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 향엄상수(香嚴上樹)

기자명 강신주

말의 나무에서 내려와 튼튼한 땅에 발을 딛어라

스님들의 묵언 수행은
좋은 업을 짓기 위한
치열한 자기노력 과정
말에 대한 부정 아니라
제대로 말하기 위한 수행


향엄(香嚴) 화상이 말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랐는데, 입으로는 나뭇가지를 물고 있지만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지도 않고 발로도 나무를 밟지도 않고 있다고 하자. 나무 아래에는 달마가 서쪽에서부터 온 의도를 묻는 사람이 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가 질문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고, 만일 대답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무문관(無門關) 35/ 향엄상수(香嚴上樹)

 

 

▲그림=김승연 화백

 

 

1. 제대로 말하려면 침묵해야

 

묵언수행(言修行)을 아시나요. 글자 그대로 침묵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극단적인 수행을 스님들은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건 말만큼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낳는 행동도 없기 때문이지요. 말은 칼보다 더 날카롭게 상대방의 가슴을 찌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말은 따뜻한 옷이나 쾌적한 집보다 더 푸근하게 상대방을 품어줄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사실 말은 칼보다 더 무서운 겁니다. 칼에 찔리면 그 순간 너무나 커다란 고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지만 그 칼을 빼고 치유를 하면 흉터는 남겠지만 고통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반면 말은 뺄 수 없는 칼과 같습니다. 그냥 죽을 때까지 사람의 마음에 꽂혀 있기 때문이지요. 자비의 마음을 품으려는 스님들이 말에 대해 수행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혹여 경솔한 말 한 마디가 자비는커녕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길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행동을 업(業, Karman)이라고 합니다. 행동은 그에 걸맞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불교의 업보(業報, karma-vipāka) 이론입니다. 타인에게 좋든 그르든 강한 결과를 남기는 업을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바로 삼업(三業, trīṇi karmāṇi)이지요.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身業)이라고 하고, 말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이라고 하고, 마지막으로 생각으로 짓는 업을 의업(意業)이라고 부릅니다. 묵언수행은 바로 말로 나쁜 업이 아니라 좋은 업을 짓기 위한 스님들의 치열한 자기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나 스님들은 생노병사에 집착하고 번뇌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선생님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잘못 말하게 된다면, 스님을 믿고 온 사람들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만날 수도 있지요. 그러니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고 제대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 잊지 마세요. 묵언수행은 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직접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묵언수행에는 한 가지 부수 효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타인을 만날 때, 말을 못하니 상대방의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시끄럽게 떠들거나 혹은 떠들려는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과연 타인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서 이쪽의 침묵은 어쩌면 저쪽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침묵은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침묵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잘 듣게 된다는 것이지요. 잔소리가 심한 스님이나 혹은 난해한 경전 조목을 지치지 않고 강론하는 스님보다 암자 뒤편에 홀로 외롭게 있는 석불이 더 낫지 않을까요. 자비로운 미소로 석불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으니까요. 어떤 비난도 어떤 훈계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석불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고뇌를 시원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겁니다.


2. 형이상학적 질문, 삶에 집중 방해

 

삶의 맥락을 떠난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해 침묵해야만 하고, 상대방이 들어주는 것만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때는 침묵해야만 합니다. 형이상학적 쟁점에 대한 침묵을 불교에서는 무기(無記, avyākrta)라고 말합니다.

 

세계는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혹은 영혼과 신체는 다른가, 같은가? 등과 같은 질문에 대해 싯다르타는 침묵했던 적이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삶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싯다르타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면, 제자들은 그런 문제를 숙고하고 토론하느라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했을 겁니다. 죽은 뒤에 영혼이 있냐는 질문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대답하는 순간, 상대방은 더 큰 문제를 고민할 겁니다. 영혼이 없다고 하면 그는 허무주의에 빠질 것이고, 영혼이 있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경시할 테니까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소연할 곳이 없어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침묵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할머니가 자기 남편이 동네 다방 마담과 바람을 핀다고 스님에게 하소연하러 왔습니다. 할머니는 갑갑한 자기의 마음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스님을 찾아온 것이지, 스님에게 답을 구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냥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가 측은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나 자식들 보기가 민망하기도 한데, 말할 곳이 없어 답답하여 찾아온 겁니다. 할아버지의 바람기를 응징하려고 했다면, 경찰서로 가지 왜 산사에 올라왔겠습니까. 당연히 이 경우 스님은 쓸데없이 불교 교리를 읊조려서는 안 됩니다. 그저 미소와 함께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면 됩니다. 어쩌면 산사로 가는 가파른 길을 오르며, 할머니의 마음은 이미 많이 누그러졌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사태를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순간, 상대방은 더욱 더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고 애써 평정을 되찾은 마음은 요동치게 될 겁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하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것도 침묵해야만 합니다. 침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침묵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무문관’의 다섯 번째 관문에는 높은 나무가 하나 서 있고, 거기에 젊은 스님 하나가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매달려 있습니다. 손이나 발로 나무줄기를 잡고 있지도 않으니, 마치 물고기가 낚싯대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기이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매달려 있는 나무 밑에 어떤 사람이 와서 물어봅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가 질문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고, 만일 대답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3. 희론에서 벗어나 진리를 바로보라

 

향엄(香嚴, ?~898) 스님은 장난꾸러기입니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스님을 곤궁에 빠뜨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잠깐 향엄 스님이 던진 화두를 풀기 전에 가능한 오해 한 가지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스님이 지금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를 품고 있는 한, 우리는 ‘무문관’의 다섯 번째 관문을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겁니다. 사정은 그 반대입니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있다는 것은 그 스님이 입에만 의지하여 스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지요. 스님은 손도 쓰지 않고 발도 쓰지 않습니다. 이제 분명해지시나요. 한 마디로 말해 스님은 구업의 화신인 셈이지요. 계속 입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그 스님이 침묵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는 무엇인가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남의 이야기나 남의 이론을 듣는다는 것은 그로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입을 쓰지 않으면 떨어져 죽을 것만 같은 나무에 입으로 매달려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러니까 입에 의존하지 않는 순간, 그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보다 존경스러운 사람이 그 스님에게 대답을 요구합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 반드시 대답해야만 합니다. 자, 여러분이 이 스님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선 손과 발로 나무줄기를 튼튼히 잡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조심조심 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될 겁니다. “아까 뭐라고 하셨지요.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에 대해 물으셨나요.” 이렇게 땅에 발을 디디면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자기의 입에만 의존하지 않게 될 겁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 아닌가요. 이제 자신의 입에만 의존하지 않기에 기꺼이 침묵할 수도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니까요.


‘조당집(祖堂集)’이나 ‘전등록(傳燈錄)’ 등을 보면 향엄 스님의 화두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막이 등장합니다. 향엄 스님에게 어느 상좌 스님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무 위에 오른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나무에 오르기 이전은 어떻습니까?” 상좌 스님의 질문에 향엄 스님은 통쾌하게 웃었다고 합니다. 상좌 스님이 화두를 꿰뚫어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땅에서는 침묵할 수도 있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입만으로 나무에만 매달리면 계속 입에 힘을 써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계속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스님이 매달려 있던 나무는 말의 나무였던 겁니다.

 

▲강신주

말이 말을 낳고 또 말을 낳아 만들어진 거대한 이론 체계, 불교에서 말하는 희론(戱論, prapan͠ca)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 나무였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나뭇가지에서 입을 떼세요, 그러니까 침묵하세요. 그리고 손과 발을 이용해서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그 튼튼한 땅에 발을 내딛을 때에만 우리는 말과 침묵에 자유로운 부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