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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차별 계율과 파시즘

기자명 법보신문

파시즘이 비난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사람들 사이에 우열을 나누고 열등한 종자들의 씨를 말리려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유럽 곳곳에서 외국인들을 쫓아내라고 주장하는 인종주의자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 역시 파시스트로 분류된다. 생각해보면 사람들 사이에 우열의 위계를 만들어 차별을 했던 인종주의는 사실 파시즘 이전에 서구문명에 널리 퍼져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인간들 사이에 ‘신분’이라는 차별을 두었던 근대 이전의 모든 사회가 이와 다르지 않았다.


서양 근대 사상은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지만 인간과 인간 아닌 것에 관한 한 아주 편벽된 차별의 관점을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선언하지만 소나 말, 은행나무 같은 다른 존재자가 그렇다고는 누구도 말한 적이 없다. 흑인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을 노예로 사냥하고 사고팔던 것은 이와 관련되어 있다. ‘휴머니즘’의 시대라는 르네상스 시대, 인디언이 인간인가 아닌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여기서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은 다른 동물처럼 사냥하고 사고팔 수 있는 대상임을 뜻한다.


이는 평등에 대한 생각이 인간으로 국한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에 관한 한 불교만큼 멀리 나간 사유는 없다. 조주 스님의 유명한 무자 화두에도 나타나듯이 스님들 사이에서 개나 고양이에게 불성이 있는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 부처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사유했다는 증거다. 화엄학은 먼지 하나에도 시방삼세의 우주가 들어있다는 가르침을 통해 인간과 개, 은행나무와 먼지 등 세상 만물이 모두 우주 전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함을 알려준다. 이처럼 우주적 스케일에서 평등을 사유한 사상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다. 근대적 평등을 넘어서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근본적 평등을 사유하는 법을 나는 여기서 배웠다.


사유만이 아니라 실천에서도 그렇다. 예불 때마다 북과 목어, 운판, 그리고 종을 치는 것은 인간 아닌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매일 새벽부터 정성을 들이는 것 아닌가. 몇 년 전 수많은 이들이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올라왔던 것도, 또 천성산 도롱뇽의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한 것도, 4대강 사업의 중단을 위해 소신의 정성을 들인 것도, 인간의 이득을 위해 숫자도 세어지지 않은 채 죽어가는 생명들을 위한 실천 아니었던가.


그래서 비구니의 피선거권을 인정하여 종교 안에서 남녀평등의 길을 가려던 시도는 차라리 때늦은 감이 있다. 우주적 차원에서 모든 중생의 평등을 말하는 불교가, 남녀 간의 불평등을 2000년이나 지속해왔다는 것은 실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모든 이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나, 여성들의 출가를 인도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였던 석존의 태도는 여성들을 남성들의 재산으로밖엔 여기지 않던 끔찍한 카스트의 나라 인도에서 매우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것이었다는 걸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비구니에 대한 차별적 계율은 2000년 전의 그런 시대적 조건에 기인하는 것이었을 게다.

 

▲이진경 교수

그런데 우주적 평등을 말하고 실천하는 불교의 지도자들이 여성이 대통령을 하는 시대에 비구니의 피선거권을 거부했다는 소식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는 능력에서 남녀 간에 우열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시대착오적인 차별을 반복했다가 스캔들이 되었던 파시즘의 사례를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진경 교수 solaris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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