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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회 이사장 도업 스님

상생 화엄이치 안다면 야생화라도 못 밟는다

지월스님 ‘인연법’ 한마디
심금 울려 20대 출가결심


일본 교토대서 석박사 학위
경주 동국대 강단서 25년
한국 화엄학 대가로 칭송

 

 

▲도업 스님

 

 

20대 청년이 용탑에서 해인사로 건너오는 외나무 다리에서 지월 스님을 만났다. 지월 스님이라면 지난 7월 입적한 조계종 원로의원 도견 스님의 은사 아닌가. 당돌하게도 ‘불교란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어느 순간, 지월 스님의 혜안이 번뜩였다. 한 번 보면 그릇의 크기를 단번에 가늠했던 선지식의 선기가 발현된 것임에 분명하다. “깨달으면 못 하는 게 없습니다.” 이쯤이면 ‘정말 못 하는 게 없습니까?’라 다시 묻는 게 보통일 터.


청년은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무학대사는 깨달았습니까?”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의 조우 후 왕사가 된 무학대사가 이 순간 왜 나온 단 말인가? 당황할 지월 스님이 아니다. “도인입니다.” 청년의 ‘비수’가 날았다. “그럼, 유교를 망하게 하고 불교를 일으켜야 했지 않습니까?” 청년은 결과적으로 무학대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을 외면한 것 아니냐 따져 묻고 있다. 비수인들 선지식 가슴에 꽂힐까. “인연법입니다!”


흡족한 대답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인연법’이란 한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한마디로 가슴에 ‘딱 꽂혔다.’ “저도 출가할 수 있습니까?” “거룩한 말입니다.”


청년은 지월 스님을 따라 해인사로 들어갔다. ‘딱 사흘만 있어 보자!’ 관음전에 앉으니 멀리 원담암이 보였다. ‘뭔가 될 것 같다’는 자신감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절에서 생활하는 그 자체가 좋았다. 며칠 후 풍채가 좋은 스님 한 분이 눈에 들어와 무작정 그 스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스님이 당도한 곳은 범어사.


범어문중으로 청년을 인도한 스님은 용성 스님의 제자 동헌 스님이었다. 스님을 따라 갔던 청년이 바로 동헌 스님을 은사로 삭발한 도업 스님이다. 도업 스님은 용성 스님의 손자뻘이다.


도업 스님은 지난해 10월 대각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평소엔 부산 해운대 화엄법계사에서 주석하지만 오늘은 대각회 업무 차 서울 목동 법안정사에 머물 것이라는 전갈을 받고 서둘러 나섰다.


1972년 범어사 강원을 졸업 한 후 동국대 승가학과 1기로 입학한 도업 스님은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 유학하며 화엄학을 전공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로 부임해 25년 간 후학을 지도한 후 2009년 정년 퇴임했다. 도업 스님은 ‘화엄학의 대가’라 칭송 받고 있다. 스님의 저서 ‘화엄경사상 연구’와 각종 논문은 화엄 연구자들에게는 필독서로 꼽힌다. 화엄바다에서 건져낸 스님만의 심오한 경지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찍은 은사 동헌, 도업 스님과 대각회원. 동헌 스님은 대각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도업 스님이 간직하고 있는 화엄의 보물 하나 엿볼 요량으로 여쭈어 보았다. ‘80 화엄경’의 요체를 전할 수 있는 일언 하나는 무엇인지 말이다. 스님은 즉답 대신 미소를 보인다. “용성 큰 스님께서 화과원을 조성한 이유를 혹 아시는지요.”


화과원(華果院)! 육조 혜능 선사는 자신이 지은 절 문 앞에 ‘화과원’이라는 글씨를 걸어놓았다고 한다. 열매(果)란 ‘깨달음’을 말함이요, 선지식을 뜻하니, 나름대로 의역해 보면 깨달음의 결실이 맺어지는 곳이란 뜻. 용성 스님이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을 세운 것도 선지식 출현을 기대했기 때문일 터이다. 또 하나 있다. 용성 스님은 무엇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선사의 뜻을 담은 ‘선농일치’ 사상을 주창하며 몸소 실천해 보였다.

 

화과원 건립의 본 뜻은 선농일치에 있을 것이다. 도업 스님은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한다.


“화과동시(花果同時)! 꽃과 열매가 동시에 피고 맺는다는 뜻인데 연꽃이 대표적입니다.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지 않습니까. 연꽃을 대변하는 일언이 또 있지요. 오염된 곳에서도 항상 청정하다는 처염상정(處染常淨). 화과동시, 처염상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를 체득해야 깨달음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화엄을 연구하며 논문을 준비하던 도업 스님은 딱 한 곳이 막혀 단 한 줄의 논문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것에 걸림이 있었다니 의외다. 대승불교권에서 ‘일체유심조’에 대한 해석은 너무도 많지 않은가.


“일체(一切)가 목적어이고 심(心)이 주어입니다. 주어부터 배열해보면 유심조일체 즉,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심(心)을 신(神)으로 대체해 보고, 일체를 천지(天地)로 대체해 보세요. 유신조천지(또는 유신창조천지) 직역하면 신이 하늘과 땅(모든 것. 우주만물. 일체)을 만들었다는 뜻이 됩니다.”


마음을 신으로 대체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신선하다. 이게 가능하다면 신의 진정한 의미, 나아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도 잡힐 듯하다.


“세상에 나온 인공물이 마음에서 나왔다 하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연꽃 한 송이!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연꽃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마음과 신이란 무엇이기에 하늘과 땅, 일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연기가 곧 생멸’ 의미 알면
일체유심조 깊은 뜻 확연


108참회 기도하지도 않고
‘연기’ 운운해야 소용 없어
‘법’ 알았다면 바라밀 정진

 

 

▲도업 스님은 일본서도 구하기 힘든 경전전집류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사유와 고민의 연속이었지만 진척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하며 ‘대승기신론’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법이 중생심이다.(法者 謂衆生心)’ 이후 이와 관계된 몇 개의 의문점을 풀어낸 뒤 논문을 물 흐르듯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한 예를 들었다.


“법(法)은 연기를 말하고, 중생심은 생멸을 뜻합니다. 따라서 ‘법이 중생심’이라는 말 속에는 ‘연기는 생멸’이란 뜻도 갖고 있는 겁니다.


연꽃은 실체가 없습니다. 씨앗이라는 인(因)과 물과 빛이라는 연(緣)이 닿아 피고 지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 속에 생멸의 작용이 있지요. 생멸이 없다면 씨앗(인)은 물과 빛(연)을 만나도 결코 꽃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성이 자리하겠지요.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연기가 곧 생멸인 겁니다. 따라서 마음이 만든다는 ‘심조(心造)’는 ‘연기생멸’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저도, 연꽃도 연기생멸에 따라 존재합니다. 나아가 우주도 연기생멸 따라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체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일체유심조’입니다. ‘신’ 역시 ‘심’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유심조일체와 유신조천지는 딱 들어맞는다. ‘창조’를 넣어 유신창조천지를 해도 마찬가지이니 흔히 말하는 ‘천지창조’ 또한 이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진정한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연기가 곧 생멸이라는 뜻을 이해하고 나니 일체유심조가 확연해지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가 좀 더 가깝게 다가온다.


도업 스님은 참선, 위빠사나, 염불 수행 과정에서 공통으로 강조하는 게 한 가지 있다고 했다. 다름 아닌 ‘삼매’다. 수생상의 궁극 삼매는 잠시 접어두고라도 일상삼매 의미를 잘 알아서 써야 한다고 강조 했다.


“학자들의 깊은 사유처럼 어떤 일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도 삼매입니다. 따라서 산 속의 밭에서만 선농일치를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상에서 맡은 바 일에 매진하며 수행하면 그게 곧 선농일치입니다.”


도업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된다’는 이치를 전하며 ‘지혜로운 사람이 배우면 깨달음을 이루고 어리석은 사람이 배우면 태어나고 죽는 일뿐’이라는 경구를 잘 새겨보라 권했다.


“태어나고 죽는 일뿐이라는 건 결국 번뇌 속에서 헤매다 이 한 세상 마친다는 소리입니다. 불자라면 일단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배우고 닦아가는 과정 속에서 연기 도리를 확연하게 꿰뚫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듣는 것’에 그친다면 결국 태어나고 죽는 일뿐입니다.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알았다면, 땀 뻘뻘 흘려가며 108참회부터 해야지요. 내가 잠시 맡고 있는 것을 나눌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난 연기법 안다’며 어깨에 힘주는 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한 세상 마칠지 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한 생각, 한 마음 돌려야 합니다.”

 

 

▲도업 스님의 ‘화엄 강의’는 부산 화엄법계사 중심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도업 스님은 나름대로의 근기에 맞춰 바라밀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실천 없는 신앙’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리라. 맹신으로 가는 이유 중 하나가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인격체의 신’을 바라거나 있다고 믿기 때문 아닌가. 아마도 사후에 천당이나 극락에 가고 싶기 때문이리라.


“선인낙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固果)라 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즐거우면 극락이고 괴로우면 지옥입니다. 내가 극락도 지옥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극락에 살고 싶다면 어떤 인연을 지어야 할 지 금방 보입니다.”


도업 스님은 ‘산하대지가 내 몸’이라는 수필집을 내놓은 바 있다. 그 뜻 또한 궁금했다. ‘우리 몸’이 아닌 ‘내 몸’이라는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 것 만 같았기 때문이다.


“연기의 눈으로 보면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습니다. 여기에 착안하면 그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 세상은 상호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직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와 산하대지, 나와 우주만물은 하나인 겁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들에 핀 야생화 한 송이도 연기생멸 속에 존재 합니다. 꽃의 연(緣)에 해당하는 물을 오염시키면 그 꽃은 죽습니다. 꽃이 죽는 환경에서는 결국 나 자신 또한 죽음에 이릅니다. 그 꽃과 상생할 지, 공멸할 지는 결국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달빛과 속삭이는 야생화 한 송이라도 함부로 밟지 마세요.”


도업 스님은 정년퇴임 당시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 후학들과 ‘화엄 법담’을 나눴던 때가 참으로 행복했었다는 소회를 전한 바 있다. 강단은 떠났지만 스님의 화엄 강론은 법계사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화엄학을 전하는 게 아니다. 스님 자신이 일생동안 화엄바다에서 건져 올린 보물을 대중에게 나눠 주고 싶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각(自覺)이요, 용성 스님이 추구했던 대각(大覺) 아닌가!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업 스님
1944년 충남 공주 출생. 1969년 동헌 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1972년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후 동국대 승가학과 1기로 입학했던 스님은 1976년 일본 교토 불교대에서 유학하며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에 부임하며 25년 동안 후학들을 양성한 후 2009년 정년퇴임했다. 정각원장, 불교문화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스님은 현재 화엄법계사 회주이며, 대각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화엄경사상 연구’, ‘불교사상의 이해’, ‘산하대지가 내 몸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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