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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사 국제선원 조실 대봉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한국 선 통해 심연 보라 세상은 변화할 것이다

미국 흑백 인종차별 직시
어린 시절부터 ‘고통’ 화두


11살 때 본 일본 대불에
자비·평화 온 몸으로 느껴
예일대 숭산 스님 강연서
‘집착’ 따른 심성 이해


고통은 내가 만드는 것
수행했다면 보살행 하라


한국·해외 수행가교 역할
무상사 본연 의무 다할 터

 

 

▲대봉 스님은 스승인 숭산 스님이 미국에서 처음 문을 연 프라비던스 선원에 들어가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 서울 화계사로 출가한 스님은 1999년 여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대봉(大峰)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해외와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대봉 스님은 “내가 고통을 만들지 않으면 타인에게 줄 고통도 없다. 수행을 하고 부처님 법을 이해했다면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도, 부처님 법도 무용지물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다만 알지 못함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단지불회 시즉견성. 但知不會 是則見性)한 것이다.’ 서울 화계사에 세워 진 고봉 스님 추모탑에 새겨진 명구다. 그 깊은 뜻 헤아릴 수 없지만 이 속에 담긴 역설을 조금은 알 듯하다. ‘앎을 구하고자 한다면 얻을 수 없다.’ 무엇을 ‘앎’이라 하기에 이 ‘다만 알지 못함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라 한 것일까? 화계사 조실이었던 숭산 스님이 전한 일갈과도 일맥상통해 보였다. ‘오직 모를 뿐!’


계룡산 무상사 국제선원을 찾았다. 계사년 하안거를 맞아 40여명의 외국인을 포함한 80여명의 수행자가 곧 해제를 맞는다. 국제선원 대중을 지도하고 있는 스님은 숭산 스님의 수제자 대봉 스님. 유대계 미국인으로서 1977년 뉴헤이븐 선원에서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감명 받아 미국 프로비던스 선원 행자 생활을 거쳐 1984년 화계사로 출가했다. 1992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전법제자가 된 스님은 현재의 무상사와 국제선원을 일군 인물이기도 하다. 대봉 스님을 통하다 보면 ‘오직 모를 뿐!’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무상사를 찾았다.


▲대봉 스님은 차 한 잔을 마셔도 숭산 스님에게 먼저 올린다. 숭산 스님과 벽암 스님이 다정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은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손수 차를 냈다. “한국에 오래 머물렀지만 아직도 한국어가 능숙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활짝 웃어 보인다. 만면에 번진 미소는 그윽했다. 청량함과 따듯함이 배여 있었기 때문이리라. 순간, 왠지 모르게 긴 말은 필요 없을 듯했다. ‘무상사 국제선원은 무엇을 해제 하셨느냐?’ 여쭈어 보았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잡니다.”


일상이 곧 수행인데 결제 따로 있고 해제 따로 있겠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녹록한 일이 아니다. 일상의 여여함이 동반되지 않는 한 꿈도 못 꿀 일이다. 적어도 연기법에 따른 무상무아에 대한 이해라도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그래서 ‘무상무아에 대한 3분 소참법문’을 부탁드렸다.


대봉 스님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작은 시계 하나를 다탁에 올려놓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금강경이 전하는 ‘공(空)’을 들어내 보인 것일까? 실상을 제대로 알면 이 세상이 공한 것인 줄 안다고 옛 선지식들은 누누이 강조해 왔지 않은가!


3분여가 흘렀을까? 스님은 가부좌를 풀었다. 순간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지가 궁금했다. 이러한 의문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다.


미국의 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대봉 스님. 여느 중산층의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뛰어놀며 공부에만 전념했어도 출세가 보장되었을 대봉 스님에게는 특별한 ‘화두’가 잡혀 있었다. 다름 아닌 고통이다. 10대 이전에 이미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흑인과 백인의 차별 현실을 보며 그 속에 배인 인간의 이기심을 간파했던 것이다. 청년이 되어 물리학에서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유도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무엇인가를 알면 고통도 끊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따른 것이었다. 자신의 고통 뿐 아니라 인간이 갖고 있는 고통까지 말이다. 그 청년이 지금은 한국의 무상사 국제선원 조실이다.

 

 

▲ 국제선원 내부 모습.

 


우선,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 차별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궁금했다. 그 차별에서 정확히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스님은 혹 미국 프로야구 선수였던 ‘재키 로빈슨’을 아느냐 물었다.


류현진 선수가 현재 몸담고 있는 현 LA다저스 전신인 브룩클린 다저스에서 뛰었던 미국 메이저리그(MLB) 최초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을 말함이다. 다저스 구단이 그를 영입하자 타 구단은 물론 다저스 동료들조차 그와 함께 뛰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진가를 보이는 것은 물론 인종차별을 없애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1997년 4월, 입단 50주년을 기념해 그의 등번호 42번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포함한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술집은 물론 상점가에도 ‘흑인 출입금지’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붙어 있었습니다. 절대 들어갈 수가 없었지요. 무엇이 흑과 백을 갈라놓았던 것일까요? 그로인해 피해를 보는 흑인의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오만’이라는 칼로 흑과 백을 갈라놓은 겁니다.”


10대에 이미 저항 음악의 선두주자였던 밥 딜런에 푹 젖어 있던 무봉 스님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50만 반전 시위에도 가담한 바 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고통을 주는 전쟁을 반대하는 건 당연지사였을 터. 당시 시위 지도부에 속했던 스님이었지만 그 시위에서 건진 건 또 다른 ‘고통’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평화로운 시위가 진행될 동안에는 뭔가 희망이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시위에서 군중과 경찰간의 격렬한 충돌이 있었습니다. 시위를 지도한 지도부 동료들 간의 싸움도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가 정권을 잡아도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 같다.’ 동감했습니다. 정치 역시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 보다는 이익을 좇는 무리들을 옹호해 주는 교묘한 술책으로 보였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정신질환자 상담을 자원해 4년 동안 봉사했지만 그 곳에서도 고통의 해결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환자들을 사무적 관점에서 보며 거칠게 대하는 의사들을 보며 회의감만 들 뿐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환자들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간호사를 통해 느낀 바가 있었다고 한다.


“간호사에게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 지혜는 따듯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습니다.”그 때, 정확히 1977년 예일 대학에서 숭산 스님의 강연을 들었다. 누군가 숭산 스님에게 질문했다. ‘제 정신과 미친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숭산 스님이 답했다. ‘집착하면 미친 것이고, 집착하지 않으면 제 정신이다.’ 대봉 스님의 가슴에 큰 파문이 일었다. 심리학을 통해서도 얻지 못했던 그 무엇이 숭산 스님 일언에 있음을 직감했다. ‘이거다!’


대봉 스님은 11살 때 일본 가마쿠라 대불을 참배한 바 있었다고 한다. 가마쿠라 대불이라면 1252년 청동으로 조성된 좌불상으로 높이 13.4m, 무게만도 12톤의 대불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이 대불은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고 하여 세계인들의 발길이 지금도 줄을 잇고 있다.


“평화를 보았습니다. 자비로운 부처님 미소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성스러워 보였습니다.”


불연과의 숙연에 기인했던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미국의 11살 소년이 처음 본 대불 앞에서 어찌 평화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겠는가. 스님 처소에도 이 대불 사진이 한쪽 벽에 걸려 있다. 그 불연은 숭산 스님으로 이어졌다.


숭산 스님 한 마디에 ‘고통’은 풀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박3일씩 세 차례 숭산 스님 지도아래 정진했다. 세 번째 정진 마지막 날, 숭산 스님과의 이별 직전에 대봉 스님은 숭산 스님에게 여쭈었다.


‘언제 다시 스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죽비가 정강이에 내리 꽂혔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네가 모르는 마음 간직하면 너와 나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대봉 스님은 그 즉시 직장을 그만 두고 미국에서 숭산 스님의 처음 문을 연 프라비던스 선원에 들어가 2년 동안의 행자생활에 돌입했다. 1984년 화계사로 출가한 스님(법명 도문)은 1999년 여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대봉(大峰)’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대봉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당신이 만들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탁 트였다. 그렇다.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고통은 누가 주기 이전에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너무도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꺼린다. 직시하기보다는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두려워서일까? 무엇이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탐욕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의식을 흐리게 합니다.”


어찌하면 그 탐욕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스님은 과일이 놓여있던 접시에서 수박 한 조각을 건넸다.

 

받았다. 스님은 웃었다. ‘그 탐욕 또한 당신이 만든 것이니 스스로 해결하라’는 뜻일 것이다. 방편이 없어 해결하지 못하는 게 아니지 않냐는 역설인 셈이다. 대봉 스님은 대중 법문과 언론 인터뷰에서 이 말을 전한 바 있다. ‘나는 모른다(I don’t know)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모른다’는 자각이고, ‘오직 모를 뿐’은 사실입니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모른다 이전에 ‘아는 것’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어야만 이 의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인지하고 있기에 ‘안다’고 말하는 것일까? 접시에 놓인 수박은 수박이라 이름 했을 뿐이다. 수박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해서 수박의 맛도 모르면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지식이라는 게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체득하지 못하면 아는 게 아니다. 그러니 ‘모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I, 즉 ‘나’를 내려놓으면 됩니다. ‘나’에 집착하면 따르는 건 고통이고, ‘나’에 집착하지 않으면 ‘평화’가 따릅니다.”
지식을 내려놓고 지혜를 갈구해 왔던 대봉 스님의 일언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 계룡산 무상사 국제선원 전경.

 


무상사를 세운 원력이 궁금했다. 국제선원 완공 이후 매년 홍콩, 중국, 말레이시아 등의 20여개국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해외와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이 선원에서 한국의 선의 진미를 조금이라도 맛보이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욱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국 유수 선원으로 보내고자 합니다.”


그 원력에 담긴 스님의 의지가 또 궁금했다.


“한국의 선을 통해 인간의 심연을 본다면 세상은 분명 변화할 것입니다.”


한국의 선을 이토록 멋지고 간절하게 전한 일언이 또 있었던가!


“내가 고통을 만들지 않으면 타인에게 줄 고통도 없습니다. 수행을 했다면, 아니 부처님 법을 이해했다면 보살행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도, 부처님 법도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쭈어 보았다. ‘오직 모를 뿐’은 숭산 스님의 메시지다. 대봉 스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고 있는가? 무상사 국제선원 조실 대봉 스님을 친견해 보라 권하고 싶다. 가슴 한 구석에 작지만 큰 울림의 파문이 일 것이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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