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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청주성 탈환

중생고통 구제하려 나선 의승군의 첫 승리

1592년 8월1일 전투에서
영규대사·조헌 등 연합군
임진왜란 첫 승리 이끌어

 

▲영규대사 진영.
1592년 8월1일 이른 아침, 승병장 영규대사와 유생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조선 관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청주성 탈환을 위한 총공세를 감행했다. 7월 하순부터 계속된 조선 연합군의 저돌적인 공격에 청주성을 점령하고 있던 왜군들은 당황했다. 왜군으로선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조선군의 저항이었다. 1592년 4월14일 부산성 함락한 이후 충청도 보은과 청주, 진천까지 함락하고 한양을 향해 진격할 때까지 조선 관군은 이렇다 할 전투 한 번 치루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이무렵 왜군은 한양 진격에 앞서 청주성에 수천 명의 병력을 잔류시켰다. 청주성은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였을 뿐 아니라 북진하는 군사들의 중요한 보급로였기 때문이다.


보름간 계속된 조선 연합군과 왜군들의 청주성 전투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군의 승리로 기울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밝았던 승병들과 의병들의 신출귀몰한 공격 전술 앞에 조총을 앞세운 왜군들의 막강한 화력도 속수무책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조선 의병들의 전의는 이미 왜군들을 압도했다.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투는 갑작스런 폭우로 잠시 소강상태를 맞게 됐다. 그러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왜군은 날이 갠 후 다시 시작될 조선 연합군과의 전투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왜군들은 청주성을 버리고 북문을 통해 죽산 방면으로 줄행랑을 쳤다.


마침내 조선 연합군은 청주성을 탈환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육군의 첫 승전이었다. 그것도 관군이 아닌 스님들과 의병들이 왜의 정예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다. 사실 청주성 승전은 전쟁을 예견한 영규대사의 뛰어난 지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장이었던 영규대사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식과 무예가 뛰어나 훗날 큰 장수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미천한 출신 탓에 뜻을 접고 계룡산 갑사로 출가해 서산대사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갑사와 서봉사, 가산사, 보석사 등에서 정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해 수많은 백성들이 왜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스님은 죽비 대신 칼을 움켜쥐었다. 왜군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죽어가는 조선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수미산보다 큰 살생의 과보도 묵묵히 짊어지고 나가겠다고 발원했다. 스님의 원력은 함께 정진하던 대중들에게도 전해졌고, 다른 사찰에서 정진하던 스님들도 하나 둘 승병군에 동참했다. 영규대사는 싸움에 앞서 조선 연합군에게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 왜군과 정면대결을 벌일 경우 결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전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 회복을 이끌었던 조헌이 여세를 몰아 금산성 출정을 고집했다. 당시 영규대사를 비롯해 많은 의병군들은 이를 반대했다. 적의 규모는커녕 금산성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점에서 무작정 전쟁에 나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조헌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고 죽음을 함께 하기로 맹세했던 영규대사도 승병 600여명과 함께 길을 따라 나섰다.


전쟁은 예상대로 완패였다.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 600명과 조헌이 이끄는 700명이 금산성 인근 연곤평에 다다를 무렵 이곳에 매복하고 있던 왜군에게 완전히 포위돼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의병들은 마지막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었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몰살로 이어졌지만 이들의 항전은 패전만 거듭하던 조선인들에게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4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영규대사와 그를 따르던 600여명의 승군들은 역사적 차별을 받고 있다. 오직 유생 조헌과 그를 좇던 700여명의 의병들만 금산성 전투를 대변하고 있다. 물론 숭유억불의 관점에서 기록된 역사의 산물이겠지만 이제라도 나라를 위해 불살생계마저 등졌던 영규대사와 승병들의 숭고한 정신은 반드시 재평가돼야 한다. 그 일차적인 역할과 책임이 오늘날 불교계에 있음은 자명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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