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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무등산 문빈정사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의 눈빛으로 민중과 함께 했던 살아있는 ‘인간의 절’

광주민주항쟁 치열했던 5월
부처님오신날 시위대 찾아가
음식 나누며 그들과 함께해


광주시민 마음 탁발 하고자
84년 ‘무등민족문화회’ 창립
진보단체에 용기·영감 전해


민중 의식 일깨운 사람들이
도량에 남긴 삶과 이야기는
어떤 성보보다도 귀한 보물

 

 

▲어머니산 무등의 끝자락에 서 있는 문빈정사. 1980년대 이 땅의 민주인사들은 문빈정사에 머물며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야기 했다. 지금도 문빈정사에서는 '인권과 정의가 흐르는 세상이 정토'라는 원력이 성성히 살아 숨쉬고 있다.    

 


지난 봄 한반도에 전쟁 공포가 엄습했다. 남과 북이, 또 미국이 ‘말(言) 전투’를 벌였다. 백성들은 뒷전이었다. 동족을 향해 쏟아낸 저주들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남과 북에서 쏘아올린 막말들은 휴전선 철책에 걸려있다. 그래서인지 올해 장마전선은 유독 휴전선 부근을 오르내렸다. 천기(天氣)의 상식을 벗어나 반도의 허리에 걸려있는 장마전선이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민초들의 시커먼 탄식들이 아직도 한반도 상공을 맴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먹구름을 이고 남녘으로 향했다. 분단의 아픔을 보듬고, 이 땅의 광기를 씻어내고 있는 절집을 찾아갔다. 내려갈수록 구름이 엷어지더니 남도의 하늘은 말짱했다. 광주 무등산의 첫 절, 문빈정사(주지 법선 스님)에 들었다. 한낮 무등산은 고요했다. 거대한 불볕이 푸른 숲을 지그시 조이고 있었다.


무등산, 아직도 들으면 아리고 가슴 뭉클해진다. 무등산은 화엄경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등급을 매길 수 없는 높은 산이며 또 등급이 없는 평등의 산이다. 정상에는 천왕봉(天王峰), 지왕봉(地王峰), 인왕봉(人王峰)이 서 있다. 하늘과 땅, 그 사이의 인간 모두가 귀하니 새삼 무등의 이름을 받들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은 귀하기에 등급이 없다.’


무등은 어머니산이다. 온갖 풍상을 안으로 다스리는 남도의 어머니 같다. 비범함을 품고 평범하게 솟아있다. 육산(肉山)인데도 그 안에 기묘한 바위들을 품고 있다. 어디서 쳐다봐도 그저 무던하지만 막상 올라가 살피면 옹골지다. 서툰 기교는 밝은 빛 앞에서 들통이 나는 법, 그래서 빛고을 사람들은 화려함을 경계한다. 무등이 있어 교만하지 않다.


1980년 5월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민주와 정의를 외치는 시민들이 오직 광주에 산다는 이유로 피를 흘려야 했다. 광주민주항쟁 이후 시민들은 한과 슬픔을 품고 무등산에 올랐다. 어머니 품에서 분노를 뱉고 눈물을 쏟았다. 무등은 투정을 받아주던 어머니에서 피눈물을 받아내는 어머니가 되었다. 무등산은 오월 광주의 시작과 끝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어머니 무등산의 말을 전해야 했다. 마침내 문빈정사가 대신 말하기 시작했다.


문빈정사가 민중의 아픔에 동참한 것도 시절 인연인가. 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문빈정사에는 고불총림 백양사에서 온 지선스님 문도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은 5월 21일이었다. 광주항쟁에서 가장 잔혹한 날이었다. 시민들과 계엄군이 곳곳에서 충돌했다.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발포했다. 방송국이 불타고 시민들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온 도시가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주요 거리는 피에 젖었다.


부처님 생일이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문빈정사 스님들은 부처님에게 바칠 밥과 떡, 그리고 과일을 리어카에 실었다. 절을 나와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시가지를 지나 ‘사람’을 찾아갔다. 위험했지만 거침이 없었다. 도심에서 시위대를 만나 음식을 풀었다. 부처님 대신 시민들이 먹었다. 문빈정사가 시민 속으로 들어간 ‘사건’이었다. 이후로 문빈정사는 민족, 사회, 역사를 끌어안고 불의를 꾸짖었다. 그렇다면 남도 민주화 산실 문빈정사는 어떤 절인가.


무등산 증심사 계곡은 ‘절골’ ‘무당골’ 등으로 불렸다. 증심사 아래는 약간의 논과 밭이 있었을 뿐 야생초 우거진 거친 땅이었다. 계곡에서는 무당들의 굿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증심사 아래 논과 밭을 장문빈이라는 여인이 사들였다. 여인이 계곡을 찾아가 척박한 논과 밭을 사들인 것은 꿈 때문이었다. 여사의 꿈 속에 증심사 아래 초가 한 채가 나타났다. 다가가 방문을 여니 염주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증심사 계곡을 찾아갔더니 정말 초가 한 채가 있었다. 여사가 스님을 찾아가 꿈 얘기를 했다. 스님은 주변을 둘러보고 “이곳에 절을 지으면 나라와 중생을 위해 좋은 일이 될 것”이라 말했다. 여사는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문빈정사란 현판을 내걸었다. 이렇게 해서 전혀 절 같지 않은 절 이름이 생겨났다. 1959년 4월의 일이었다.


문빈정사가 민중의 사찰로 뿌리를 내린 것은 지선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이다. 1980년 12월 지선 스님이 오자 장문빈 보살은 대뜸 ‘나라와 중생을 위해 써 달라’며 사찰의 모든 재산을 넘겼다. 절 식구들은 감동했다. 모두 보살의 이름인 ‘문빈’만은 그대로 살려서 보살의 뜻을 기리기로 했다.


당시에는 5·18의 상처가 도처에 널려있었다. 분노와 슬픔을 버릴 데가 없는 광주 시민들은 무조건 무등산에 올랐다. 함부로 고함지르고 맨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도 시민들의 정서를 외면하고 광주 불교계가 신군부의 머리인 전두환을 위한 조찬회를 열겠다고 했다. 시민들은 격분했다. 특히 무등산을 들고나면서 산 아래 첫 절 문빈정사에 화풀이를 했다. 절 문짝을 발로 차고 개새끼, 소새끼, 중새끼라 욕했다. 문빈정사를 향해 오줌을 갈기는 사람도 있었다. 지선 스님은 비로소 광주 참상을 알게 됐다. 하늘에 대고 욕하는 시민들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욕설이 산중 선승들을 깨운 셈이었다. 욕설이 곧 무등산의 죽비였다. 지선 스님과 문빈정사는 마침내 민주화 운동과 종단 개혁의 한 가운데로 나아갔다. 지선 스님은 강연도 하고 시위에도 앞장섰다. 서럽고 답답하고 가슴 미어지는 현장에서 스님을 찾았다. 부처의 가르침은 길 위에 있었다. 스님은 6월 항쟁을 비롯해 숱한 민주화투쟁의 ‘얼굴’이 되었다.


1984년 5월 문빈정사에 의미 있는 불사가 있었다. 그것은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탁발하는 것이었다.

 

 

▲1984년 무등민족문화회 창립 당시의 사진.

 

 

‘무등민족문화회’를 창립하고 회보 ‘무등’을 발간한 것이다. ‘글이 빛난다’는 문빈(文彬)이 빛을 뿜는 쾌거였다. 외양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잘 어울리는, 곧 ‘논어’에 나오는 문질빈빈(文質彬彬) 자체였다. ‘민족과 함께, 사회와 함께, 역사와 함께’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죽임의 시대에 침묵하며 관망만 하던 불교의 역사를 참회했다. 지선 스님은 발원문을 통해 갇혀 있는 틀을 깨고 열려있는 불교로 거듭나자고 호소했다.


“불교는 깨달은 사람에 의한 깨달음의 세계로 들게 하는 각(覺)의 종교이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종교이지 지식의 세계, 관념의 세계, 절대자의 영원한 노예의 세계가 아닙니다.”


무등민족문화회는 이후에 나타난 ‘포럼’이나 ‘광장’의 효시였다. 백기완, 홍남순, 고은, 김지하, 문병란, 신용하, 송기숙 등 각계의 재야 인사들을 초청해서 강연회를 열었다. 무등민족문화회는 훗날 불교운동을 이끌었던 각종 진보적 단체에 용기와 영감을 불어넣었다.


문빈정사에는 숱한 일화가 스며있다. 이 땅의 거의 모든 민주인사들은 문빈정사에 머물며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얘기했다. 고 김남주 시인도 문빈정사에서 지선 스님의 주례, 고은 시인의 사회로 결혼식을 올렸다. 오래된 성보문화재만 귀한 것이 아니다. 당대 민중의 의식을 깨우며 앞서간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이야기도 귀하다. 문빈정사에서 생산된 일화들은 어떤 성보문화재 못지않게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성보물이 없어도 문빈정사는 특별하다. 그리고 문빈정사의 일화들은 후세들의 가슴을 적실 것이다.


주말에는 수 만 명이 문빈정사 앞을 지나 무등산에 오른다. 지난 3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에는 외지인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요즘 문빈정사 앞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있다.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입구의 현수막은 정권을 향한 준엄한 꾸짖음이다. 

 


또 대웅전을 오르면 연꽃 모양의 무늬를 새겨놓은 계단이 나타난다. 문빈정사를 사랑하는 작가들이 힘을 모았단다. 그 울력이 아름다웠다. 그 앞에 불사를 주도한 주지 법선 스님이 이런 염원을 적어 놓았다.


‘혼탁한 세상사에 지친 이들이 이 연꽃 계단을 올라 부처님의 진리를 만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궁극에는 인권과 정의가 흐르는 정토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습니다.’

 

 

▲문빈정사를 사랑하는 작가들이 그린 연꽃.

 


인권과 정의가 흐르는 세상이 곧 정토세상이며 불국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곧 부처님 세상이니 사람을 섬기라는 뜻일 것이다.


문빈정사는 이렇게 깨어 있다.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슬픈 사람들이 찾아온다. 절 앞 너른 마당에는 시도 때도 없이 시민들이 몰려와 구호를 외친다. 깃발을 흔들고 북을 두드린다. 문빈정사는 묵묵히 이들을 굽어본다.

 

염불보다 구호가 더 큰 사찰, 문빈정사. 사찰 안팎이 심각하면 시국이 수상하다. 주지 법선 스님은 “앞으로도 문빈정사는 수행과 나눔의 공간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했다. 더 열심히 사회를 살피고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뽑아 이를 모두에게 나눠주겠다는 다짐이다.


문빈정사도 창건한지 반세기가 넘었다. 지난 2009년 봄 창건 50주년기념 법회를 열었다. 그날 많은 민주인사들이 모여 암흑의 문을 열어제낀 지난 50년을 더듬었다. 또 앞으로도 문빈정사는 사찰의 고유명사가 아닌 부처님 정법을 실천하는 우리 사회의 대명사가 될 것이라는 바람을 전했다.

문빈정사는 어머니산 무등의 맨 끝에서 하늘의 뜻을 전하고, 마을의 끝에서 하늘에 인간의 염원을 전하고 있다. 부처의 눈빛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절, 문빈정사.

 

본지 고문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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