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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중생무변서원도

기자명 법보신문

세세생생 타인에 도움 되는 지혜 일으켜야

부처님 마음과 원력 배워도
좋은 음식 소화 못 시키듯
이기적 집착과 분별 붙들고
경전과 삶 분리되면 헛공부


순천 송광사 같은 고찰에 살다보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도량운력을 한다. 호미를 들고 풀을 뽑고 있는데 학인스님이 다가와서 물었다. “경전을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대답했다. “경전을 잘 보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경전은 이러저러한 것을 설명하고 나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라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하지 말라는 행위는 그 습관을 지워 나가면 됩니다. 실천을 해 보면 경전이 잘 이해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내용을, 읽고 이해만하는 수준에서 만족하면, 그 내용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삶과 연결되지 않는 가르침은 써먹지 않는 물건과 같다. 무용지물이란 말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문제는 좋은 것을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으로 소화하지 않는데 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지 못하면, 그 음식이 우리 몸속에서 독으로 변한다. 좋은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실천이 없이 이해한 가르침은 억측을 낳는다. 억측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악지견을 낳는다.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정성과 공경을 다해 배우고 실천하면, 이해가 점점 깊어지고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정행품 경문을 보자.


“정식으로 출가할 때면, 중생들이 부처님의 출가를 닮아서 일체중생을 구호하기를 발원해야 한다.”


‘정식으로 출가한다’는 것은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머리카락을 깎고 가사라는 스님의 옷을 입는 것이다. 내용적인 면으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출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몸은 출가하였는데 마음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으면 진정한 출가가 아니다. 이러한 출가는 유명무실한 것이다. 마음은 출가하였는데 몸이 출가하지 않은 경우는, 훌륭하기는 하지만 정식 출가는 아니다. 마음이 출가한 사람은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에 집착이 없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나 장관 혹은 대 부호가 될 수 있다.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이런 마음출가를 한 사람에게 아무나 접근해서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 제약이 있게 된다. 정식으로 출가하여 가르침을 펴는 선지식에게는, 누구나 신분상의 제약 없이 접근이 가능하다. 평등하고 제약 없는 이익을 나누려면 정식으로 출가한 신분이 가장 좋다. 정식으로 출가를 하려면 선근과 복덕과 인연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출가를 닮다’에서 2500년이 지난 지금도 부처님의 전기를 통해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는다. 부처님의 생애를 통해 부처님의 출가와 수행 성도와 교화의 과정을 알 수 있다. 정식으로 출가한 스님은 부처님을 배워야 한다. 부처님의 발심 수행하였던 모습을 배워야 한다. 부처님의 마음 씀씀이를 배우고 부처님의 커다란 원력을 배워야 한다. 부처님의 커다란 지혜와 커다란 능력 그리고 커다란 덕성을 배워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배워 내 삶 속에서 행위와 습관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리고 정식으로 출가한 스님만이 아니라 일체의 중생이 모두 같은 마음을 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을 구호하기를 발원해야 한다’에서 이 내용은 사홍서원의 첫 번째 ‘중생무변서원도’와 같다. 사홍서원은 모든 수행자의 원을 간단하게 집약한 것이다. 그러면 중생무변서원도의 내용을 보자. 이 우주에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무한하게 많다. 숫자적으로도 그렇겠지만 종류별로도 그러하다. 그것들 중에는 우리의 사랑과 존중을 받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 형편이 여유로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괴로움이라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도 괴로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현실은 그러하다.


집착과 분별과 망상이라는 번뇌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긴다. 마치 망상, 분별, 집착이 자신을 도와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으로 믿는다. 최소한 손해는 안 보게 해 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의 의지처인 이것들이 괴로움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는 공장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악몽을 꾸고 있는 이가 있다면 깨워 주는 것이 옳다. 길을 잘못 알고 헤매며 고통을 받는 이가 있다면 바르게 알려 주어야 한다. 어려움에 처한 이가 있다면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기적 행위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괴롭히는 것이며, 이타적 행위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계산법은 이와는 정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기적인 집착과 분별을 놓지 못한다. 놓으면 죽는 줄 안다.

 

▲도암 스님.

누구인가 놓아 보고 이익을 얻은 경험을 해본 지혜로운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그러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많은 이들을 돕고 싶다’는 원을 일으키는 것이다. 세세생생에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진실한 지혜와 실천력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겠다는 다짐이 그것이다. 그것을 일러 ‘중생무변서원도’라 얘기할 수 있겠다.

 

도암 스님 송광사 강주 doam1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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