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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화가의 희망 찾기

기자명 법보신문

2012년 이형우 화가의 작업실을 찾아 광주로 향한 적이 있었다. 여느 때라면 화가의 창작 공간을 엿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가득했을 그날,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 화가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고향 광주로 간 건 1997년. 안정적인 작업실을 구하기 위해서다. 작가의 작업실이란 생계를 버티고 꾸려가야 하는 투쟁의 공간이다. 이 싸움을 이겨내야 작업실은 창작 공간으로 다가 온다. 말 그대로 ‘먹을 게 있어야 예술도 하는 법’이다.


친분을 핑계로 그림 한 점을 부탁했었다. 법보신문 사옥 마련을 위한 전시회에 작품을 기증해 달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두 눈 딱 감고’ 전화를 걸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어떤 말로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다소 떨리는 듯 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시했던 작품 일체가 물에 훼손 됐습니다. 보상 받기도 어렵네요.’


이 화가의 작업실은 6층 건물 5층에 자리했었는데 2008년 11월 이 건물 6층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진압 과정에서 쏜 물이 벽을 타고 그의 작업실까지 흘러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그의 작품 대부분은 물에 완전히 젖어 버렸다.


가난한 화가에게 금고 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그림 한 점 한 점을 차곡차곡 쌓아 가방에 넣어 두는 게 다였다. 공증 받아 놓을 형편도 아니었고, 보험은 꿈도 꾸지 못했을 터. 억울하지만 보상 받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작은 소파 하나는 보상 받을 수 있지만 공증 안 된 작품은 종이 값도 건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물에 젖은 작품은 처참했다. 뭐라 위로하기도 어려워 침묵만 지키고 서 있는데 그가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 한다. “그래도 부탁하신 그림 다 그렸습니다.” 수 년 동안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문제로만도 정신이 없었을 그가 한 점도 아닌 두 점을 그려 주다니….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찾은 운주사’와 ‘아침을 기다리며’.


이 화가에게 운주사는 좀 특별하다. 서울에서 광주로 귀향한 후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 어릴 때 들었던 운주사가 떠올라 무작정 버스에 몸을 실었던 그였다. 운주사에서 어떤 영감을 얻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이후 전시회에 가끔씩 와불이나 닭이 등장했다. ‘닭이 울면 와불이 일어난다. 그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운주사에 배인 후천개벽을 착안한 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 해도 왜 운주사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었다. 운주사서 무엇을 건져내고 싶은 것일까?


며칠 전 그가 사진 한 장과 함께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 왔다. “광주에서 개인전 합니다. 이번엔 닭입니다.” 언뜻 보아도 참 ‘천진난만한 닭’이었다. 전시장엔 어떤 닭이 등장할까? 개를 쫓는 닭도 있을 게고, 마당에서 한가로이 거니는 닭도 있겠지? 하는 나름대로의 상상을 하는 순간 무엇인가가 스쳐갔다. 그는 귀향해서 잠시 방황할 때 운주사를 찾았고, 인생 고난의 순간들이 점철될 때도 운주사를 찾았다. 그렇다. 운주사 와불과 닭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작가의 고뇌가 투영돼 있었던 것이다. 8월에 있을 전시회에서 그가 어떤 세계를 펼쳐 보일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운주사에서 얻은 영감을 좀 더 다듬고 키워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 운주사를 통찰 해 낸 ‘이형우의 운주사 세계’가 벌써 궁금하기만 하다. 8월23일 오픈하는 전시회 제목은 이렇다. ‘환한 웃음이 그리웠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그는 ‘5개월 동안 그림 그리는데 집중할 수 있었던 건 큰 복을 타고 태어났기에 가능했다’는 메시지도 보내왔다. 처참히 망가진 그림과 함께 했던 인연도 이젠 놓을 줄 아는 이형우 화가가 그립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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