쏠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건봉 스님은 무명 스님의 마음을 끌어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렁찬 고함보다 더 커다란 울림을 가진 침묵의 사자후를 던지고 있는 겁니다. “네가 찾는 하나의 길이란, 바로 네 마음이다. 지금 공중의 한 획을 보고 있는 마음, 그 활발발(活潑潑)하게 살아있는 마음! 알겠느냐! 이 멍청아!” 그렇습니다. 지금 건봉 스님은 무명 스님이 가지고 있는 마음 중 부처의 마음을 바로 보여주고 있었던 겁니다. 진여의 마음을요.


불행히도 여기서 무명 스님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혹 떼려다 혹을 더 붙인 격입니다. ‘수능엄경’의 구절도 난해하기만 한데, 이제 더 난해한 가르침도 받았으니까요. 도대체 공중에 주장자로 그어진 그 한 획은 무슨 뜻일까. 건봉 스님의 제스처를 이해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을 때, 다행히 운문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당연히 건봉 스님의 한 획의 의미를 물어보았겠지요. 그러자 운문 스님은 이번에는 주장자가 아니라 부채를 들고 이야기합니다. “이 부채가 뛰어올라 33천(天)에까지 올라가 제석천(帝釋天)의 콧구멍을 찌르고, 동해의 잉어를 한 방 먹이면 물동이가 기울어지는 것처럼 비가 엄청나게 올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일입니다.

 

▲강신주

운문 스님은 건봉 스님보다 한 술 더 뜨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무명 스님은 알까요. 운문 스님은 지금 집착과 잡념에 사로잡힌 일반인의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요. 바로 생멸의 마음 말입니다. 운문 스님은 무명 스님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겁니다. 생멸의 마음이란 황당무계한 상상이나 거대한 뻥과 같다고 말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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